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퐁당 (정예인 장편소설)

그대에게 퐁당 (정예인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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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주하나는 번듯한 직장과 근사한 남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을 목표로 삼아 무경력 무근본으로 청담동의 고급 제과점 「L'amour」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채용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케이크처럼 부푼 꿈을 안고 출근한 그곳엔 바깥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제빵실과 그 앞에서 커피를 내리는 천하태평 유유자적 바리스타 서준수뿐이다.
혼자만 기억하는 과거에 얽힌 약점과 좋지 않은 인상만 남긴 첫 만남이 자꾸만 생각나 준수를 피해 다니기 바쁘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그가 내린 한 잔의 커피로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함께 마무리하며 서로에게 한 발자국 가까워진다.
그러나 서서히 준수에게 빠져들던 하나는 끝내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마는데…….
저자

정예인

누군가의마음에용기가되는글을쓸수있기를

목차

프롤로그Ⅰ
프롤로그Ⅱ

1막:L'amour-사랑을굽는제과점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
당신의1년에행운이가득하기를
가을,밤,그리고당신의이야기
무지개너머그어딘가에

2막:이상과현실의간극
운명인지모를무언가
각자의아킬레스건
첫사랑에실패한자들에관한지침서
가장보통의사람으로사는법
답을찾지못한날
어른이되지못한이들을위한동화

3막:독백혹은방백
크렘브륄레cremebrulee같은남자
우리는,어쩌면,만약에
사랑한다는말로도위로가되지않는
HappyBirthdaytoYou
사랑,그달콤씁쓸함에관하여
커튼콜,다시막이오르면

에필로그-여전히,당신의앞날에행운이가득하기를
작가후기

출판사 서평

때때로자기자신이세상에서가장불운한사람이라고느껴질때가있다.
?
“따라오지마세요.?어설픈위로라면사절이니까.”
?
처음보는사람에게최악의인상을남겼을때.
?
“우리,?어디서본적있죠?”
?
그리고그사람과또다시조우했을때.
?
이대로영원히인생이제대로풀리지않을것만같은회의에빠진순간,
삶은또다시예측할수없는방향으로흘러간다.
?“좋아요.그거짓말,진짜인걸로합시다.?단,내가기억해낼때까지.”

언제나꿈을꾸는사랑스러운파티시에와커피를내리는천하태평나무늘보바리스타.
그리고그사이에끼어든꽃다운청춘들의이야기가함께하는곳.
?
“어서오세요.?「L'amour」입니다.”
?
회갈색벽돌과파란색창문너머로갓구운빵냄새와커피볶는향이새어나오는,
슈크림처럼부드럽고마카롱보다더달콤한사랑을굽는제과점으로
당신을초대합니다.

[책속으로이어서]

프롤로그Ⅱ

그라인더로곱게간원두를포타필터portafilter에담고탬퍼tamper로꾹누른다.탬핑이끝난포타필터를에스프레소머신에장착하고버튼을누르자진한커피가떨어져내렸다.추출된에스프레소위에거품을낸스팀우유를천천히붓자부드러운라떼향이자그마한가게안에그윽이퍼져나가기시작했다.
“아,그냥사진만한번보라니까?”
그평화로운분위기를깬건정훈의말이었다.방금막자신의앞에놓인커피는거들떠보지도않은채열변을토하는친구의모습에준수는무덤덤한목소리로반문했다.
“결혼정보회사로이직할계획이야?”
“그러니까미친놈아,내가생전안하던중매쟁이노릇까지하고있는데그까짓사진한번봐주는게그렇게어렵냐?”

(중략)

