Description
“안민(安民) 이외의 일들은 전부 군더더기” - 오리 이원익의 『다스림과 섬김의 行』
오리 이원익 정승은 당대 문인들로부터 ‘온화하고 공손하며 공로가 많음에도 겸손한 덕을 갖춘 재상’으로 추앙받았다. 문신 출신임에도 왜란 중에 조선 최초의 도체찰사(전시에 각 도의 군권과 행정권을 총괄한 전군 총사령관)를 역임하면서, 무신과 의병 출신의 여러 장수들에 대한 이해와 지휘 통제에도 능란하였으며, 당파 간 이권 다툼과 정쟁의 각축 가운데에서도 선조 이후 광해(북인집권)와 인조(서인집권)에 걸쳐 초대 영의정으로 선임되었다. 이원익은 남4도 도체찰사로서 선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개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 밖의 일들은 전부 군더더기(餘外)일 뿐입니다.”
이원익은 출신과 지위를 초탈하여 스스로 검약하고 신실하게 살았으며, 하늘처럼 넓은 도량이 있었고, 백성을 위해 부모처럼 자애롭게 살았으므로 당대와 후대의 임금과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원익의 군더더기 없는 안민 정책, 실리를 취하는 대외 교섭, 차별 없는 인재 등용, 전쟁의 대비와 국방력의 유지 강화(이순신을 처형으로부터 구한 것 포함), 철저한 공익 추구, 대동법의 최초 시행, 그리고 최고 권위인 임금과의 도유우불(都兪吁咈) 등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없었던 “다스림과 섬김의 行”인 정신 유산이다.
이 책을 읽는 지금의 지도층과 국민들이 오리 이원익 정승의 학문과 사상을 알게 되어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살게 되는 나라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또한, 이원익의 가려진 역사를 밝히 알려 전 국민에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나라에 이원익의 “다스림과 섬김의 行”의 정신이 국민의 정신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하는 배경 지식으로 삼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순신 구명과 군사지도” - 오리 이원익이 왜란(倭亂)을 승리로 이끌다
이원익이 왜란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여정은 안주목사(安州牧使) 부임으로 시작된다. 선조와 명량상우(明良相遇)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이 때다. 당시 피폐했던 안주는 유능한 중신조차 기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원익은 발령 즉시 안주로 가서 구민(救民)의 선정을 베풀어, 안주는 물론 모든 관서지방 민심을 다시 모이게 한다. 이로써 선조는 이원익의 일처리와 인품을 알게 되고 이후 임진왜란 발발 시 그를 중용한다. 이원익은 무슨 일을 맡더라도 지식과 정보에 따라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하였다.
평양 탈환을 앞두고 이여송은 조선과 명 간의 군사동원 문제를 두고 출병하지 않고 대기만 하고 있었을 때, 이원익은 요동으로 달려가 제독을 만난다. 이원익이 제독에게 말 대신 전한 것은, 몇 달간 주도면밀하게 현지 지형에 맞춘 군사작전지도를 직접 작성하여 봉투 안에 넣고 밀봉하여 조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592년 12월 29일 평양에 도착한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 6일에 공격을 개시하고, 1월 8일 적이 전원 후퇴하자 평양성에 입성하여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이순신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이순신의 처분을 두고 서인과 동인 간의 당쟁으로 번지게 된다. 이로써 이순신의 운명을 결정하던 어전회의에서 유성룡 마저 이순신의 처형을 막지 못하고 물러난다. 체찰사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함께 한 이순신의 사람됨과 능력을 누구보다 실질적으로 알고 있었고, 홀로 이순신의 처형을 결연히 막아낸다. 이순신은 모진 문초를 당하지만 처형은 모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원익의 결단과 실행이 없었다면, 당시 이원익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정유재란의 승리도, 조선도 지금 어디로 가있었을지 몰랐을 충격적 사실이 이 책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우의정겸도체찰사(右議政兼都體察使)” - 선조와 이원익의 『명량상우(明良相遇)』와 『도유우불(都兪吁咈)』
