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목사 딸의 백팔배: 어느 종교학자의 자기 배려하기』는 근본주의적 개신교 가정에서 자란 한 종교학자가 종교와 가족이라는 강력한 체계에 도전하면서 맹렬히 자기 언어와 세계를 찾아가는 기록이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회고하는 이 내밀하고도 깊은 울림을 주는 서사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맞닥뜨려온 예속과 억압, 세속과 성스러움, 욕망과 포기의 일화들을 분석하며 자기 정체성 형성에서부터 자기 수양과 배려, 그리고 공동체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성찰을 함께 엮어낸다.
작가는 자기 삶을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는 연구자로서의 사명감과 지난 40여 년간의 일상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는 민망함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뤄낸다.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누구나 ‘손절’을 권하는 이 시대에 작가의 이와 같은 끈질긴 자기 탐구는 그 집요함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보다도 섬세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서사와 성찰 앞에서 독자들은 이 시대에 각자에게 필요한 ‘자기 배려하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반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찾기의 가능성 (그런데 굳이 신천지 속으로까지 걸어 들어갔어야 했을까)
이 책은 작가 이정은이 한동안 찾지 않았던, 강압적이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저 아버지를 피하고만 싶었던 작가는 집으로 방문하는 일이 괴롭기만 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에 들어선 뒤 그 방을 가득 채운 황량함 앞에서 말문을 잃는다. “왜 황량하냐고, 이래서 내가 한 번이라도 똑바로 미워할 수나 있겠냐고, 대체 왜 아무것도 없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울음을 꼭꼭 부여잡은 채”(28면) 작가는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 뒤 문득 자신의 아버지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아니며 그의 방은 다른 무엇들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바로 그것들, 다른 어떤 방보다 더욱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채워진 그 무엇인가를 탐색해가는 ‘탐구일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가의 어린 시절은 금욕으로 가득 차 있다. 텔레비전, 신문 등 외부와의 접촉을 중계하는 매체는 허락되지 않았다. 외식, 군것질은 상상할 수 없었고 오로지 손으로 직접 만들고 차린 음식만이 허용되었다. 어느 날 이가 흔들려 치과 치료를 바라는 그에게 들려온 답변은 하나님을 그 따위로 믿으니 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불호령뿐이었고, 장염으로 인해 시험을 보지 못한 날에는 마찬가지로 그 따위 정신 상태로 학교에 다닐 거면 당장 그만두라는 호통을 들었다. 이처럼 모든 병은 자기 죄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스스로 수습해야 한다고 보는 종교 근본주의적 사고를 유년기 내내 체득했기에, 작가는 자기 검열과 금욕의 삶을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며 살아간다. 다만 도무지 관용이라고는 없는 엄격한 생활 속에서 작가는 철저히 순응하는 삶과 거부하고 저항하는 삶 사이에서 점차 큰 혼돈을 느끼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한때는 진리를 찾고자 한다는 이유로 신천지의 교리를 배우기도 하고 기독교에 비판적인 학과 선배에게 사탄 운운하기도 할 정도로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그러다가 푸코와 라캉, 지젝과 버틀러 등을 접하며 인간사회의 통치 매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에 따라 자신의 부모는 어떻게 가족의 삶 전반을 장악해왔는지를 파악한다. 한마디로 그의 부모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전제로 하는 ‘자기 포기’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연마했다. “사실 그의 방은 가득 차 있었다. 그 황량함으로, 낡음으로, 메말라 있음으로. 그곳은 극도로 ‘자기 포기’적인 금욕적 정신으로, 실천으로, 삶으로, 어쩌면 그 누구의 방보다 강렬하게 메워져 있었다.”(29면) 이처럼 연마된 부모의 ‘자기 통치’는 자녀들의 양육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자기 배려하기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정치’ (목사 딸이 백팔배를 시작한 이유)
작가는 자기 부모의 억압적 통치의 기원을 찾아 부모의 과거를 돌아본다. 그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편린과도 같아, 작가의 부모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섭렵하고 느지막이 종교계에 발을 디딘 후에도 전위조직의 일원처럼 깊숙이 몸을 담근다. 이 같은 또 다른 ‘투신’은 기독교가 창시 초기에 유럽을 위시한 서구 문화 전체에 일으킨 전복을 그대로 답습하여, 당시의 열혈 신자들이 그랬듯 작가의 부모 또한 ‘타락한 나’를 되살리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 매진한다.
