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과 일생 (오병량의 11월)

생일과 일생 (오병량의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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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2025년 난다의 시의적절, 그 열한번째 이야기!
시인 오병량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11월의, 11월에 의한, 11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시라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난다 출판사 시의적절 시리즈 스물세번째 책, 2025년 11월의 주인공은 201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시인 오병량이다. 약속할 수 없다 해도 안녕하길 바라게 되는 이 가을, 시인에게 11월은 우리가 향수할 수 있을 모든 날에 대한 뒤늦은 찬사, 그 하나라 해도 족하다(작가의 말). 『생일과 일생』은 등단 12년 만에 선보이는 오병량의 첫 산문집으로 여섯 편의 시와 잡문, 단상, 편지 등을 통해 그에게 왔고 다녀간, 사랑하고 앓던 손님 같은 마음들을 적어낸다. 생일을 뒤집으면 나타나는 일생이란 말. 그런 날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날과 그 하나의 일생이란 말속에는 나와 무관했던 먼 우주의 폭발로부터 시작된 부서지고 깨진 별들의 탄생과 여정이라는 사건과 사고들이, 그 파편화된 상처들이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아픔, 그 원소들이 어쩌면 삶의 집합 아닐까?(105쪽) “사랑에 완결이 있었던가요?” 그에겐 사랑의 기술보다는 사랑을 대하는 태도만이 시를 찾아갈 수 있는 최소이자 유일의 조건이다(11월 11일 잡문). 오늘은 막무가내로 온다. 매일매일이 내일 또 내일인 것처럼 우리는 같은 날씨와 똑 닮은 계절을 입고 균등한 시간 속에서 각자의 시간을 다르게 산다. 2024년에 펴낸 첫 시집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에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상수인 죽음’(고봉준)이 만든 사랑의 공터를 “매번 지려고 하는 짓/그 몸짓의 애쓰는 마음”(「호랑이꽃」)으로 맴돌았던 시인 병량(“너도 이름에 병이 있었다” 25쪽). 그러나 일생一生과 비견되는 일생日生이 있다 믿으면 세상이 죄다 애틋으로 물든 사건이 되지 않을까(「골똘히 아픔을 보면 죄다 사람의 얼굴」).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건, 어쨌든 도리 없는 것
나는 좋아진다, 함께라는 말이

1학년 6반, 2학년 7반, 3학년 1반, 4학년 9반(171쪽), 교실의 크고도 무겁던 검붉은 나무 뒷문, 그 문을 힘겹게 열고 들어가는 작디작은 나(「선생들」). 그때의 그 길과 낮잠과 풍경 그리고 냄새를 소환해보면 허기졌던 그날의 내가 보인다(「무진장」). 삶은 관계의 실타래 같아서 묶음의 형태로 그 궤를 짐작할 수도 있기에 그것을 작고 단단한 얌체공처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121쪽) 그다. 그럼에도 눈에 밟히는 건, 어쨌든 도리 없는 것(「녹두와 나비」). 그렇게 어떤 존재가 눈과 마음에 들어와 우리는 가족이 되기도 한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도 한두 번 둘러보고 싶은 집들이 있다(「내가 오뱅이었던 때」). 무소식이 희소식인 양 잊고 살다가 목소리만 들어도 많은 걸 헤아릴 수 있는 사이. 첫마디가 모해용, 이면 별다를 게 없다는 뜻이고 형, 하면 나는 왜? 뭔데? 하며 조바심이 나는(「P에게」) 관계. 다시 불러도 애먼 곳을 한참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는 그 무심함 속에 내 발끝에 매달린 고독은 따뜻하다. 나는 좋아진다, 함께라는 말이(62~63쪽). 중불과 약불 사이 그 정도로 익혀야 하는 닭다리살 구이(11월 4일 레시피)처럼 무례하지 않은 적당한 거리(191쪽), 보이나 가늠할 수 없는 거리(179쪽)가.