이원익이 공직자로 입문할 때 과거시험 주제인 명량상우(明良相遇)와 도유우불(都兪吁咈)은 그의 평생의 기본자세로 실천된다. 도유우불(都兪吁咈)은 임금과 신하가 동심합덕(同心合德)한 속에 서로 더불어 토론하는 말로 쓰이는 감탄사로서, 상하 관계를 떠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기록을 보면 이원익은 선조-광해-인조 임금과 함께 민유방본(民惟邦本)을, 국난 극복을, 그리고 대동(大同)을 구현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주목사 부임으로 시작된 이원익과 선조의 명량상우는 서로 흉금을 터놓고 생각을 주고받는 군신 관계가 된다. 이 책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선조와 이원익의 대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두 사람은 상황 상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번 대화를 하게 되면 그 내용과 깊이, 형제애 같은 교감까지, 상호간 도유우불을 전개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조는 이원익을 우의정 발령과 함께 전시 상황의 전권(남4도도체찰사)까지 겸하여 맡기고, 장수 문제는 물론, 병력, 전략, 군량과 정보까지 모두 이원익과 함께 상황을 판단한다. 명-일간의 외교문제 역시 좌의정 이원익을 통해서 판단하였고, 정쟁과 불신 가운데 이순신의 처형을 피하게 되는 결정까지... 선조와 이원익은 도유우불로써 정유년의 길었던 왜란을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조선을 구하는 역사를 함께 써나간다.
이원익의 애민애국(愛民愛國)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탕평(蕩平)과 온 세상이 화평하게 되는 대동(大同)을 제도화하는 실천과, 균형과 중용(中庸)의 공과 사(公與私) 정신으로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이원익이 선조와 교감하며 보여준 “도유우불의 행”이 있었기에 실현이 된 것이다.
“나의 마음부터 먼저 백성을 사랑하고, 물자를 아끼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오리 이원익 정승, 그의 삶을 따르는 맑고 밝은 인생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완평(完平), 모든 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하여” - 이원익의 치세어록(治世語錄)
이원익은 선조와의 대화에서, 그의 문집에, 그리고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평생의 신념과 행동원칙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원익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民惟邦本), 공은 공, 사는 사(公與私), 씀씀이를 절제하고 사람을 사랑하라(節用而愛人) 와 같이, 삶의 중심에 백성의 안녕을 두고 그 실천을 위하여 스스로 검약하며 공과 사에 대한 분명히 구분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 근본인 인심에 달렸다(天下萬事 以人心爲本)고 하는 그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너무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원익 정승이 유고한 후 후대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밝은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고(不動心), 이로써 임금을 섬겨 서로 신뢰하였고, 신뢰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따랐으며, 이렇게 국가의 대란을 극복하였다. 모두가 그를 어진상국(賢相)이라 불렀으니, 정의를 실천하고 대의로 정성스럽게 살았다. 말과 행동이 일관되어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의 먼 훗날을 위한 장구한 계획이 있었다. 그는 오랜 재상 생활에도 공사가 분명했고 검약했으며 조야는 물론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손자 이수약이 연풍현의 수령으로 부임할 때 써 준 글에서 이원익은 그의 절제와 중심을 뚜렷하게 표명하고 있다. 공인(公人)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정보(천하의 실정, 일의 실정)의 중요성과, 상벌의 원칙을 가르친다.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이익을 도모하는 것보다 중요하며, 한 가지 일을 덜어내는 것이 하나의 일을 새로 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알린다.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사람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도록 가르치며, 거만을 부리지 않아야 민심을 잡을 수 있음도 가르친다. 무엇보다,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고, 관속을 대하는 것 또한 각박하게 하지 말기를 당부하며, 마땅히 때를 따라 마음을 다하도록 이른다. 이 모든 金言은 그의 16자 유훈 “無怨於人 無惡於己 志行上方 分福下比”에 응축되어 전해진다.
