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렁과 기웃거림 (이원의 산책전면개정판)

어슬렁과 기웃거림 (이원의 산책전면개정판)

$16.00
Description
어느 때는 샅샅이, 어느 때는 듬성듬성
이는 시인 이원의 기묘한 산책기!

산책은 지도를 들고 길을 잃는 풍경.
산책은 침묵의 안쪽, 어떤 외마디 길.
산책은 눈이 등에 가 있는 셈.
기억은 어디에서 흘러나오는가.
기억을 산책하는 일,
잃어버린 시간은 마지막까지
잃어버릴 수 없는 시간이다.

1992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현대시학작품상, 현대시작품상, 형평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 이원의 산문집 『어슬렁과 기웃거림』이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된다. “발 없는 마음에 발을 달고”(『물끄러미』, 2024, 난다) 지도를 들고 길을 잃어버리는 재미를 찾으며 글을 써온 이원 시인의 산책기 69편을 6부로 엮은 책이다. 시인에게 산책은 침묵의 안쪽. 어떤 외마디 길. 또한 시인을 간명하게 만들어주는 일. 산책은 시인을 간명해진 몸으로 삶 속에 머물게 하며 빛이 사라지지 않게 해준다. 시인에게, 산책 예찬, 또는 산책에의 매혹이 어떻게 계속 지속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나를 벗어나는 나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라 답한다. ‘목적 없이 걷기’는 내가 나를 벗어나는 행위의 반복. 산책이란, 유용에서 무용으로, 일상에서 일상 너머로 걸어보는 일이다(「새벽을 향해 걷기」). 이른 아침 인적이 드문 길을 걸을 때, 동은 텄지만 데워지지 않은 아침의 진관사까지 이르는 길이 좋았다. 소나무로 폭 싸인 진관사. 집에서 나와서 거기로 가는 동안 하나씩 하나씩 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진관사에 이르렀을 때 가벼웠다(48쪽). 그렇게 산책하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혼자로 돌아간다는 것. 문을 닫으면 적막이 찾아온다는 것. 적막 속에 빛을 켤 수 있다는 것. 다만 그 빛은 밖의 빛과 동일하다는 것. 웅크리고 잠든다는 것. 동네는 한 마리 고슴도치 같다는 것. 같은 햇빛 속 뾰족뾰족한 바늘이라는 것과, 나는 그 바늘 중 하나라는 것. 그러한 돌아옴에는 고독. 고독보다 큰 연대가 있다(39쪽). 그러므로 시인에게, 어떤 것을 잊고, 잃고 싶을 때, 고요해지고 싶을 때, 벗어났다 다시 일상이라는, 유용이라는 제자리로 돌아오고자 할 때, 최종의 결심은 “산책하자”. 어느 때는 작정하고 샅샅이, 어느 때는 듬성듬성.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어슬렁과 기웃거림.
소환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환원되는 시간이 있다. 잊히지 않는 시간이 있다. 보내지 않았고 보낼 수 없고 보내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눈빛은 오로지 내게 한 방향을 가리킨다(176쪽). 그런 식으로 무언가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 시인은 무수한 속도와 번짐과 시간을 역행하며 시간을 온전하게 만나게 된다(164쪽). 지금,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을. 시인에겐 시를 쓸 때, 언제나 ‘지금, 여기’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현존이라는 그 뜨거운 말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얼마나 위태로운 시간인가를 알아버렸고, 그 위태로운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늘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라진 그 시간들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아 있는 기시감 같은, 몇몇 기억이라는 것을 내가 경험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태어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시간이라면, 사라지지 못하는 시간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138~140쪽) 그리 질문을 던지며. 사라진다는 건 생이라는 시간을 받치고 있는 유일한 받침대이므로, 시인은 나타나는 순간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시간의 풍경을 시를 씀으로써 포획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세계의 안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겠다는 그의 열망이자, 세계의 안쪽을 향한 한없는 걷기와도 같다(「저물녘에 쓰는 편지」).
저자

이원

이원│1992년『세계의문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그들이지구를지배했을때』『야후!의강물에천개의달이뜬다』『세상에서가장가벼운오토바이』『불가능한종이의역사』『사랑은탄생하라』『나는나의다정한얼룩말』,산문집으로『최소의발견』『시를위한사전』『물끄러미』가있다.현대시학작품상,현대시작품상,형평문학상등을수상했다.서울예술대학교문예학부에서시창작수업을하고있다.

목차

들어서며새벽을향해걷기011

1⋮기억은어디에서흘러나오는가
가장자리016
갈망019
거두절미022
기억024
같은027
골목028
광장029
굽은030
기도032
극단036
귀환038

2⋮그때나는죽은사람을따라가고있었다
꿈042
닿는045
나무046
낮은052
노래056
너머058
되다060
딱딱063
뒷길066
둥068
등070

3⋮우리는거기에살지않는다
막다른074
먼077
묘지078
무덤084
물꿈086
발견088
부끄러움090
불생불멸092
블라인드095
빙빙098
사람100
사랑102

4⋮오른발과왼발사이,당신과나사이
사이106
상세108
설렘110
순간113
스텝퍼114
스무살118
아해121
앞으로124
어슬렁어슬렁126
시장128
애틋130
슬픔134

5⋮세상에나와첫산책은엄마와했을것이다
얼굴138
엄마141
여행144
울음146
월요일148
엄마손151
월정156
이상161
작게164
작은166
자문168

6⋮너는가고있어라
제멋대로172
지향174
창176
질주178
천진181
침묵184
턱턱186
토닥토닥188
헌신190
흙냄새192
큰길194
홀연195

나아가며저물녘에쓰는편지199

출판사 서평

엄마는하루에한번꼭산책을간다.
걸어야얼굴이밝아지는사람이다.
나도그렇다.
세상에나와첫산책은엄마와했을것이다.