애썼다는 말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었다

볕에 익어가는 짚풀처럼 오는 마른 가을. 고통을 많이 배우면 쉽게 용서하게 된다(「예보」). 여러 번의 겹칠에도 결국 어두운 일은 어려운 색으로만 보이는(46쪽) 겨울의 길목. 시인에게 행복은 찰나 같고 불행은 불가피한 것. 행복은 풀숲에 숨겨진 어린 날의 보물찾기, 그에게 보물이 적힌 그 쪽지가 발견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어느 날엔 애썼다는 말보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었다(「멀리 있는, 다시 없을 너에게」).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당면을 넣은 단순한 국. 엄마가 엄마의 엄마에게서 배운 국은 그리 특별하진 않았지만 밖에 나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시답잖은 핑계를 둘러대며 그만 일어나려고 하는 시인을 밥상머리에 주저앉히고 마는 엄마의 당면국(11월 22일 잡문). 어쩌면 이 아늑이 아련하게 비벼져 물컹물컹 입안에 담기는 순간, 그는 함부로 기도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하며, 오직 자신을 믿으며 사랑을 게을리하지 않는 어른의 마음을 배웠던 건 아닐까(11월 24일 편지). 꼭 옳지 않다 해도 어떤 실수를, 한때의 그릇된 시간을 살포시 안아주는 마음(120쪽)을.

자정을 알리며 자명종이 울렸다
그러니까 꿈이라는 거지?
다 큰 놈이 운다고
방문을 크게 닫는 가족
문이 열릴까,
어째서 문은 다시 열릴까?
말없이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_「스멀스물수몰」 부분
저자

오병량

저자:오병량
2013년『문학사상』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고백은어째서편지의형식입니까?』가있다.

목차


작가의말골똘히아픔을보면죄다사람의얼굴7

11월1일시흔들11
11월2일잡문세상에서가장귀여운달리기15
11월3일잡문내가오뱅이었던때19
11월4일레시피모두다아는,누구나다하는닭다리살구이31
11월5일단상요즘애들버릇없어!37
11월6일잡문1998년,지상최대의우주쇼45
11월7일시그럼안오면돼요55
11월8일잡문녹두와나비59
11월9일잡문선생들69
11월10일잡문손님들81
11월11일잡문시라는마음이있다면누구라도좋았던때91
11월12일시예보97
11월13일단상생일101
11월14일레시피알아두면제법괜찮은양념107
11월15일잡문편지111
11월16일편지P에게115
11월17일잡문이남중차남123
11월18일잡문돈통과저금통131
11월19일시스멀스물수몰139
11월20일일기멀리있는,다시없을너에게143
11월21일잡문인생,벌꿀오소리처럼149
11월22일잡문김치볶음밥은위험해!157
11월23일시추신―봄에쓴편지에붙여163
11월24일편지랑에게165
11월25일잡문도무지쓸모를모를기억169
11월26일잡문무진장173
11월27일잡문과레시피딸기와고슴도치183
11월28일편지L에게189
11월29일잡문토박이193
11월30일시벽제201

출판사 서평

그럼에도눈에밟히는건,어쨌든도리없는것
나는좋아진다,함께라는말이

1학년6반,2학년7반,3학년1반,4학년9반(171쪽),교실의크고도무겁던검붉은나무뒷문,그문을힘겹게열고들어가는작디작은나(「선생들」).그때의그길과낮잠과풍경그리고냄새를소환해보면허기졌던그날의내가보인다(「무진장」).삶은관계의실타래같아서묶음의형태로그궤를짐작할수도있기에그것을작고단단한얌체공처럼만들어야겠다고생각하는(121쪽)그다.그럼에도눈에밟히는건,어쨌든도리없는것(「녹두와나비」).그렇게어떤존재가눈과마음에들어와우리는가족이되기도한다.조금돌아가는길이라도한두번둘러보고싶은집들이있다(「내가오뱅이었던때」).무소식이희소식인양잊고살다가목소리만들어도많은걸헤아릴수있는사이.첫마디가모해용,이면별다를게없다는뜻이고형,하면나는왜?뭔데?하며조바심이나는(「P에게」)관계.다시불러도애먼곳을한참바라볼뿐대꾸하지않는그무심함속에내발끝에매달린고독은따뜻하다.나는좋아진다,함께라는말이(62~63쪽).중불과약불사이그정도로익혀야하는닭다리살구이(11월4일레시피)처럼무례하지않은적당한거리(191쪽),보이나가늠할수없는거리(179쪽)가.

