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몰락

신의 몰락

$17.00
저자

최희영

저자:최희영
울산에서태어나,
한양대학교공학대학원을졸업
시집「장미와할아버지」
소설집「엇모리」
장편소설「더맥脈」「갠지스강」「1862,」「중원의바람-장군김윤후」
한국소설가협회,한국문인협회회원

목차


프롤로그

1부,봉홧불/7
2부,해무속으로/81
3부,섯알오름/165
4부,신은죽었다/225
5부,붉은해안/271

에필로그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저자의말

장편소설「신神의몰락」은한라산과곶자왈을배경으로,해방이후부터6·25전쟁기까지격동의세월을살아간한가족의이야기다.그러나이소설은부일환과부종수,동우와그일가족의비극만을말하려는것이아니다.그들은곧수없이많은또다른‘우리’였다.이웃을잃고,가족을잃고,믿음을잃고,급기야자신조차잃어버린이들은혼란의시대를살아냈다.그리고그들중일부는끝내살아남았고,또일부는흔적도없이사라졌다.
국가의이름으로정당화된폭력앞에서누가선하고누가악한지를단정짓기는위험하다.필자는이소설을통해이념이라는이름으로서로를향해총구를겨눠야했던그슬픈선택을,그속에서끝내인간다움을지키고자애쓴사람들을간절히그리고싶었다.그것이살아남은자로서,그리고글을쓰는사람으로서해야할몫이라믿었다.

책속에서

1948년8월15일,마을뒷산에서솟아오른봉화를끝으로섬제주를달궜던열기는산간으로숨어들었다.
그해10월이접어들무렵,한라산소슬바람이중산간평원으로불었다.한라산이토했던용암길을따라화산석돌담이해안절벽까지출렁거리고,대양의거센파도가섬제주해안으로들이쳤다.수십만년전,뜨거운용암을식힐때처럼,섬제주해안이붉게들끓기시작했다.
소개령이내려졌다.섬제주서남부중산간평원의상평마을도예외는아니었다.무장대접근이쉬운중산간마을을떠나,해안1.5킬로미터이내로소개하라는이승만정부의명령은단호했다.게다가제주에계엄령이내릴거라는소문까지나돌아,해안가에집을구하지못한마을사람들이전전긍긍했다.
10월이끝날무렵,소문으로나돌던계엄령은사실이되었고,적의를품은거센파도가섬제주를혼란속으로욱여넣었다.

상평마을에서매일피비린내가났다.낮에는토벌대가밤에는무장대가마을을쑥대밭으로만들었다.젊은사람들은죄다곶자왈이나산간으로도망가,마을에는노인들과어린애밖에남지않았다.토벌대에붙잡히면살기어려웠다.산으로도망가면빨갱이라죽였고,마을에숨으면무장대끄나풀이라며머을왓으로끌고가죽였다.아버지처럼곶자왈로달아나지않으면이장고순봉의말대로해안가로이사하는수밖에없었다.
‘우리집도해안가로빨리이사하면좋을텐데……,’
동우네는그나마운이좋았다.해안가로소개하지않는다고토벌대장이치순이윽박질렀을때도할머니는토벌대장을똑바로바라보며거침없이말했다.
“상모리김승보면장알지,그어른이내친정오라비라고,곁채를비워준다고했으니,며칠만말미를줘.곧이사할테니.”
김승보면장이친정오라버니라고목소리를높였으니아무리위세당당한토벌대장이치순이라도함부로할머니를대할수없었을것이다.
기태집에연기가자욱했다.무장대가불을지른것같았다.기태할아버지가기태를데리고곶자왈로달아나도록토벌대를막아섰다는이유로기태부모는토벌대에총살당했다.기태동생숙자는어머니젖꼭지를물고울다가지쳐서죽었다.곶자왈로달아난기태와기태할아버지가살아남았는데,기태할아버지김하호는마을에서나이가가장많아마을사람들은어르신이라불렀다.
동우는발걸음을멈추고기태집을눈여겨보았다.그러나타다만시커먼서까래밖에보이지않았다.
돌담틈으로한라산에서서늘한바람이담쟁이잎사귀를훑고모슬포로흩어졌다.
‘할머니는무사하실까……?’
동우는할머니가걱정되었다.무릎상처가낮지않아온종일마루에앉아마라도를바라보는할머니가생각나무작정윗마을집으로내달렸다.

덩그런안채대청마루한쪽에는안방과서재가있었고,오른쪽은다른방은민수부모님이거처한다고했다.민수는민수할아버지가거처하는사랑방옆에작은방이었다.대청마루는식모가매일닦아윤기가반들거리고모든게정갈하게놓여있었다.아래채광을제외해도머슴들이거처하는방이네칸이더있었는데,토벌대를피해죄다산으로도망가,비어있다고말하면서할머니는눈시울을붉혔다.어쨌든,동우가이사한곁채와는비교조차할수없는엄청나게큰집이었다.
민수할아버지,그러니까할머니친정오라버니는섬제주에서일본오사카를드나들며밀무역으로돈을벌어,해방후에는제주도로완전히돌아왔다고했다.상모리사람들은쪽발이개라며쑥덕거려도아무렇지않은듯돌아다녔는데,동우가보기에도뻔뻔스러워보였다.
민수아버지김경태는일본군차출을피하려고오사카에서유학하고,해방후섬에돌아와서대정면사무소서기로근무했다.야위긴해도피부는하얬다.턱수염이덥수룩하게기른아버지와겉모습부터달랐다.서청놈들을데리고다니지않으면,말쑥한차림이라전혀딴사람처럼보였다.
동우는곁채더부살이가부끄러워아무에게도말하지않았다.독립이니통일이니주절거리며집에도들어오지않는아버지보다오히려민수아버지가멋져보였다.아버지도일본에서유학했더라면선생은못하더라도면서기는할텐데.곶자왈을들락거리며한밤중에담장이나넘는아버지나할아버지처럼독립운동이나통일따위는하지않을생각이었다.

