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이울다 (이영희 장편소설)

배꽃 이울다 (이영희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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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영희 장편소설 『배꽃 이울다』. 1936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봄날, 지안과 두현은 혼례를 올린다. 하지만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별당을 나가버린 두현은 지안에게 잔인하기만 하다. 혼례식 뒷날에는 사랑채에서 단과 껄끄러운 첫 만남을 가진다. 배꽃이 이울어 흩날리는 사이사이로 자꾸 마주치게 되는 지안과 단. 자꾸만 지안은 단에게서 자신이 그리워하던 두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단은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만 지안을 지켜보아야 함을 한탄한다. 각자가 숨겨둔 기억과 비밀을 간직한 채 세 사람의 인연은 얽혀가고 배꽃이 다 이울어가는 4월의 끝자락, 두현은 단에게 지안과의 하룻밤을 간청하는데…….
저자

이영희

저자 이영희는 꽃을 사랑하는 글쟁이.
사람들의 삶과 닿아 있는 꽃의 이야기, 야생화 향기가 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1년 〈영남문학〉 중편 〈배꽃 이울다〉 신인상 수상 및 등단
2012년 제 3회 통일부 주최 창작동화 〈북에서 온 지니〉 당선
2013년 대한민국 e 작가상 〈화가야에 피어나다〉 당선 및 e북 출간
현재 화가야 시리즈
〈화가야의 백일홍〉 연재 완결
〈화가야의 홍매화〉 연재 중
〈화가야의 이랑풍〉, 〈화가야의 꽃사건 일지〉 집필 중

목차

1. 배꽃 사이로 만나다
2. 마음속에 쌓여가는 배꽃
3. 배꽃을 흔드는 바람
4. 10년 전, 배꽃의 그 봄날
5. 배꽃, 애처롭게 욱신거린다
6. 배꽃의 하룻밤, 너무나 짧은
7. 배꽃 따라 흩어지다
8. 가시는 길 따라 배꽃은 이울고
9. 배꽃과 함께 떠나다
10. 배꽃과 자운영꽃은 서로 그리워하며
11. 봄마다 배꽃은 피어난다
에필로그 ? 새로운 시작
작가후기

출판사 서평

|책 소개

배꽃이 이울어 홑이불처럼 흩날리는 그 봄날의 이야기.


1936년 진주시 문산읍 이곡리.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봄날, 지안과 두현은 혼례를 올린다. 하지만 첫날밤도 치르지 않고 별당을 나가버린 두현은 지안에게 잔인하기만 하다. 혼례식 뒷날에는 사랑채에서 단과 껄끄러운 첫 만남을 가진다. 그 후 언제나 단의 시선은 지안의 비녀 끝에 내려앉아 따라오고 그런 단의 눈빛에 지안의 마음도 어지럽다. 배꽃이 이울어 흩날리는 사이사이로 자꾸 마주치게 되는 지안과 단. 자꾸만 지안은 단에게서 자신이 그리워하던 두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단은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만 지안을 지켜보아야 함을 한탄한다. 각자가 숨겨둔 기억과 비밀을 간직한 채 세 사람의 인연은 얽혀가고 배꽃이 다 이울어가는 4월의 끝자락, 두현은 단에게 지안과의 하룻밤을 간청하는데…….

|뒷 카피

창호지문이 소리도 없이 열리고 지안은 고개를 들었다.
단이 지안의 방문을 들어섰다.
그가 왔다. 기척도 없이 단이 왔다.
지안의 방에 들어서는 단의 등 뒤로 배꽃이 하얗게 이울어 떨어졌다.
밤은 더 까맣고 배꽃은 더 하얗다.

“제가 아는 허 선생님이라면 아니 오실 거라 믿었습니다.”
“저도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울어 날리던 배꽃의 봄날의 첫 만남,
손수건 한 장에 묶여 버린 그녀의 기억.