애썼다는말보다애쓰지않아도된다는말에
마음이왈칵쏟아질때가있었다

볕에익어가는짚풀처럼오는마른가을.고통을많이배우면쉽게용서하게된다(「예보」).여러번의겹칠에도결국어두운일은어려운색으로만보이는(46쪽)겨울의길목.시인에게행복은찰나같고불행은불가피한것.행복은풀숲에숨겨진어린날의보물찾기,그에게보물이적힌그쪽지가발견될확률은거의없었다.어느날엔애썼다는말보다애쓰지않아도된다는말에마음이왈칵쏟아질때가있었다(「멀리있는,다시없을너에게」).돼지고기김치찌개에당면을넣은단순한국.엄마가엄마의엄마에게서배운국은그리특별하진않았지만밖에나가먹을수있는음식이아니었다.시답잖은핑계를둘러대며그만일어나려고하는시인을밥상머리에주저앉히고마는엄마의당면국(11월22일잡문).어쩌면이아늑이아련하게비벼져물컹물컹입안에담기는순간,그는함부로기도하지않고꾸준히자신의일을하며,오직자신을믿으며사랑을게을리하지않는어른의마음을배웠던건아닐까(11월24일편지).꼭옳지않다해도어떤실수를,한때의그릇된시간을살포시안아주는마음(120쪽)을.

자정을알리며자명종이울렸다
그러니까꿈이라는거지?
다큰놈이운다고
방문을크게닫는가족
문이열릴까,
어째서문은다시열릴까?
말없이나는천장을올려다보았다_「스멀스물수몰」부분

책속에서

골똘히아픔을보면죄다사람의얼굴이었습니다.누구든그렇지않을까요,저라고다를바없이병주고약주던사람들이많았을겁니다.부끄럽지만살아가고있고아직용서하지못해살아내고있기도합니다.아픔을치유하기위해사람을멀리한들완치가있을리없고사람의일에아픔이배제될수도없으니면역없는사람을우리는겪어내야하겠습니다.누구나그렇게살아가고있으니외롭게건강했으면합니다.
―「골똘히아픔을보면죄다사람의얼굴」부분

한때내가오뱅이었을때,너희에게도근사한별명들이있었다.여전히유효한,아니면불행히도기한이다한그값진별명들에경의를표한다.지금은아니라해도남달랐던시절마저절연한적없으니모름지기누구와도추억은근친이다.
―「내가오뱅이었던때」부분

나는가만히나비눈앞에내려앉아감긴목줄을풀고선그가는목을오래도록쓸어주고싶다.이제라도괜찮다면,지금이라도날아가라고말해주고싶다.작고소중한너를한없이쓸어내려주고싶은마음,사랑이아니라면어느별에서나볼까.
―「녹두와나비」부분

날이선백지를천천히넘기다결국
맨뒷장에하나적게되는것이다
이름이필요한이유다
일기를적지않을것이다
고통을많이배우면쉽게용서하게된다
문간의제웅처럼말없는네입속에고통을적어넣는다
헤진눈이검게흐른다
실선을이어붙이면절취선,
진눈깨비가사방을홀리고있었다
―「예보」부분

화원은메말라있고
화원火源은누구인지모른채
들녘이있는도로를가로지르면멀리불타는냄새
가을도아닌데벌써난
그냄새가좋은거다답답해,
네가슴을때리며죽을것같아당신은말했지
안아달라는말이아니라
떠나달라는말도모르게
가을이오겠다
―「벽제」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