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리고

$10.70
Description
화가이자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윤현순 시인이 신작 시집 『그리고』를 펴냈다. 삶의 구체적인 일상에서 길어 올린 서정과 자연의 생생한 감각, 오랜 시간 숙성된 사유가 어우러진 시집이다. 회화적 감수성과 영화적 시선을 지닌 시인은 일상의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 그 안에 스며 있는 삶의 무게와 지속의 힘을 시의 언어로 펼쳐 보인다.
윤현순 시인의 시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한 폭의 수채화를 닮았다. 대상의 윤곽을 선명하게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빛과 색이 번지듯 감정과 기억이 스며드는 과정을 담아낸다. 평범한 삶의 순간도 시인의 시선을 통과하면 저마다의 결을 지닌 풍경이 된다. 그 서정은 현실을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에서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는 감각이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시선 또한 이러한 시 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윤현순 시인의 시는 자연의 흔적을 생생하게 찍어내는 카메라처럼 대상의 표정과 움직임에 주목한다. 시 속의 자연은 감상의 배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고, 기억과 감정을 통과하면서 삶의 일부로 육화된다. 눈앞의 풍경과 내면의 시간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자연은 사람의 삶을 말하는 언어가 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특징은 시어에 깃든 시간의 깊이다. 윤현순 시인의 언어는 서정적이면서도 가볍게 흘러가지 않는다. 항아리 속에서 오래 발효된 시간을 건져 올리듯, 살아온 날들의 경험과 감정을 천천히 풀어낸다. 발효가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내듯, 시인의 언어도 오래 품어온 기억과 사유를 통해 깊이를 얻는다. 독자는 그 언어를 따라가며 한 사람의 일상이 어떻게 보편적인 삶의 울림으로 넓어지는지 만나게 된다.
시집 『그리고』를 관통하는 것은 만만찮은 현실을 뚫고 올라오는 삶의 노래다. 이 시집의 서정은 현실의 무게를 견디는 자리에서 피어난다.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계를 바라보고, 느끼고, 다시 말을 건네려는 마음이 시를 움직인다. 그 노래가 지닌 힘은 삶을 쉽게 낙관하는 데 있지 않다.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감각을 닫지 않고, 일상과 자연 속에서 살아갈 의미를 길어 올리는 데 있다.
시집 제목 ‘그리고’는 이러한 시 세계를 읽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다음 이야기를 잇는 말, 지나온 시간 뒤에 아직 살아갈 시간이 있음을 환기하는 말이다. 일상과 자연, 기억과 현재, 상처와 생의 의지를 연결하는 이 접속의 언어는 시집 전체를 삶의 지속에 대한 사유로 이끈다.
윤현순 시인의 『그리고』는 그림을 보듯 풍경을 느끼고, 영화를 보듯 순간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시를 통해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을 읽게 하는 시집이다. 서로 다른 예술의 감각이 시의 언어 안에서 만나, 우리 곁의 일상에 깃든 깊이와 현실을 견디며 이어지는 삶의 힘을 전한다.
저자

윤현순

2010 신사임당 506주년 기념 입선
2011년 문학저널 시로 등단
2014년 문학저널 창작문학상
2022년 한국 부인협회 편지글 동상
2025년 도화 출판사 창작문학상

저서
「붙잡고 싶은 계절」「사는게 다 이런거여」「그 신작로」 「그 길의 허수아비」 「손가락으로 그린 바람」

한국문협 상벌제도위원, 충북문협회원, 청주문협회원, 충북여백회장, 문학저널 자문위원, 문학저널 충북지부장 역임

기타 활동
구절초 꽃필 무렵 단편영화
2020 국제실버영화제 본선 서울시장상
2020 국제실버 우수 작품상
2020 남한강영화제 우수작품상
2023 시린목 충북 mbc 방영

목차

1부

세월 / 그리고 / 문장 연습 / 그냥 보고만 있다 / 마당이 핀다 / 점심 / 가을비 우는소리 / 중복 / 미디어 센터에서 생긴 일 / 깁스하고 / 첫 출근 / 작약 꽃 / 필사하면서 / 굽어진 등 / 재건축

2부

11월의 숲 / 용의자 / 센서 등 / 보이스 피싱 / 낭만 고양이 / 빈 자전거 / 새벽 별 / 내 마음속에 개가 살고 있다 / 밀알이 익어 가는 / 겨울 끝 / 37도 / 찰나 / 나는 매일 너와 논다 / 가뭄 속 장맛비 / 찬밥

3부

짱안 호수 / 동쪽 끝 화산섬 / 바람난 기후 / 남빈강 / 염불 / 고발 / 11월 / 사이와 사이 / 슈뢰딩거 / 테러리스트를 만났다 / 2월에 묻는다 / 장전 / 크루즈의 밤 / 상사화의 꿈


