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윤동주,한용운,이육사,김영랑
저자:김소월
평안북도구성에서태어나곽산에서자랐다.어릴때부터한시와민요를접하며시적감성을키웠고,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시인김억을만나영향을받았다.1920년『창조』에「그리워」를발표하며등단했고,이후「엄마야누나야」,「금잔디」,「진달래꽃」등서정시를통해민족의한과이별의정서를노래했다.그의시는전통적민요의리듬과서구시형의감각을결합해한국적서정시의전형을세웠다.1925년출간된시집『진달래꽃』은그가생전에남긴유일한시집으로,단아하고절제된언어로민족적슬픔과사랑을표현했다.도쿄상업대학에입학했으나관동대지진으로귀국후생활고에시달렸고,1934년12월24일아편을마시고스스로생을마감했다.사후『소월시초』가발간되며,그는오늘날‘한국서정시의상징적시인’으로평가받고있다.
저자:윤동주
1917년12월30일만주북간도명동촌에서아버지윤영석과어머니김용사이의4남매중장남으로태어났다.명동소학교,은진중학교를거쳐평양의숭실중학교로편입하였으나신사참배거부사건으로폐교조치되자,광명중학교를졸업하고연희전문학교문과에입학하였다.이후일본으로건너가도쿄릿쿄(立敎)대학영문과에입학하였다가교토도시샤(同志社)대학영문과로편입하였다.
15세때부터시를쓰기시작해연길에서발행되던『가톨릭소년』에여러편의동시를발표하고그외조선일보,경향신문등에도시를발표하였으며,문예지『새명동』발간에도참여하였다.대학시절틈틈이쓴시19편을골라시집을발간하고자하였으나그의신변을염려한스승과벗들의만류로뜻을보류하였다.
1943년독립운동을모의한사상범으로일본경찰에체포되어징역2년형을선고받았다.1945년2월16일광복을여섯달앞두고후쿠오카형무소에서옥사하여고향용정에묻혔다.일제의생체실험주사에따른희생으로추정될뿐지금까지도그의죽음에대해확실하게밝혀진것이없다.
1948년유고31편을모아『하늘과바람과별과시』라는제목으로간행되었고,1968년에는연세대학교내에그의시비(詩碑)가세워졌다.
저자:한용운
충남홍성에서태어난승려이자시인,독립운동가이다.속명은정옥,법명은용운,호는만해였다.어린시절부터총명하여한문과경전을통달했고,14세에조혼했으나집을나가동학농민운동에참여했다.이후설악산백담사와오세암등에서불교를공부하며출가했다.일본을방문해신문물을접한뒤불교개혁을주장하며1910년『조선불교유신론』을집필했다.1919년3·1운동에참여해독립선언서수정과공약삼장작성에기여했고,이로인해체포되어3년간복역했다.1920년대에는『유심』지를창간하고,1925년시집『님의침묵』을집필해상징적언어로독립정신을노래했다.1927년신간회창립에참여해사회운동을이끌었으며,불교를통한민족계몽과독립운동에헌신했다.1933년성북동에심우장을짓고은거하였으며,1944년영양실조로입적했다.그의삶은수행자이자저항시인,그리고독립운동가로서의길이었다.
저자:이육사
1904년5월18일경북안동시도산면원촌리881번지에서이가호와허길사이에6형제중둘째로태어났다.본명은원록(源祿)이다.본관은진성(眞城)으로퇴계이황의14대손이다.그의형제중다섯째는문학평론가로활동하다가월북이후1950년대초숙청당한이원조다.어릴때조부이중직에게서한학을배웠다.1919년에신학문을접한보문의숙을졸업했다.1925년독립운동단체인의열단(義烈團)에가입하고1926년베이징으로가서베이징대학상과에입학해7개월간다녔다.
1927년귀국했으나장진홍(張鎭弘)의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연루되었다.일본경찰이장진홍이란인물은물론단서조차잡지못하자,대구를중심으로활동하던인물들을잡아들여고문으로진범을조작해법정에세웠다.이과정에서육사를비롯해원기·원일·원조등4형제가함께검거되었다.원기를제외한나머지형제들은미결수상태로1년반을넘겼다.그때의수인번호264에서따서호를‘육사’라고지었다.
1930년1월3일첫시<말>을조선일보에이활(李活)이라는필명으로발표하면서시단에나왔다.1935년정인보댁에서시인신석초를만나친교를나눴다.같은해다산정약용서세99주기기념≪다산문집(茶山文集)≫간행에참여했다.그리고신조선사(新朝鮮社)의≪신조선(新朝鮮)≫편집에참여하면서본격적으로시를발표했다.
1940년4월에베이징으로가서충칭과옌안행및국내무기반입계획을세웠다.같은해7월모친과맏형소상에참여하러귀국했다가붙잡혀베이징으로압송되었다.이때베이징주재일본총영사관경찰에구금된것으로추정된다.1944년1월16일새벽,베이징네이이구(內一區)동창후퉁(東廠胡同)1호에서옥사했다.
저자:김영랑
전라남도강진의부유한집안에서장남으로태어난김영랑의본관은김해金海이며본명은김윤식金允植이다.영랑永郞은아호인데《시문학詩文學》에작품을발표하면서부터사용하기시작했다.1915년강진보통학교를졸업한뒤혼인했으나불과1년반만에부인과사별했다.그후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영어를공부하고1917년휘문의숙徽文義塾(후에‘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로개칭)에입학하여문학에대한관심을갖기시작했다.이때휘문의숙에는홍사용,안석주,박종화등의선배와정지용,이태준등의후배,그리고동급반에화백이승만이있어서문학적안목을키우는데직간접으로도움을받았다.
휘문의숙3학년때인1919년에3·1운동이일어나자고향강진에서거사하려다일본경찰에체포되어6개월간대구형무소에서옥고를치렀다.1920년에일본으로건너가아오야마[靑山]학원중학부를거쳐같은학원영문학과에진학했다.이무렵독립투사박렬,시인박용철과도친교를맺었다.그러나1923년관동대지진으로인해학업을중단하고귀국후고향에머물렀다.1925년에개성출신김귀련과재혼했다.광복후은거생활에서벗어나사회에적극참여하여강진에서우익운동을주도했고,대한독립촉성회에관여하여강진대한청년회단장을지냈으며,1948년제헌국회의원선거에출마하여낙선했다.1949년에는공보처출판국장을지냈으며,평소음악에대한조예가깊어국악이나서양명곡을즐겨들었고,축구와테니스등운동에도능하여비교적여유있는삶을영위했다.9·28수복하루전인9월27일길에서유탄에맞아세상을떠났다.
저서로는<내마음아실이>,<가늘한내음>,<모란이피기까지는>등의작품이실린《영랑시집永郞詩集》(1935)과《영랑시선》(1949),유고시집《모란이피기까지는》(1981)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