이 같은 자기 포기 이데올로기에 갇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작가는 이에 대한 대안을 치열히 모색하다가 미셸 푸코의 ‘자기 배려하기’ 개념에 다다른다. ‘배려’라는 말에서 현대에 쓰이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 금욕주의를 내던지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는 이 말의 원저작권자인 푸코가 본래 뜻하고자 한 바가 아니다. 푸코는 기독교가 서구 문화를 잠식하기 이전인 고대 서구인들이 “본질적인 자기란 존재하기 않기에 평생에 걸쳐 이를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가야 한다”(202면)라고 생각했던 점에 착안하여, 기독교의 억압적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그것의 가르침인 ‘자기 포기’와 정반대로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강조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을 부단히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해 작가가 자신의 종교와 가족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들추며 정면으로 응시하고 응전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안쓰러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종국에는 그의 해방감에 깊이 공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장면 장면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익숙했던 것들과 하나씩 결별한다. 우선 40년 가까이 다니던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우상 앞에서 절하지 않겠다는 자기 맹세를 저버리고 백팔배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기’는 애초부터 주어진 값이 아니며, 내가 관계 맺는 여러 실천과 방식을 아우르며 시시각각 결합하고 해체되며 매순간 재구성되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푸코의 말을 빌려, “오늘날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우리 자신에 대한 정치”(212면)임을 깨닫는다.
* 온다프레스의 파도문고는 전 지구적인 생태, 평등, 노동의 위기에 맞서는 작은 파도 같은 이야기들의 기획 시리즈다. 이 시대의 급진적인 생각들, 금기가 된 행동들이 어떤 때에는 잔잔하게, 어떤 때에는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결국에는 우리를 살릴 것이다.
작가는 자기 삶을 냉정히 평가해야 한다는 연구자로서의 사명감과 지난 40여 년간의 일상을 낱낱이 드러내야 한다는 민망함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뤄낸다.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 누구나 ‘손절’을 권하는 이 시대에 작가의 이와 같은 끈질긴 자기 탐구는 그 집요함 하나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보다도 섬세하면서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풀어낸 서사와 성찰 앞에서 독자들은 이 시대에 각자에게 필요한 ‘자기 배려하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반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찾기의 가능성 (그런데 굳이 신천지 속으로까지 걸어 들어갔어야 했을까)
이 책은 작가 이정은이 한동안 찾지 않았던, 강압적이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그저 아버지를 피하고만 싶었던 작가는 집으로 방문하는 일이 괴롭기만 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방에 들어선 뒤 그 방을 가득 채운 황량함 앞에서 말문을 잃는다. “왜 황량하냐고, 이래서 내가 한 번이라도 똑바로 미워할 수나 있겠냐고, 대체 왜 아무것도 없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울음을 꼭꼭 부여잡은 채”(28면) 작가는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얼마 뒤 문득 자신의 아버지가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이 아니며 그의 방은 다른 무엇들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바로 그것들, 다른 어떤 방보다 더욱 강렬하고 열정적으로 채워진 그 무엇인가를 탐색해가는 ‘탐구일지’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가의 어린 시절은 금욕으로 가득 차 있다. 텔레비전, 신문 등 외부와의 접촉을 중계하는 매체는 허락되지 않았다. 외식, 군것질은 상상할 수 없었고 오로지 손으로 직접 만들고 차린 음식만이 허용되었다. 어느 날 이가 흔들려 치과 치료를 바라는 그에게 들려온 답변은 하나님을 그 따위로 믿으니 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불호령뿐이었고, 장염으로 인해 시험을 보지 못한 날에는 마찬가지로 그 따위 정신 상태로 학교에 다닐 거면 당장 그만두라는 호통을 들었다. 이처럼 모든 병은 자기 죄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스스로 수습해야 한다고 보는 종교 근본주의적 사고를 유년기 내내 체득했기에, 작가는 자기 검열과 금욕의 삶을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기며 살아간다. 다만 도무지 관용이라고는 없는 엄격한 생활 속에서 작가는 철저히 순응하는 삶과 거부하고 저항하는 삶 사이에서 점차 큰 혼돈을 느끼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다.