어느여름날,엄마는그날도산책나가고시인혼자마루에누워있다가설핏잠이들었는데,그는그곳에서어린엄마와나를보았다.우리는함께허공의반달에나란히걸터앉아있었다.낮도아니고밤도아닌사방은푸른빛이었다.이렇게조그만데어떻게엄마가되려고해?어린시인이물었다(30쪽).엄마와의첫산책에는풀도바람도구름도하늘도함께했다.“이것봐”하면엄마는신기하게그것을함께보고있었으며,구름을손으로가리키면이미구름을잡아두고있었다(146쪽).그것은최초의혼자걷기.그때시인은,엄마있는소리가나면거기로갔다.엄마의두손을믿었을것이다.아니믿기이전엄마가그곳에있었다(142쪽).그러니,엄마와목적없는산책을자주해야겠다.최소한은꼭해야겠다.그리마음먹는다.엄마가굽은허리로펴지지않는무릎으로마른몸으로걷다가“이꽃좀봐”그럴때,내가애기때엄마가그랬던것처럼이미보고있는시선이되어야겠다.엄마의산책어딘가에그늘을가진나무로,나무의바람으로있어야겠다(31쪽).그렇게엄마와산책을나서는시간은천천히걸어야한다.엄마는뒤에서따라온다.시인은누군가에게등을보이는것에예민하다.등은벗어나는순간을가지고있기에.또한등은헤어지는순간을내포하고있기에(70쪽).엄마가앞에가,시인이그리말해도엄마는한사코그를앞세우고한두걸음뒤에따라온다.나란히걷고있으면어느새뒤에가있다.시인이빨리걸었는지엄마가더느리게걸었는지는알수없다.엄마가점점멀어지는꿈을꾼적이있다.내가모르는사이내등뒤에서멀어지는엄마를보게되는것은얼마나무서운것인가.엄마는등을보고따라온다.등에눈이달린다는말을알듯도하다(191쪽).그러므로,산책은눈이등에가있는셈.
헤어지고나서뒤에서오래지켜보는사람은헤어지는사람에게마음이많이와있는사람,누군가를알고싶다면등을보면안다.헤어지고난뒤의등은얼굴보다훨씬더많은,솔직한표정을보여준다(71쪽).그러므로선생님들이가신너머를생각하지않는다고는말할수없다.그곳이자주궁금하다.선생님들께바싹붙어있었던시인에게너머라는공간이생겨났다는것.선생님들은이곳을어떻게넘어가셨을까.이곳에서저곳사이무엇을보며건너가셨을까.소리하나없는침묵으로내게무엇을보라고하셨던걸까(59쪽).태어나고자라고다시소멸해가는방향을‘자연(自然)’이라고하는데,‘자연’은‘그스스로그러하다’는자족(自足)의방향을이미내장하고있다는것인데,그렇다면그곳은가장끝이아니라가장처음은아닐까.처음으로돌아가는것이라면,처음부터시작되는시간이다시있는것일까(139쪽).다만내가원하는사람이어디있는지계속모르는것이야말로,시인을살게하는어떤힘이되기도한다(101쪽).알지못한채로,오지않은시간에먼저가보는것.한번이고두번이고세번이고가보는것.있지도않은시간에가보는것.그보다먼저그의먼시간에가보는것.가서살이타고뼈가타는것을경험하는것.그리고혼자간길을혼자돌아오는것,사랑의안쪽으로걸으며,무수하게걸으면서(102쪽).

지금어두운제몸을통과하는제언어는불투명하고가라앉지도않았습니다.이어둠속에서밝음과나직하게몸을바꾸는시간은아직생각해볼수도없습니다.그러나어둠의대척점으로서밝음을기다리는것이아니라어둠의몸인밝음을기다리다보면어느순간저물녘처럼가장나직하며가장격렬한언어를갖게되리라고생각합니다.
선생님,제눈앞은어느덧어둠으로가득차있습니다.어둠은출렁이지않아창에제얼굴이흐르지도못한채떠있습니다.그러나어둠은얼굴을제안에새기는것을늘잊지않습니다.선생님께편지를쓰기시작할때는무겁게쓰지말아야지했는데,써놓고보니비장하기까지합니다.이런제자신이못마땅하지만,그러나바로여기가,제몸이,제언어가서있는지점입니다.(…)
저는여전히저물녘이되어서야편지를쓸수있을것입니다.그날도제몸은언제나처럼밝음과어둠이몸을바꾸는경이의순간이어떻게저토록나직할수있을까라는의문에휩싸여있을것입니다.
_「저물녘에쓰는편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