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

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

$13.00
Description
이상하지 않으세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다들 이렇게 웅크려 소리낸다는 것이
2014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전욱진 시인의 신작 시집 『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이 난다시편 세번째 권으로 출간된다. 3년 만에 발표하는 이번 신작은 그의 두번째 시집으로서 시 50편을 5부로 구성해 싣고 시인 전욱진의 편지와 대표작 「초생Crescent」을 정새벽(Jack Saebyok Jeong)의 번역으로 영문 수록했다. 삶이 네게 레몬을 주면, 그걸로 레모네이드를 만들라는 널리 알려진 격언을 인용하며 시인은 편지를 시작한다. 레몬을 받았을 때 그걸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가짐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시집 속에는 세상에 쥐여준 레몬을 어찌할 줄 모르다 한입 베어 물게 된 사람이 많이 나온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 지나온 삶이 대관절 어땠길래 내 손에 이런 게 쥐어졌는지 따져보는 이들이. 시인은 한 시절을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조차 데면데면 굴다 작별 인사 없이 떠나보낸 날을 돌아본다. 그들이 갓 떠난 자리 그 움푹한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는 일,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며 나름 크게 혼잣말하는 일. 그리하여 안과 밖을 미약하게나마 연결시키는 일. 시인은 이 모든 걸 “시를 쓰다”란 말로 축약하곤 한다(전욱진의 편지).

삶이 장만해놓은 여러 가능성을 지나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식당에 다다른다

방에 에어컨을 설치하기 위해 나이가 지긋한 남자와 여자가 도착했다. 아웅다웅 옥신각신 티격태격 이러니저러니 실랑이하며 기계를 놓으려는 부부는 꿈에서 화자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았다며 둘의 어깨를 두들기고 손발을 주무른다. 여름 지나면 다 같이 여행을 가자기에 여행은 무슨 여행이냐며 심통을 부렸지만 어느 날 저녁 불어오는 바람은 썩 차가워 가기로 한 섬의 모양을 그려보기도 했다(「풍향」). “낮과 밤을 길러 배웅하던 타이가의 침엽수들/수평선과 지평선 구름이 추는 트로이카/은 쟁반 같았던 바이칼 호수의 마음 없음”(「러시아의 풍경 묘사」)처럼, “이 모든 게 꿈인 줄 모르고”(「가든파티」). 현실이 더는 무엇인지 모르겠는 때에 현실은 그냥 한 무더기 저녁이 된다. “잘 삶은 달걀이 정확히 반 개/고추장 양념에 버무린 명태회/잘게 부순 김이랑 얇게 저민 오이/참깨 빻은 것하고 참깨로 짠 기름/살얼음이 뜬 시고 단 동치미 국물”(「강릉 해변 메밀막국수」) 같은 것 말이다. 깊은 밤 홀로 침실을 나와 조용히 식탁 앞에 앉으려고 할 때, 시인은 말한다. “그때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보다 더 작은 어두움”(「스웨덴 가구 매장」)이라고.

겨우 짜맞춘 그릇은 언제나
수업이 끝날 즈음 다시 부서졌다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이가
그곳에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멍하니 서서 불붙은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킨츠기 수업」). 벽난로 속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 금방 들어온 눈송이들이 죽는다(「습설」). 기다리는 자리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마음뿐이고,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죽음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시인은 잠깐 할말을 고르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르는 누군가가 건넨 그때 그 빵의 맛과 온도에 관해서, 혹은 반쯤 베어 문 절망을 쥐고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의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나 어렴풋한 그늘/누구도 잘 쉬지 못하지만//목에 줄을 매단 채 비틀대며/도로변을 걷고 있는 저 개를/당신이 쓰다듬어주면 좋겠다”(「무주」)는 마음으로.

넌 이런 삶도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난 이 한가로운 짐승들을 지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던 녀석도
이 가운데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관둔 이유는 아마 사랑이었을 거야

넌 지그시 웃는 얼굴이었고
난 그런 삶도 분명 있을 거라 여겼는데
_「사슴농장 견학」부분
저자

전욱진

저자:전욱진
2014년『실천문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여름의사실』,산문집『선릉과정릉』이있다.

목차

시인의말005

1부슬픔이코고는소리
해빙기010
해루질012
피아노레슨014
피부와마음016
풍향018
풀베개020
폐문022
파주024
파스토랄026
티후아나기념품가게028

2부능소화지는구나
킨츠기수업032
키친034
초생036
지는038
중정040
저수지휴게실042
자카르타044
자전거버리기046
원앙048
양양050

3부인간을관둔이유는아마사랑이었을거야
습설054
스웨덴가구매장056
솜털오리들058
스탄게츠060
사랑의유람선061
선릉과정릉062
사월064
사슴농장견학066
사랑의바깥068
봉합070

4부저세상이있다면야모르지
복원074
방공호076
밤에레몬을하나먹으면078
믿는사람080
물방울무늬와달빛082
무주084
마들렌086
러시아의풍경묘사088
돌아온이야기090
다시봄꿈091