대학에 입학한 뒤로 한때는 진리를 찾고자 한다는 이유로 신천지의 교리를 배우기도 하고 기독교에 비판적인 학과 선배에게 사탄 운운하기도 할 정도로 좌충우돌을 거듭한다. 그러다가 푸코와 라캉, 지젝과 버틀러 등을 접하며 인간사회의 통치 매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에 따라 자신의 부모는 어떻게 가족의 삶 전반을 장악해왔는지를 파악한다. 한마디로 그의 부모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전제로 하는 ‘자기 포기’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연마했다. “사실 그의 방은 가득 차 있었다. 그 황량함으로, 낡음으로, 메말라 있음으로. 그곳은 극도로 ‘자기 포기’적인 금욕적 정신으로, 실천으로, 삶으로, 어쩌면 그 누구의 방보다 강렬하게 메워져 있었다.”(29면) 이처럼 연마된 부모의 ‘자기 통치’는 자녀들의 양육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자기 배려하기는 곧 ‘우리 자신에 대한 정치’ (목사 딸이 백팔배를 시작한 이유)
작가는 자기 부모의 억압적 통치의 기원을 찾아 부모의 과거를 돌아본다. 그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편린과도 같아, 작가의 부모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을 섭렵하고 느지막이 종교계에 발을 디딘 후에도 전위조직의 일원처럼 깊숙이 몸을 담근다. 이 같은 또 다른 ‘투신’은 기독교가 창시 초기에 유럽을 위시한 서구 문화 전체에 일으킨 전복을 그대로 답습하여, 당시의 열혈 신자들이 그랬듯 작가의 부모 또한 ‘타락한 나’를 되살리기 위해 철저히 자기를 포기하는 삶에 매진한다.
이 같은 자기 포기 이데올로기에 갇혀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작가는 이에 대한 대안을 치열히 모색하다가 미셸 푸코의 ‘자기 배려하기’ 개념에 다다른다. ‘배려’라는 말에서 현대에 쓰이는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 금욕주의를 내던지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이는 이 말의 원저작권자인 푸코가 본래 뜻하고자 한 바가 아니다. 푸코는 기독교가 서구 문화를 잠식하기 이전인 고대 서구인들이 “본질적인 자기란 존재하기 않기에 평생에 걸쳐 이를 예술 작품처럼 만들어가야 한다”(202면)라고 생각했던 점에 착안하여, 기독교의 억압적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그것의 가르침인 ‘자기 포기’와 정반대로 욕망을 추구하며 사는 것만이 정답이 아님을 강조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을 부단히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
‘관계’를 재설정하기 위해 작가가 자신의 종교와 가족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들추며 정면으로 응시하고 응전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안쓰러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종국에는 그의 해방감에 깊이 공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의 장면 장면을 돌아보면서 그동안 익숙했던 것들과 하나씩 결별한다. 우선 40년 가까이 다니던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우상 앞에서 절하지 않겠다는 자기 맹세를 저버리고 백팔배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기’는 애초부터 주어진 값이 아니며, 내가 관계 맺는 여러 실천과 방식을 아우르며 시시각각 결합하고 해체되며 매순간 재구성되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푸코의 말을 빌려, “오늘날 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인 “우리 자신에 대한 정치”(212면)임을 깨닫는다.
* 온다프레스의 파도문고는 전 지구적인 생태, 평등, 노동의 위기에 맞서는 작은 파도 같은 이야기들의 기획 시리즈다. 이 시대의 급진적인 생각들, 금기가 된 행동들이 어떤 때에는 잔잔하게, 어떤 때에는 거세게 몰아칠 것이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책이 결국에는 우리를 살릴 것이다.
목사 딸의 백팔배 (어느 종교학자의 자기 배려하기)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