“고공가와 고공답주인가” - 선조의 사서삼경 언해 작업에 대하여
나랏일을 근심하고 충성을 다하는 절개(憂國忠節)는 예나 지금이나 국민 모두에게 필수 덕목이다. 애국심은 그 사람의 쌓은 업적 또는 하는 말이나 글을 통해서 접하고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한데, 결과적으로는 시종일관되지 않거나 언행일치하지 않을 경우 신뢰를 잃게 되고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이원익의 시와 글을 보면서 그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으며, 과연 그가 시종일관 언행일치한 인물이었음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많은 임금이 한문의 언해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중 선조의 노력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이었다. 선조는 1574년부터 1606년까지 무려 32년간 줄기차게 언해 작업을 추진하면서 백성이 쉽게 사서오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위대한 문화 창달의 대업을 이루었다. 나아가 백성들에 알릴 교서는 물론, 절망으로부터 빠른 극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고공가(雇工歌)」와 같이, 백성과의 직접 교류를 원할 때 한문이 아닌 言文(한글)으로 소통하였다. 선조의 「고공가」에 대한 이원익의 답시인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는, ‘고공가’에서 선조가 애타게 찾고 있는 신하의 자세를 명철하게 가르치고 있다.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臣下)에게 마누라(宣祖)의 말을 왜 듣지 않느냐고 꾸중하는 한편, 마누라(선조)에게는 어른 종(영의정 이원익)을 믿으라고 풍유(諷諭)한다. 선조 승하 시 쓴 ‘녹양이 천만산들’ 시조에서는 그 어떤 사모가(思慕歌)보다도 더 애절하게 이원익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420여 년 전 한글로 작시된 이 시들을 노래하면서, 이원익이 선조를 대하면서 품게 된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 동생처럼 아끼는 임금에게 충성하고픈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절하게 슬퍼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새삼 느낄 수 있다. 현세에 와서도 이러한 마음은 여전하기에, 이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 동력으로 삼고, 오리 이원익 정승을 현세에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나누고 싶다.
“대개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 밖의 일들은 전부 군더더기(餘外)일 뿐입니다.”
이원익은 출신과 지위를 초탈하여 스스로 검약하고 신실하게 살았으며, 하늘처럼 넓은 도량이 있었고, 백성을 위해 부모처럼 자애롭게 살았으므로 당대와 후대의 임금과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원익의 군더더기 없는 안민 정책, 실리를 취하는 대외 교섭, 차별 없는 인재 등용, 전쟁의 대비와 국방력의 유지 강화(이순신을 처형으로부터 구한 것 포함), 철저한 공익 추구, 대동법의 최초 시행, 그리고 최고 권위인 임금과의 도유우불(都兪吁咈) 등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없었던 “다스림과 섬김의 行”인 정신 유산이다.
이 책을 읽는 지금의 지도층과 국민들이 오리 이원익 정승의 학문과 사상을 알게 되어 세상의 변화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살게 되는 나라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 또한, 이원익의 가려진 역사를 밝히 알려 전 국민에 가까이 다가가서 우리나라에 이원익의 “다스림과 섬김의 行”의 정신이 국민의 정신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하는 배경 지식으로 삼게 되기를 기원한다.
“이순신 구명과 군사지도” - 오리 이원익이 왜란(倭亂)을 승리로 이끌다
이원익이 왜란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여정은 안주목사(安州牧使) 부임으로 시작된다. 선조와 명량상우(明良相遇)의 군신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이 때다. 당시 피폐했던 안주는 유능한 중신조차 기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원익은 발령 즉시 안주로 가서 구민(救民)의 선정을 베풀어, 안주는 물론 모든 관서지방 민심을 다시 모이게 한다. 이로써 선조는 이원익의 일처리와 인품을 알게 되고 이후 임진왜란 발발 시 그를 중용한다. 이원익은 무슨 일을 맡더라도 지식과 정보에 따라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일념으로 하였다.