5부이모든게꿈인줄모르고
높은희망094
나는096
곶098
개종100
개의마음102
강릉해변메밀막국수104
감은빛106
가장기억에남는108
가난111
가든파티112

전욱진의편지115
Crescent―TranslatedbyJackSaebyokJung119

출판사 서평

난다시편을시작하며

손에쏙들어오는시의순간
시를읽고간직하는기쁨,시를쥐고스며보는환희

1.
2025년9월5일출판사난다에서시집시리즈를시작합니다.시를모아묶었음에‘시편(詩篇)’이라했거니와시인의‘편지(便紙)’를놓아시집의대미를장식함에시리즈를그렇게총칭하게도되었습니다.난다시편의라인업이어떻게이어질까물으시면한마디로압축할수없는다양한시적경향이라말을아끼게되는조심스러움이있습니다.그러나모든것이시의대상이될수있고또모든말이시의언어로발산될수있기에시인에게그정신과감각에있어다양함과무한함과극대화를맘껏넘겨주자는초심은울타리없는초원의풀처럼애초부터연녹색으로질겼다고감히말씀드리고싶은단호함은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캐치프레이즈는“시가난다wingedpoems”입니다.날기위해우리가버려야할무거움은무엇일까생각했습니다.날기위해우리가가져야할가벼움은무엇일까생각했습니다.바람처럼꽃처럼날개없이도우리들몸을날수있게하는건시가아닐까생각했습니다.사랑처럼희망처럼날개없이도우리들마음을날수있게하는건시가아닐까생각했습니다.하여온전히시인의목소리만을담아내기위한그릇을빚어보자하였습니다.해설이나발문을통한타인의목소리는다음을기약하자하였습니다.난다는건공중에뜰수있다는무한한가능성의말이니여기우리들시를거기우리들시로그거처를옮김으로언어적경계를넘어볼수있겠다는또하나의재미를꿈꿔보자하였습니다.시집끝에한편의시를왜영어로번역해서넣었는가물으신다면말입니다.시인의시를되도록그와같은숨결로호흡할수있게최적격의번역가를찾았다는부연을왜붙이는가물으신다면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두가지형태의만듦새로기획했습니다.대중성을담보로한일반시집외에특별한보너스로유연성을더한미니에디션‘더쏙’을동시에선보입니다.“손에쏙들어오는시의순간”이라할더쏙.7.5×11.5cm의작은사이즈에글자크기9포인트를자랑하는더쏙은‘난다’라는말에착안하여디자인한만큼어디서든꺼내아무페이지든펼쳐읽기좋은휴대용시집으로그만의정체성을삼았습니다.단순히작은판형으로줄여만든것이아니라애초에특별한아트북을염두하여수작업을거친것이니소장가치를주기에도충분할것입니다.시를읽고간직하는기쁨,시를쥐고스며보는환희.건강하게지저귀는난다시편의큰새와작은새가언제어디서나힘찬날갯짓으로여러분에게날아들기를바랍니다.

책속에서

내게대답하는와중에도
그는허리를숙여개흙을뒤졌다
대강보아도수완이좋아보였다

그때멀리서호루라기소리가들려왔고

내귀에물이들어오기시작했다
그의왼손에든랜턴의빛은바빠졌다

그빛기둥이눈꺼풀을스쳐지난순간
어쩐지살아나야겠다는마음이들었고
_「해루질」부분

그런데이렇게나작아지는걸보면
마치사라지기를바랐던거같은데
왜아주사라지지는않을까
그게나는항상의아하고

누군가의손에들린
사소한내모습도이세상
어딘가에있다는생각이
자주나를웃게하고
_「피부와마음」부분

같이좋아하는음악을재생하면
이시가시작된다

이렇게간단해도되는걸까내가물으면
이렇게간단해도되지그사람이답하고

내삶은알몸으로밖을배회한다
자긴아무것도숨기지않는다고
처음부터숨긴적없다고
_「스탄게츠」부분

오염없이맑고환하기
향기퍼뜨리기
따스하면서보드랍기

사람은원하니까그리고
그렇게되는과정을
저리도투명하게

위잉
위잉

모르는이와나란히앉아

사람의마음을알수없다는
자명한사실에놀라워하며
_「솜털오리들」부분

아내와아이들그리고이웃이깨지않게
느지막이나지막한소리를내기위해
현을튕기는데쓰는플라스틱쪼가리대신
오른손에붙어있는첫손가락을사용하여

안에서바깥으로부드러운피부가
하나하나자아내는소리를떨림을
그를사랑하는모든것이잠든시간
_「물방울무늬와달빛」부분

그렇다고불가능한맛을자아내는방식은아니고
매일아침직접기계로뽑는메밀국수가락정도
그러니까그저앞니아랫니만으로툭툭끊어
삼킬수있는정도

그렇게삼킨다해도
발목을적시는물결의감촉이느껴지거나
파도소리가귀에들린다거나하지는않는
그러니까불가능을이야기하는방식이아닌

이기분좋은단맛은역시매실청일것이다
_「강릉해변메밀막국수」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