봄마다 배꽃이 피어나듯이
우리도 다시 마주볼 수 있기를.
시린 손끝이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기를.

|책 속으로(발췌)

1936년 4월, 진주군 문산면 이곡리의 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배꽃이 이울어 흩날렸다. 별당에서 첫날밤을 맞은 지안은 혼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먼 데서 들리는 두견새 울음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하지 못했다. 드디어 새신랑인 두현이 왔다.
“그대가 나의 부인이오?”
두현의 혀 꼬인 말소리가 지안의 앞에 와서 앉았다.
“어디! 명문가 규수님의 얼굴 좀 자세히 볼까나?”
무방비로 앉아 있던 지안의 얼굴이 두현의 팔 힘에 끌려 올라갔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두현의 입가는 묘하게 꼬이고 지안은 술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크크! 얼굴 어디에도 명문가 규수님이란 보증서는 붙어 있지 않군그래.”
‘어이 이러십니까?’
지안이 눈으로 묻자 그제야 두현은 손을 놓았다.
“어디, 술 한 잔 따라보시겠소?”
두현이 불쑥 놋잔을 내밀었다. 이미 술이 꽤 취한 상태라 지안은 잔을 반 정도만 채웠다.
“잔은 채워야 제맛인 것을. 쯧! 쯧!”
놋잔은 단숨에 바닥이 드러났다.
“그건 그렇고, 계몽운동 하시는 부인의 아버님께서 어이하여 얼굴 한 번 안 뵈고 무남독녀 시집을 보내셨을꼬?”
“…….”
“뼈대 있는 명문가에서는 계몽운동의 정신 따위는 따르지 않는 것이요?”
두현의 말은 혀만큼이나 꼬였다.
“밤이 깊었습니다.”
지안의 음색은 맑은 파장을 일으켰다.
“하기사 그 많은 재물을 덥석 안기어주었으니 얼굴 한 번 못 본 일이 대수겠소?”
지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두현은 혼자 주절거렸다.
“이만 자리에 드시지요.”
“내 말에 어이하여 대꾸를 안 하시는 것이오?”
“약주가 과하신가 봅니다.”
“명문가 규수께서 돈에 팔리어 왔으니 대꾸할 말이 없어 그러시오? 그렇겠지요. 무슨 대꾸할 말이 있겠소이까? 그렇게 하지요. 내 술이 과하였으니 이만 자리에 들겠소.”
원앙이 놓인 비단 이불 위로 두현은 벌러덩 누워버렸다. 술잔은 상 끝에 위태하게 걸리고 두현의 등에 깔린 원앙이 금방 납작해졌다.
“아차차차!”
하지만 곧 원앙의 몸이 다시 부풀었다. 누울 때처럼 성급하게 두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내, 옷고름 정도는 풀어줘야겠지요.”
술에 취한 두현의 손을 따라 녹원삼의 봉띠가 풀렸다. 비단 봉띠가 쓰륵 비명을 지르고 족두리에 늘어진 꽃술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봉띠가 완전히 풀리자 녹원삼의 앞섶이 조금 벌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봉띠를 잡은 채로 두현이 지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싸한 냉기가 끼쳐 왔다. 두현의 손이 지안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대로 귓불까지 쓸어 올리더니 지안의 볼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엄지손가락만으로 볼을 만지작거렸다.
떨림을 숨기고자 지안도 두현도 옅은 숨을 몰아쉬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솜털이 곤두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못할 짓을 한 것처럼 두현은 급하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대로 다시 눕자 풀린 봉띠는 두현의 어깨 밑으로 깔려 버렸다. 그렇게 두현은 바로 잠에 들었다.
“으…… 음.”
낮은 한숨과 함께 두현이 몸을 뒤척였다.
풍경처럼 앉아 있던 지안이 그제야 소맷자락을 걷었다. 손가락이 두현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지안의 손가락 끝이 두현의 얼굴 위를 조용히 미끄러져 갔다.
두근. 두근. 두근.
미끄러지는 손길을 따라 지안의 심장이 나직하게 뛰었다.
“얼굴 한 번 못 보았다 하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매일 보았습니다. 생각도 나지 않는 이 얼굴을 매일 보았지요. 10년을 쉬지 않고 내리 보았어요. 이렇게 서방님 곁에 오기 위해 제가 무엇을 버렸는지 아십니까? 모르실 테지요. 꿈에서라도 모르실 테지요. 해서 그리 잔인한 말씀만을 하시는 게지요? 되었습니다. 모르고 하신 말씀이니 저는 마음에 담지 않겠어요.”
속삭이는 지안의 음성을 잠에 든 두현이 들을 리가 없었다.
지안은 밝혀놓은 촛불로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내쉬더니 혼자서 족두리를 벗었다. 달빛 아래 배꽃은 새의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렇게 밤이 흘렀다.