평양 탈환을 앞두고 이여송은 조선과 명 간의 군사동원 문제를 두고 출병하지 않고 대기만 하고 있었을 때, 이원익은 요동으로 달려가 제독을 만난다. 이원익이 제독에게 말 대신 전한 것은, 몇 달간 주도면밀하게 현지 지형에 맞춘 군사작전지도를 직접 작성하여 봉투 안에 넣고 밀봉하여 조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592년 12월 29일 평양에 도착한 조-명 연합군은 1593년 1월 6일에 공격을 개시하고, 1월 8일 적이 전원 후퇴하자 평양성에 입성하여 탈환에 성공하게 된다.
정유재란이 발발했을 때 선조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이순신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이순신의 처분을 두고 서인과 동인 간의 당쟁으로 번지게 된다. 이로써 이순신의 운명을 결정하던 어전회의에서 유성룡 마저 이순신의 처형을 막지 못하고 물러난다. 체찰사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함께 한 이순신의 사람됨과 능력을 누구보다 실질적으로 알고 있었고, 홀로 이순신의 처형을 결연히 막아낸다. 이순신은 모진 문초를 당하지만 처형은 모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이원익의 결단과 실행이 없었다면, 당시 이원익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정유재란의 승리도, 조선도 지금 어디로 가있었을지 몰랐을 충격적 사실이 이 책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우의정겸도체찰사(右議政兼都體察使)” - 선조와 이원익의 『명량상우(明良相遇)』와 『도유우불(都兪吁咈)』
이원익이 공직자로 입문할 때 과거시험 주제인 명량상우(明良相遇)와 도유우불(都兪吁咈)은 그의 평생의 기본자세로 실천된다. 도유우불(都兪吁咈)은 임금과 신하가 동심합덕(同心合德)한 속에 서로 더불어 토론하는 말로 쓰이는 감탄사로서, 상하 관계를 떠나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기록을 보면 이원익은 선조-광해-인조 임금과 함께 민유방본(民惟邦本)을, 국난 극복을, 그리고 대동(大同)을 구현하는데 평생을 바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주목사 부임으로 시작된 이원익과 선조의 명량상우는 서로 흉금을 터놓고 생각을 주고받는 군신 관계가 된다. 이 책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선조와 이원익의 대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두 사람은 상황 상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한번 대화를 하게 되면 그 내용과 깊이, 형제애 같은 교감까지, 상호간 도유우불을 전개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조는 이원익을 우의정 발령과 함께 전시 상황의 전권(남4도도체찰사)까지 겸하여 맡기고, 장수 문제는 물론, 병력, 전략, 군량과 정보까지 모두 이원익과 함께 상황을 판단한다. 명-일간의 외교문제 역시 좌의정 이원익을 통해서 판단하였고, 정쟁과 불신 가운데 이순신의 처형을 피하게 되는 결정까지... 선조와 이원익은 도유우불로써 정유년의 길었던 왜란을 승리로 이끌어 마침내 조선을 구하는 역사를 함께 써나간다.
이원익의 애민애국(愛民愛國)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탕평(蕩平)과 온 세상이 화평하게 되는 대동(大同)을 제도화하는 실천과, 균형과 중용(中庸)의 공과 사(公與私) 정신으로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이원익이 선조와 교감하며 보여준 “도유우불의 행”이 있었기에 실현이 된 것이다.