4부

겨울이 말을 걸다 / 작은 우주에 핀 꽃 / 한나절 / 겹겹이 / 날 압니까? / 삼월의 바다 / 늦봄 / 초점을 잃어버리고 / 풍금 소리 / 바다에 두고 온 저녁 / 별을 세다 / 환상통 / 글라디우스 / 친정 / 수인번호

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4년간 써온 시들을 끄집어 내
그동안 질퍽했던 삶의 이야기를
4번째 시집으로 묶어본다
고단했던 풍경을 시집에 담아
세월 따라 흘러갔으면 좋겠다


책 속에서

세월
거울 속 내 얼굴이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추억을 잃고 헤매는
잘린 늙은 소나무가 되었네

저녁이 되면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 속에서
반 토막으로 쪼개진 영혼을 올려다보네
총총히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시어를 잃어버려 머릿속을 헤집어도
붉게 물들어 가는 세월
곱게 접으며
수천 개의 기억이 노랗게 단풍 드네

마당이 핀다
출산을 마친
어미의 가슴처럼
부푼 젖꼭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앞마당
화선지에 눈을 그리면
자궁속 선혈처럼
쏟아져 나오는 꽃

가슴속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
명자나무 봉오리는 다시 움츠리고
등과 무릎뼈 떨어져 나가는 통증을 넘어
다시 깨어난 환하게 피어나는 나무
이른 봄 햇볕에 눈이 녹아내리면
붓을 놓고 문밖으로 나가는 손
발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눈 하나 줍는다
여린 눈 뜰 것 같은
붓 끝에 스며든 붉은 빛 봉오리

겨울 끝
눈발이 쌀알처럼 쏟아지는 까만 밤
나는 은행리에 화분처럼 놓여있네

돛대 꼭대기
눈꽃 내린 기둥 위에
눈먼 새 한 마리
어미 찾아 구슬피 울고

함박눈은 수의처럼 어둠을 덮고
창밖엔 자동차 불빛이
길을 가르고

까맣게 보이는 감나무
분절된 모습은
구부러진 등에
하얀 깁스를 하고 있네

깊은 밤 허리 어깨
고양이 발자국 소리
눈 속에 스며들고
생강나무 심줄 타고 가는
푸른 링거 소리
바람에 흔들린다

찬밥
나는 식탁에 서서
찬밥에 물 말아
고추에 된장 찍어 먹고

엄니는
밤새 이슬 맞힌 보리밥
찬물에 물 말아
장독대에 서서
된장에 고추 찍어 먹고
들에 가신다

오늘도 나는 찬밥에
물 말아 놓고
빈 하늘에
그림 그린다

사이와 사이
풍뎅이 한 마리 안방을 점령했다
바람을 일으킨다

배를 하늘에 올려놓고
바닥을 닦기 시작한다
로봇 청소기가 되었다
선풍기도 되었다

씽씽 돌던 풍뎅이
날개와 달리 물기가 사라졌다

서리 맞은 국화꽃은
알 리 없지
풍뎅이 바람이 여기 있다는 걸

친정
우물가에 앵두나무 서 있지

낮이 가장 긴 날

붕어

해를 잡아보네


추천사

윤현순 시인의 시는 삶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린 감각적 수채화이자, 몸에 새겨진 계절의 흔적을 담아내는 생생한 필름이다. 시인이고 화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창작의 영역을 넓혀 온 그녀를, 주변 사람들은 ‘고3’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녀는 일평생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고3 수험생 같은 뜨거운 집중력과 성실함으로 삶과 예술에 몰두해 왔다.

시인의 언어는 “엄마의 안에서부터 삭아가는 노른자”처럼 서정의 아픈 기저음을 눅진하게 품으면서도, 화선지 위로 쏟아지는 붓끝의 붉은 봉오리처럼 강렬하고 생생한 이미지를 피워낸다. 그녀의 시에는 발효된 삶의 항아리 속 깊이 가라앉은 시간을 건져 올리듯, 생의 마디마다 빼곡하게 박힌 통점들을 재치 있는 시어로 길어 올린다.

자신의 고통과 상처마저 뜨겁게 사랑하고 긍정하는 니체의 운명애(Amor Fati)처럼, 시인은 ‘그냥 그대로’ 피고 지는 서러운 계절과 삶의 그늘까지도 담담하게 껴안아 시로 풀어낸다. 회화와 영화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그녀의 시는 독자의 가슴속에 진한 울림을 준다. 굳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섬세한 생의 붓질 소리가 바로 여기, 윤현순 시인의 시 속에 아롱져 있다.
- 김나비 (시인·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