“그러니까하는소리다.내가오죽하면황금같은휴가에너붙잡고이러고있겠냐.제발부탁인데,내가권하는여자만나기싫으면네이상형이라도말해봐.지구끝까지뒤져서라도찾아다줄테니까.”
오늘따라유독끈질기게물고늘어지는정훈의집요함에준수는살짝인상을찌푸렸다.도무지끝이안보이는태평양같은인내심도슬슬한계에다다르고있었다.
어떻게둘러대야친구의집착을잠재울수있을지궁리하던차였다.딸랑거리며종이울리더니여자한명이문을열고안으로들어섰다.준수가안내를하려반사적으로몸을움직였지만여자는곧장혼자온손님이차지하고있던테이블로직행했다.
“늦었으면뛰어오는시늉이라도해라,좀.내표정빤히보면서도태평하게문열고들어오는거보고진짜분노가차올랐다,분노가.”
“미안해.하지만알잖아,난달리기는정말두번다시하고싶지않은사람이라는거.”
달리기라는말에진저리를치면서도배시시웃는여자에게자연스럽게시선이꽂힌순간이었다.준수는자기도모르게불쑥정훈의질문에대한대답을했다.
“달리기싫어하는여자.”
“뭐?아,이미친놈.뭔놈의취향이그러냐?아무튼,어디말이라도해봐.들어나보게.”
정훈이채근했으나준수는더는귀를기울이고있지않았다.한편지금이순간가게안에존재하는유일한손님들은본격적으로둘만의환담을주고받기시작했다.
“아무리그래도그렇지어떻게그이후로뜀박질한번안하고사냐?”
“너잡혀도죽고뛰어도죽을것같은상황겪어본적있어?그기분은직접체험해봐야안다니까.그래도,늦은건내가진짜미안해.오늘내가쏠테니까화풀어라,응?”
“엎드려절을받지.위로해주자고부른자리니까내가참는다,참아.그나저나말이나왔으니말인데,그남자요새도꿈에나와?”
“그남자?아,그러고보니까어제꿈에나타났어.한동안잠잠했는데.”
“전부터궁금했는데그남자혹시잘생겼니?딱한번봤는데6년동안이나꾸준히꿈속에출몰하게.”
“얼굴은잘기억안나.그때워낙급박한상황이라그런거따지고말고할겨를이없었거든.꿈에서도얼굴은흐릿하게나오고.그리고,나원래도사람얼굴잘기억못하잖아.”
“그래도곰곰이생각해봐.나진짜궁금하단말이야.”
“뭐,잘생겼던것같기도하고…….다시마주하면기억날것같은데.그렇지만다시만날일은,아무래도없겠지?”
“슬프지만그게현실이지.얼굴을알아,이름을알아,연락처를알아.단서가아무것도없잖아.”
“나그때너무정신이없어서고맙다는말도못했는데세월이벌써이렇게나흘렀네.있잖아,그사람은기억하고있을까?”
“기억은하겠지.그게보통일도아니고해질녘에강남한복판에서한바탕추격전을찍었는데.”
두손님이목소리를한껏낮춰소곤거리고있는터라무슨사연인지는정확히들리지않았으나오래된추억에잠긴표정만은인상적으로남았다.저도모르게옅은미소를지은준수가정훈에게두번째대답을건넸다.
“옛날에못한말을빚으로남겨둘정도로계산확실한여자.”
“들을수록진짜…….야,차라리그만귀찮게굴고꺼지라고해라.”
어느새다식어버린라떼를마시던정훈이불만스럽게투덜댔다.오늘은무슨일이있어도일을성사시키려고했는데아무래도글러먹은듯했다.
“그래,내가미친놈이지.내가미친놈이야.”
누구보다준수를오래봐온정훈이었다.한없이느긋해보이지만알고보면놀랍다싶을정도로칼같은사람이바로서준수였다.아니나다를까,곧바로덤덤한대꾸가돌아왔다.
“커피다마셨으면영업방해로신고하기전에가라.어차피곧주문받으러일어나야될것같거든.”
“바짓가랑이붙잡고매달려도간다,가.매정한놈.”
평소와다르지않게들리는준수의태평한말투속에서이쯤에서그만하는게좋겠다는무언의경고를읽을수있었다.결국커피잔을내려놓은정훈은퇴장을자처했다.
“휴가즐겁게보내.혹시주위에서그런여자찾으면언제든연락하고.”
“됐다,됐어.나혼자잘먹고잘살련다.”
질색하며휙휙손을내저은정훈이뒤도돌아보지않고가게를떠났다.잠시그뒷모습을바라보던준수는스툴에걸터앉아이제야비로소깃든평화를만끽했다.한편구석테이블을차지한두손님은여전히즐겁게재잘대고있었다.
“그런데너지금상당히아련해보인다는거알지?그남자가무슨첫사랑이라도되는것처럼.”
“뭐?그런거아니거든!”
