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 이야기 2 (강버들 장편소설)

비원 이야기 2 (강버들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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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광해군의 어린 이복동생, 인조의 나이 어린 고모 역사에 묻힌 정명공주의 이야기 『비원 이야기』. 아버지보다 믿었던 이복 오라버니의 배신. 금지옥엽 공주 연리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기녀가 된다. 하지만 기녀의 삶은 험난하기만 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닥쳐 오는데…….그리고 그때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낯선 사내. “내가 이 여인, 기둥서방이란 말이오.” 하늘을 바꾸려는 공주와 선비의 이야기.
저자

강버들

목차

9장. 햇살처럼 그대 물들어 (下)
10장. 이화우(梨花雨)
11장. 꿈
12장. 연리지(連理枝)
외전.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작가 후기
참고 문헌
등장인물 가계도

출판사 서평

다정한 눈동자가 한가득 근심을 담고 있다. 연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몇 번이고 깜빡여도, 그토록 사려 깊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오롯이 전해져 왔다.
그러는 사이, 타오른 열기는 목줄기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다 어느 순간 왈칵 부어졌다. 마침내 신열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온난한 기운이 몸을 뭉근히 감싸는 것을 느끼며 연리는 말끄러미 주원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시를 낭송하듯 조곤조곤한 제 목소리가 마음에 울렸다.
너, 그를 연모하는구나.

“두려워 마십시오.”

다정한 음성이 가슴께에 닿았다.

“언제나 그대 곁에 있을 테니.”

출판사 리뷰 and 만든 이 코멘트

정명공주에 대해서라면 TV 드라마로 본 짧은 단편뿐이었던 내게 또 다른 정명공주를 보여준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라버니의 불화. 그로 인해 동생을 잃고, 인생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어린 공주는 서궁에 갇혀, 그리고 죽은 사람이 되어 살아야만 했다. 광해군의 폭정과 인조반정 등에 얽힌 역사 속 정명공주가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 편집자L

정명공주가 서궁 유폐 시 죽음을 위장하고 예기로 활약하며 반정에 참여했다면? 이라는 줄거리로 이야기는 전개 된다. 물론 그 안에는 남주인 홍주원과의 로맨스도 있다. 정명공주의 색다른 일대기를 본 느낌의 작품이다. / 편집자C

광해군이 즉위하며 서궁으로 폐출, 감금되었다 인조반정 후 공주로 복권된 파란만장했던 정명공주의 삶. 공주가 기녀가 되어 반정을 도왔다는 과감하고 도전적인, 풍부한 상상력으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편의 웰메이드 사극 드라마를 본 듯한 팩션 소설! 기회만 된다면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드라마를 보고 싶다. / 편집자G

