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레퀴엠 (이서진 장편소설)

썸머 레퀴엠 (이서진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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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 사람의 삶은 계절을 닮는다. 그러나 어떤 계절은 꽃을 피우기보다 인간을 무너뜨린다. 소설가 이서진의 신작 장편소설 「썸머 레퀴엠」은 가장 생명력이 왕성해야 할 여름을 인간을 압도하는 폭력의 계절로 전복시키며, 한 여성의 삶을 통해 폭력과 빈곤, 가족사와 사회적 고립이 어떻게 한 인간의 존재를 잠식하는지를 치밀하게 그려낸 문제작이다. 작가는 폭력을 특정 개인의 일탈이나 우연한 사건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가족사와 계급, 질병, 돌봄, 노동, 그리고 사회적 무관심이 중첩된 구조적 현실로 확장하면서 우리 시대의 폭력 지형도를 치밀하게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 희정은 독거노인생활관리사다. 죽음에 가까운 노인들의 삶을 돌보는 노동은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홀로 살아가는 노인들의 안부를 살피며 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는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이 돌보던 정 할머니의 집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정 할머니의 먼 친척이라는 남자가 어느 순간 희정의 집까지 따라와 마치 자신의 집인 양 눌러앉는다. 그는 희정의 삶을 무참히 침범하고, 폭언과 폭행은 물론 성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다. 일상은 순식간에 감옥으로 변하고, 희정은 누구에게도 쉽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 채 폭력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남자는 자신이 대장암을 이겨냈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끊이지 않는 기침과 각혈은 그의 몸속에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희정은 과거를 떠올린다. 채석장에서 일하다 진폐증을 얻어 평생 방 안에 누워 가족의 삶을 갉아먹던 아버지. 병든 몸을 핑계 삼아 가족을 지배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그의 모습은 현재의 남자와 겹쳐지며 폭력이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병든 육체는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의 매개가 되고, 질병은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기보다 오히려 타인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작가는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희정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홀로 식당에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지만 가난한 집안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당해 이별을 겪고, 이후 소개로 만난 정현과 결혼하지만 그가 남성을 사랑하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또 한 번 삶은 무너진다. 사랑도, 결혼도, 가정도 끝내 그녀의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실패한 사랑과 파혼, 성소수자인 남편과의 결혼과 이혼, 가난한 성장기 등으로 이어지는 희정의 삶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한국 사회의 계층 이동과 가족 제도의 균열을 드러낸다. 이 모든 서사는 비극을 과장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사회적 폭력에 노출되는지를 증언하는 서사적 토대가 된다.
이서진 작가의 장편소설 「썸머 레퀴엠」이 특별한 이유는 이러한 개인의 비극을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품은 ‘여름’이라는 계절을 하나의 거대한 상징체계로 구축한다.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와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 숨 막히는 장마와 곰팡이 냄새가 번지는 습기, 생명을 짓누르는 폭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듯한 태풍, 잠조차 허락하지 않는 열대야는 모두 희정의 삶을 덮쳐오는 폭력과 불안, 공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자연의 기후 변화는 곧 인간을 둘러싼 폭력의 기후로 치환되며, 독자는 계절이 주는 생명력조차 인간에게는 잔혹한 횡포가 될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독거노인생활관리사라는 직업적 배경 역시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삶의 끝자락에 선 노인들을 돌보는 희정은 타인의 고독과 죽음을 매일 마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시간은 갖지 못한다. 타인의 삶을 지키는 노동과 자신의 삶이 무너지는 현실이 교차하면서 현대 사회가 감추고 있는 돌봄 노동의 이면과 여성의 취약한 생존 조건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소설 후반부, 희정을 옥죄던 남자는 결국 재발한 대장암과 폐암까지 겹치며 삶의 종말을 기다린다. 그러나 작품은 그의 죽음을 단순한 응징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 상처와 폐허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서진 작가는 그 황폐한 시간을 통과한 희정이 언젠가는 잃어버린 삶의 온기와 인간의 존엄을 되찾기를, 폭력에 훼손된 세계 위에 ‘순한 정결의 복원’이 다시 시작되기를 조용히 기원한다.
「썸머 레퀴엠」은 가정폭력, 여성폭력, 빈곤, 돌봄 노동, 질병, 성정체성, 노인 문제 등 오늘의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다양한 현실을 한 여성의 생애 속에 응축해낸 작품이다. 동시에 여름이라는 계절을 인간 존재의 위기와 생존의 은유로 확장하면서 서정성과 사회성을 함께 획득한 장편소설이다. 삶을 무너뜨리는 폭력은 계절처럼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이서진 작가는 그 계절을 견뎌낸 사람만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썸머 레퀴엠」은 절망의 기록인 동시에, 인간 존엄의 회복을 향한 깊고도 묵직한 진혼곡이다.
저자

이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