“하긴,여리고섬세하고풍부한주하나감성에처음본사람하고사랑에빠지는게그다지어려운일이아니긴해?진짜첫사랑은따로있는거내가몰랐으면아마믿었을걸.”
“첫사랑이고끝사랑이고,잠재적백수한테사랑은곧사치란다친구야.”
“우아한백조가뭐어때서?이왕그만두기로한거뭘그렇게사서걱정을해.그냥지금이순간을즐겨.”
“우아가아니라으악이지.언제굶어죽을지모르는데.베짱이의삶을지향하기에는내가내주제파악을너무잘하고있는거지.”
“그래,그거야.생각해보면개미가아니라베짱이가진정한승자아니니?좋은시절에풍류를즐기며하고싶은거다하면서살다가빈털터리가되기직전에극적으로개미의구제를받아서결국잘먹고잘살잖아.어렸을때읽었던동화들다재평가가필요하다니까?한번사는인생베짱이처럼,어?”
익살맞게받아쳤으나사실그녀는친구가무척이나안쓰러웠다.한때공주소리를들으며자랐던주하나는이제없었다.온실속화초도몇년사이갖은풍파에휩쓸려이리치이고저리치이다보면강인한생명력을지닌잡초로거듭날수도있다는걸몸소증명하는산증인만남았을뿐이었다.
“그런데여기되게신기하다.나이쪽동네는처음와보는데깜짝놀랐어.생각했던것보다훨씬더이국적인것같아.”
“야,넌나이가몇인데이제야경리단길을와보는거야.세상구경도좀하고살아라.”
“그러게,나여태뭐하고산거지.”
“또,또처진다.안되겠네.얼른밥을먹여야지.”
“맞아,나배고파.어제집에돌아오고나서내내늘어지게잠만잤거든.우리빨리맛있는거먹자.여기는뭐가맛있어?”
“나도처음와봐서잘몰라.물어보지,뭐.여기요!”
자신을부르는제스처를놓치지않은준수가테이블로다가왔다.아까부터그의눈길을끌던여자가상냥해보이는눈을또렷이뜨고는그를올려다보며물었다.
“여기는뭐가제일맛있어요?”
“매일동해에서갓잡아올린대구로만드는피시앤칩스fishandchips가가장유명합니다.메뉴판에도쓰여있지만,전국에서제일맛있거든요.”
진지한말투와어울리지않게능청스럽게들리기까지하는답변에여자가비시시웃었다.그웃음을본준수역시빙그레미소를지었고여자는재차물었다.
“정말전국에서제일맛있어요?제가사는거라,맛없으면안되거든요.”
“물론이죠.”
“그럼그거말고다른메뉴도추천해주실래요?”
“비스트로버거도저희매장에서잘나가는메뉴입니다.”
“그건전국에서제일맛있다는말이없네요?”
“그런장담은못드리지만저희가게에서가장잘생긴요리사가재료손질부터접시세팅까지직접합니다.”
건조한어투라더욱절묘하게들리는대답이었다.그말을들은여자가이번에는소리내웃었다.한참을까르르웃던그녀가주문을했다.
“그럼그두개로주세요.”
“감사합니다.더필요한건없으십니까?”
“들어오다보니까커피향이좋던데,커피도잘생긴바리스타가내려주시는건가요?”
그말에처음으로당황한준수가헛기침을했다.이번에는곧바로받아치지못하는그의모습에고개를갸우뚱한여자가물었다.
“왜그러세요?”
“커피는……제가내립니다.”
“그래요?”
그대답에여자는준수를빤히쳐다보았다.반짝반짝한눈과정면으로시선이마주쳤을때,그는순간적으로할말을잊고말았다.그걸아는지모르는지장난기섞인웃음을지은여자가말을이었다.
“그럼잘생긴바리스타가만들어주시는거맞네요.라떼로두잔부탁드려요.세상에서제일맛있게요.”
“피시앤칩스,비스트로버거,라떼두잔주문받았습니다.금방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제야미소를되찾은준수가주문내용을짚어주고는메뉴판을거두어갔다.주방에지시를내리고직원들이조리를시작하는걸확인한후돌아서다말고빙긋이웃은그는나직이중얼거렸다.정훈은절대듣지못할세번째대답이었다.
“뭐,웃는게예쁘면더좋고.”
나뭇결이고스란히살아있는마호가니바닥위로테라스에서비쳐들어온오렌지색햇살이찬란하게쏟아졌다.6년이라는시간을돌아온재회는,누구도알아차리지못하는사이아주사소한마주침으로시작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