* 책속으로 추가
매양 듣는 아비의 역정에 이골이 날 만도 하건만, 가시 돋친 어성(御聲)은 잘 벼려진 검처럼 심장을 찔러댔다. 가까스로 아문 자상(刺傷)이 또다시 터져 검붉은 원망을 울컥 토해내는 듯하였다.
말없이 일어나 예를 갖춘 후 혼은 뒷걸음질 쳐 방을 나왔다. 신발짝을 아무렇게나 꿰어 신고 섬돌 아래로 내려오기가 무섭게 처소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리도 자상하게 웃어주시던 아바마마께서, 그리도 상냥하시던 아바마마께서!
혼이 아비 대신 왜인들의 무자비함에서 백성을 구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라를 건져 올렸을 때, 가장 먼저 든 바람은 아비의 칭찬이었다. 언젠가 어렸을 적,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음식이 무엇이냐 하문하셨을 때 소금이라 대답하니 참으로 총명하다며 어루만져 주던 따스한 칭찬을 기대했다.
하나 그러기엔 아비의 마음은 여유가 없었다. 제 아들 하나 품지 못할 만큼, 조급하고 옹졸했으며 무능했다. 따스하고 부드러웠던 어미를 잃고, 점점 차가워지던 아비는 이제 혼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아들이 아니라 마치 왕위를 빼앗은 원수 대하는 양 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화마가 아바마마의 다정까지 앗아버린 것일까. 좀 더 내가 노력하면 돌아오실까. 안아주시고 어루만져 주시던 아바마마로 돌아오실까.’
대전을 나오자마자, 왈칵 쏟아질 듯 고이는 눈물 탓에 처소로 곧바로 돌아가지 못한 혼은 아무 곳으로나 발걸음을 옮겼다.
몇 시진째 어지러이 정처 없이 떠돌던 혼의 발걸음은, 마침내 조용한 한 전각 앞에 가 섰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으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비의 뒤를 이을 세자라 한들, 아비의 마음 없이 왕위를 얻어 무엇하겠는가. 처음부터 왕위를 원한 것도 아니었다. 세자보다는 아비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차라리 아비의 마음을 얻고, 이까짓 저위(儲位) 따위 누구에게나 넘겨주고 싶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미 마음속으론 수천수만 번 눈물 흘린 상처를,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는 상처를, 가까스로 가만가만 끌어안아 덮으려던 혼에게, 순간 지금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세자가 아닙니까?”
월계화였다.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 붉은 치맛자락을 사락거리며 조금 떨어진 곁에 와 섰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은 혼은 애써 효자의 낯을 하려 들지 않았다. 어리디어린 주제에, 국모가 되었노라 으스대는 양이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아까 아비의 앞에서 얄궂게 군 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직 궁궐이 낯설어, 조금이라도 더 익혀보려고 나왔습니다. 산책 겸해서요. 어찌나 익힐 게 많던지, 내 이렇게 숨을 트이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지 뭡니까. 한데 세자는 어찌하여 이곳에 있습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잘조잘 말을 건네는 양이 당당하다 해야 할지, 간사하다 해야 할지.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힌 혼은, 이내 눈에 비웃음을 담고 입을 열었다.
“아실 것 없습니다. 가던 길 가시지요.”
씹어뱉듯이 대답하고는 혼은 재빨리 몸을 돌려 월계화에게서 멀어졌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아비의 다정을 갈망하는 자신의 치부를 들킬까 염려한 탓이었다. 혼은 한편으론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여인에게 이러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였다. 아비의 사랑을 놓고 옹졸하게 투기나 하는 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세자, 멈추어보세요!”
또 무어라 속을 뒤집어 놓을지, 왜인지는 모르나 그 의도는 뻔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생각한 혼은 미동도 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세자!”
‘참 어지간히도 귀찮게 하는군. 앞으로 이곳엔 눈길도 아니 주어야겠어.’
그때였다.
“날 무시하지 마!”
혼이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몇 발짝 뗀 순간 갑자기 앙칼진 계집아이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혼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자신에게 하대를 하던 월계화, 중전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감정을 참지 못하는 계집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너도 날 비웃는 것이냐? 권세를 탐하고 왕위를 탐해, 재취(再娶)로 들여보낸 계집이라 비웃느냔 말이야!”
기품으로 차리던 낯빛은 치맛빛을 닮아 붉어졌고, 당의 속에 숨겼던 양손은 어느새 빠져나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하나 우습기도 하지. 첫 대면부터 시종일관 비웃고 무시한 것은 오히려 그녀였을진대, 어찌 내게 자신을 비웃느냐 소리친단 말인가!
혼은 어이가 없어 발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려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
“어찌 중전께선 나를 책망하십니까. 그는 애초부터 중전께서 자초하신 일이 아닙니까? 하면 내가 어마마마라 칭하며 받들어 모시기를 바랐습니까?”
예를 차리고 싶지도, 잘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어미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눈앞의 월계화는 어미가 아니라 여우였다! 아비의 정을 빼앗고, 부자를 가로막는 여우!
결국 혼은 붉은 치마에 물든 그녀의 낯빛처럼 흥분하여,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실어 외치고 말았다.
“나는 네 어미다! 이젠 내가 국모요, 네 계모야! 한데 어찌 이리도 오만방자한 것이냐! 가세(家勢)가 한미하면 이리 어미를 능멸하는 것이 궁궐의 법도란 말이냐!”
하나 어느새 그녀는 물까지 어린 낯을 하고서 자신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혼은 잠시 당황스러웠다. 제가 언제 그녀의 가세가 한미하다 무시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없는 말까지 지어내 내 항복을 받으시겠다?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그대는 내 모후가 아니오. 그러니 보는 눈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내게서 공대(恭待)조차 바랄 수 없을 것이오.”
혼은 흥분과 진심이 반씩 섞인 말을 내뱉고는 코웃음을 치며 충격으로 시든 그녀를 재빨리 지나쳐 처소로 돌아갔다. 혼에게 궐은 얼어붙은 엄동설한 같았으나, 상처받고 지친 마음을 뉘일 방 한 칸이 오늘만큼은 너무나 절실했다. 고된 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혼이 떠난 발자국만 남은 전각 앞. 치맛빛이 낯을 넘어 하늘까지 물들일 때까지 중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엄습했다.
그녀의 친정은 무거운 가문의 이름에 비해 가세가 그리 넉넉지 못했다. 아버지 김제남은 유약하여 대인군자가 못 되었다. 하여 내로라하는 집안에 그녀의 혼사를 청했을 때, 명문가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일언지하에 혼사를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날 무렵에야 그녀는 부친이 혼담을 연이어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치스러웠다. 열일곱 살이 넘도록 시집을 보내지 못해 미안하다며 늦은 밤 자신에게 눈물짓던 아비가 가여웠다. 그래서 임금의 계비로 간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왕성(王性)과 상극이라 간택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기적적으로 간택되었다. 국혼 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지만 왕의 성은으로 정전(正殿)에서 만조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으며 불길함을 털어냈다.
나는 당당한 국모이니라. 가문 또한 이제 왕비의 친정이니, 가족 모두가 떳떳이 어깨를 펴고 다니며 칭송받으리라.
그러나 후궁뿐만 아니라 궁녀들마저 그녀를 무시했다. 상궁나인들은 수군거렸고, 연배 있는 후궁들 더러는 노골적으로 불만스런 낯빛을 띠며 쳐다보기까지 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손녀 같은 비라며 비웃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들의 시기 어린 투기일 뿐이니. 스스로를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세자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새 국모, 어린 왕비의 지위를 당당히 반증해 줄 장성한 세자였다. 한데 첫 문안에 늦었을 뿐만 아니라, 어미로서 가볍게 질책하였다 하여 노골적으로 능멸하다니! 이는 분명 보잘것없는 가세를 보고 나와 내 집안을 무시하는 처사이리라!
어느새 어둑해지는 하늘을 이고, 중전은 절대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

“주상전하 듭시오!”
중궁전의 문이 열리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왕이 발걸음을 내디뎌 용안을 보였다. 궁녀들이 보아둔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 있던 그녀는 재빨리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일어나 지아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