해방이듬해이른봄,부일환은북간도에서제주도산지항(제주항)에도착했다.섬,제주는어수선했다.좌익이니우익이니,찬탁이니반탁이니,알수없는일들로서로헐뜯기를기다렸다는듯대양에서거센파도가들이쳤다.나라가두동강으로쪼개지려고했다.파도는멈추지않았다.수십만년을버틴화석층벼랑도쉴새없이들이치는파도에한조각씩떨어지기시작했다.부일환의운명도떨어져나간화산석조각에불과하다는것을깨달았을때,섬제주는볼수없었다.산채동지들의생사도가족들의소식도그는알수없었다.
잡초가무성한임해학교뒷길을돌아월미산으로올라갔다.해발100여미터남짓한작은섬에서바라보는해무로가득찬제물포연안은광야처럼눈앞에서얼쩡거렸다.부일환은눈덮인광활한만주벌판을떠올렸다.눈보라치던그춥던만주벌판을생각할때마다피가들끓는듯했다.
월미산멧부리에왜놈신사가눈앞에나타났다.
“이런염병할…….여태왜놈신사가남아있다니…….”
부일환은왜놈잔재만보여도부아가치밀었다.북간도로퇴각할때왜놈들에게총맞이죽으면서도독립을외치던동지들아우성이들리는듯했다.조국이도대체무엇이길래부모처자를버려두고먼타국에서목숨까지던졌을까.적어도3·8선남북으로나뉘어서로으르렁거리며싸우는모습은분명아니었을것이다.

사람들이수군거렸다.귀를틀어막아도사람들비아냥이귓가에서얼쩡거렸다.사정을모르는사람들은살인자로보였을지모르지만,부모를죽인원수를살려둘자식은없을것이다.민수아버지김경태는서청놈들과수많은사람을살해하고다녀도살인자라비난은커녕외려사람들이침묵했다.게다가동우형이민수아버지를죽이지않았으면동혁이나서서죽였을것이다.이장고순봉은더나쁜사람이었다.소개할곳이없어할머니가민수할아버지김면장에게부탁해이사할집을소개해줬다.인사치레는차치하더라도마을사람들을부추겨동우형을빨갱이자식이라살인을저질렀다며소문을퍼뜨렸다.
할아버지는빼앗긴나라를찾으려고수십년을왜놈들과싸웠고,아버지는사람들을마구죽이는토벌대와맞서싸웠다.그런데빨갱이라며섯알오름에서총살했다.왜놈들과싸운게,토벌대와싸운게죽을짓은아닐것이다.지렁이도밟으면꿈틀하는데,하물며사람이었다.가만히앉아서당할사람은없었다.민수아버지김경태에게눈을부릅뜨며욕을퍼붓던아버지와가슴팍에낫으로내리꽂던동우형의핏발선눈빛이설핏스쳤다.죽어야할놈들을죽였을뿐이었다.누가뭐래도동혁은자신있게말할수있었다.

해병들의복창소리는우렁찼다.‘오퍼레이션크로마이트작전’성공으로상륙군해병의사기는하늘을찔렀다.
하지만,동우는죽을곳을찾고있었다.누군가죽어야누군가는살수있었다.그누군가는가족일수도,동료일수도그리고이웃일수도있었다.
동료들을돌아보았다.지금은살았지만,내일이면차가운시신으로버려질지아무도모른다.그것이삶이라면동우는굳이피하고싶지않았다.이름표를보았다.‘고영준’부동우는이세상어디에도없었다.비쩍마른손을들어올리고살려달라고애원하던인민군이설핏떠올랐다.그도누군가의가족이고자식일것이다.동우가아니더라도누군가에게죽었을것이다.그또한누군가에게죽을것이고…….
상륙주정이한강을도하하기시작했다.건너편행주산95고지인민군방공포진지에서기관포포탄이빗발처럼날아왔다.인민군저항은거셌다.동우는인식표를목에서떼어내오른손에들고왼손으로이름표를뜯어한강에던졌다.동우의죽음은아무도모를것이다.흔적조차찾을수없을것이다.고영준이든부동우든,상관없었다.애초부터세상에존재하지않았던사람처럼사라지면그뿐이었다.
동우는상륙주정에서일어나M1소총을어깨에걸쳤다.강건너행주산95고지가하얗게눈앞으로다가왔다.가슴이뜨끔했다.섯알오름방공포진지로굴러떨어지던사람들이맞았던총알이이랬을까.동료들의함성이들려왔다.
“어머니!”
토벌대의무분별한총소리가어지럽게들렸다.
“빨갱이새끼는모조리죽여야해!”
동우귓가에토벌대이치순의발칙한고함이귓전을스쳤다.
“동희야미안해,……,할아버지죄송해요…….”
동희와할아버지에게미안했다.동우는그릇된판단이부끄러웠다.몸뚱이가하늘로떴다.그리고자유낙하를시작했다.한강을넘나드는총소리가섯알오름분화구에서나는듯했다.그는눈을감았다.그리고중력에몸을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