“나의 마음부터 먼저 백성을 사랑하고, 물자를 아끼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오리 이원익 정승, 그의 삶을 따르는 맑고 밝은 인생이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완평(完平), 모든 일은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하여” - 이원익의 치세어록(治世語錄)
이원익은 선조와의 대화에서, 그의 문집에, 그리고 그를 아는 사람들로부터 평생의 신념과 행동원칙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원익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民惟邦本), 공은 공, 사는 사(公與私), 씀씀이를 절제하고 사람을 사랑하라(節用而愛人) 와 같이, 삶의 중심에 백성의 안녕을 두고 그 실천을 위하여 스스로 검약하며 공과 사에 대한 분명히 구분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 근본인 인심에 달렸다(天下萬事 以人心爲本)고 하는 그의 주장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너무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원익 정승이 유고한 후 후대에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밝은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고(不動心), 이로써 임금을 섬겨 서로 신뢰하였고, 신뢰를 기반으로 사람들이 따랐으며, 이렇게 국가의 대란을 극복하였다. 모두가 그를 어진상국(賢相)이라 불렀으니, 정의를 실천하고 대의로 정성스럽게 살았다. 말과 행동이 일관되어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고, 국가의 먼 훗날을 위한 장구한 계획이 있었다. 그는 오랜 재상 생활에도 공사가 분명했고 검약했으며 조야는 물론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손자 이수약이 연풍현의 수령으로 부임할 때 써 준 글에서 이원익은 그의 절제와 중심을 뚜렷하게 표명하고 있다. 공인(公人)으로서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정보(천하의 실정, 일의 실정)의 중요성과, 상벌의 원칙을 가르친다. 폐단을 제거하는 것이 이익을 도모하는 것보다 중요하며, 한 가지 일을 덜어내는 것이 하나의 일을 새로 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음을 알린다.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사람에게 널리 물어서 인정에 합하도록 가르치며, 거만을 부리지 않아야 민심을 잡을 수 있음도 가르친다. 무엇보다,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져 돌봐야 하고, 관속을 대하는 것 또한 각박하게 하지 말기를 당부하며, 마땅히 때를 따라 마음을 다하도록 이른다. 이 모든 金言은 그의 16자 유훈 “無怨於人 無惡於己 志行上方 分福下比”에 응축되어 전해진다.
“고공가와 고공답주인가” - 선조의 사서삼경 언해 작업에 대하여
나랏일을 근심하고 충성을 다하는 절개(憂國忠節)는 예나 지금이나 국민 모두에게 필수 덕목이다. 애국심은 그 사람의 쌓은 업적 또는 하는 말이나 글을 통해서 접하고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한데, 결과적으로는 시종일관되지 않거나 언행일치하지 않을 경우 신뢰를 잃게 되고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기도 한다. 이원익의 시와 글을 보면서 그의 애국심을 느낄 수 있으며, 과연 그가 시종일관 언행일치한 인물이었음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많은 임금이 한문의 언해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중 선조의 노력은 그 누구보다 더 열심이었다. 선조는 1574년부터 1606년까지 무려 32년간 줄기차게 언해 작업을 추진하면서 백성이 쉽게 사서오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위대한 문화 창달의 대업을 이루었다. 나아가 백성들에 알릴 교서는 물론, 절망으로부터 빠른 극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고공가(雇工歌)」와 같이, 백성과의 직접 교류를 원할 때 한문이 아닌 言文(한글)으로 소통하였다. 선조의 「고공가」에 대한 이원익의 답시인 「고공답주인가(雇工答主人歌)」는, ‘고공가’에서 선조가 애타게 찾고 있는 신하의 자세를 명철하게 가르치고 있다. 게으르고 헤아림 없는 종(臣下)에게 마누라(宣祖)의 말을 왜 듣지 않느냐고 꾸중하는 한편, 마누라(선조)에게는 어른 종(영의정 이원익)을 믿으라고 풍유(諷諭)한다. 선조 승하 시 쓴 ‘녹양이 천만산들’ 시조에서는 그 어떤 사모가(思慕歌)보다도 더 애절하게 이원익의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420여 년 전 한글로 작시된 이 시들을 노래하면서, 이원익이 선조를 대하면서 품게 된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 동생처럼 아끼는 임금에게 충성하고픈 마음으로 그의 죽음을 애절하게 슬퍼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새삼 느낄 수 있다. 현세에 와서도 이러한 마음은 여전하기에, 이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부르며 새로운 희망을 찾는 동력으로 삼고, 오리 이원익 정승을 현세에서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을 나누고 싶다.
오리 이원익, 다스림과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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