두현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에 잠에서 깼다. 머리맡을 더듬어 보았다. 언제나 놓여 있던 자리끼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제야 두현은 자신이 누운 곳이 지안의 방인 별당임을 기억해 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지안은 족두리와 봉잠, 채(보조비녀)만 벗고 주안상 옆에 잠들어 있었다. 모로 누운 지안의 녹원삼은 이불처럼 널따랗게 펼쳐졌다. 새벽녘 어스름에 떠오른 지안의 잠든 얼굴이 배꽃 같았다.
새근거리며 잠든 지안의 얼굴을 보는 두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비단 이불을 짚으며 몸을 가까이 하자 바스락 비단 스치는 소리가 났다.
두현이 지안의 앞으로 가서 조용히 몸을 눕혔다. 혼례식 이후로 많이 피곤했는지 두현이 마주 누워도 지안은 미동도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선한 인상을 지녔군, 당신이란 사람! 내 그리 모질게 굴었는데도 이리 달게 잠이 든 게요?’
머리카락 몇 올이 지안의 볼에 드리워 있었다. 두현은 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살풋 웃기까지 했다. 손가락 끝에 닿은 지안의 볼이 따뜻했다. 낮게 내쉬는 지안의 숨결에서는 창포향이 났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당신을 보는지 모를 테지? 이렇게 조그만 당신을 만지지 않으려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를 테지?’
두현의 검지가 지안의 입술을 따라 선을 그렸다. 차마 입술에는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그리는 선이었다.
‘나로 하여 당신의 꿈이 어지러울 것을 아는데 모질 수밖에 없는 나의 번민을 꿈에라도 모를 테지? 앞으로 더 많은 날을 홀로 잠들며 아파야 할 당신. 하니, 이 밤에라도 달게 주무시오. 어쩌면 달게 잘 수 있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이니.’
두현이 지안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애써 억누른 욕망이 전율을 하며 조금씩 열기가 올랐다. 선을 그리던 지안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포개려 했다.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접듯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러자 두현의 심장이 뛰었다. 아까 지안이 그랬던 것처럼.
놀란 두현이 지안의 입술로 다가가던 자신을 얼굴을 화다닥 떼어냈다. 데인 것처럼 황급히 일어섰다. 그대로 방을 나섰다.
두현은 별당의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방문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손끝에 몰린 억눌린 열기에 맥박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모질게 몸을 돌려 버렸다.
‘미안하단 말 따윈 하지 않을 것이요. 당신과 나, 우린 그냥 이렇게 되었소이다.’
새벽 어스름을 밟고 멀어져 가는 두현의 뒤를 이운 배꽃이 따라갔다.
(중략)
“어흠! 잠들은 잘 잤노?”
윤 참판은 물고 있던 곰방대를 내려놓았다.
“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두현이 답했다.
“새아가는 좋은 꿈꾸었고?”
“네……. 할아버님.”
지안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아가!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전통과 역사가 깊은 가문이라. 하니 이 집안 며느리로서 품행과 언사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데이.”
이번에는 한씨 부인의 당부가 지안에게 건너왔다.
“네! 어머님.”
지안의 고개가 숙여졌다.
“무엇보다 손이 귀한 집안이다. 우리 두현이 3대 독자가 아니가? 빨리 잉태를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기라. 그러자고 서두른 혼사이니.”
마지막 당부를 하고 윤 참판은 곰방대를 다시 들어 물었다.
“물론이죠, 할아버님.”
대답을 못 하고 앉아 있는 지안을 대신해서 두현이 냉큼 대답을 했다. 그렇게 조마조마한 아침 문안 시간이 지나갔다.
오후의 햇살을 타고 배꽃이 이우는 시간, 지안은 별당 자신의 방에서 수를 놓고 있었다.
“아씨! 별당 아씨!”
한참 손을 놀리는데 방문 밖에서 박 서방네가 지안을 불렀다. 행랑어멈이다.
“무슨 일이오?”
“사랑채에서 작은 나리가 찾으시는데예.”
두현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 것일까?
자신의 방을 나서면서 두현의 눈 속에 떠 있던 알 수 없는 분노가 지안의 뇌리를 스쳤다. 문안을 마치고 나와서도 두현은 지안 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랑채로 사라져 버렸었다.
외진 시골이긴 하나, 대갓집 살림답게 사랑채에는 5칸의 방이 있었다.
박 서방네가 두현의 방으로 가보라 이른 후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