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시인이자 소설가, 탐사작가 정철훈의 필생의 역작!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분단과 이산의 가족사를 넘어 민족사 전체의 차원으로 복원해내다.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분단과 이산의 가족사를 넘어 민족사 전체의 차원으로 복원해내다.
남과 북, 그리고 카자흐스탄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던 선대 예술가, 3형제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한 정철훈 작가의 필생의 역작이 출간되었다.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작가 간)은 광주광역시 출신의 음악인 정추(1923~2013)의 90년 인생역정을 추적, 탐사한 평전으로 저자는 3년간 노고 끝에 원고지 3500매 분량의 평전을 완성했다. 2024년 ‘박인환상’ 수상자인 정철훈 시인은 그동안 다수의 시집과 소설집을 출간했으며, 탐사작가로서 『백석을 찾아서』, 『김알렉산드라 평전』, 『오빠 이상 누이 옥희』, 『내가 만난 손창섭』등을 펴낸 바 있다.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은 2022년 6월과 7월에 각각 출간된『북한 영화의 대부 정준채 평전』(선인 간)과『정근 전집』(전3권, 작가 간)에 이어 분단과 이산의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민족사 차원으로 복원한 저작이기도 하다. 정준채는 저자의 부친 정근의 큰형이며, 정추는 둘째 형이다.
정근(1930∼2015)은 국민동요 〈텔레비전〉, 〈둥글게 둥글게〉, 〈구름〉, 〈우체부 아저씨〉 등을 작사 작곡했으며, KBS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 KBS 〈모이자 노래하자〉, 〈TV유치원 하나둘셋〉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로 활동한 우리 동요의 선구자였다.
정준채(1917∼1980 추정)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도쿄에 유학, 일영영화사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민족전선〉을 제작하기 위해 월북했다. 그 후 평양의 ‘국립 영화촬영소’ 제작부장 겸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영화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북한 최초의 기록영화 〈우리의 건설〉, 〈민주선거〉, 〈국제여성절〉 등을 연출했고, 1950년 체코슬로바키아 ‘카를로비바라 국제영화축전’에 출품한 〈친선의 노래〉로 ‘최고기록영화상’을 수상했다. 또 1956년 무용가 최승희 주연의 북한 최초의 컬러 극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의 연출가로도 활동했다.
정추의 가계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희곡작가인 고모부 김우진과 광주 양림동 외조부인 양파 정낙교, 그리고 그의 세 아들인 병호, 상호, 석호로 확장된다. 이 가운데 정석호는 1920년대 독일 베를린 음악원에서 공부한 성악가로 소년 정추에게 음악적 영향을 준 인물이다.
정추는 광주고보 재학시절, 일본어 상용을 거부해 15번이나 정학 처분을 받았고, 교련교육 반대와 일본인 교련 교관을 무시한 언행으로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에 정추는 손기정을 배출한 양정고보로 편입해 졸업한 후 일본대학 예술학부 작곡과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1945년 1월, 오사카로 징병되어 노동부대원으로 복무하다가 일제패망 후인 1945년 8월 31일, 현해탄을 건너 귀향할 수 있었다. 광주로 돌아온 정추는 광주고교 국어 선생으로 부임해 1946년 ‘국자신론(國子新論)’이라는 한글 가로쓰기 운동을 펼친 송필수 선생 등과 ‘국자개정동맹’을 결성해 간사로도 활동했다.
1946년 정추는 작곡가 나운영과 함께 경성에서 〈민족음악협회〉를 결성했으며, 월북 이후 평양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 평양음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월북음악인 김순남, 정율성 작곡가 등과 교류했다. 1952년 1월, 모스크바유학 7기생으로 선발되어 ‘차이코프스키 명칭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한 정추는 소련의 저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박사를 지도교수로 6년간 작곡을 공부했다.
정추는 1956년 작곡한 첫 오케스트라 교향곡 〈조선적 주제에 의한 교향조곡〉(1956)을 통해 소련음악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1956년 2월, 스탈린 사후 3년 만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 청산을 위한 비판 발언을 함으로써 큰 파장이 일어났다. 이른바 흐루쇼프에 의해 찾아온 ‘모스크바의 봄’을 계기로 정추는 1957년 10월, ‘모스크바광산대학’에서 열린 재소 북한유학생동향회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발언을 주도하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1958년 8월 모스크바음악원의 졸업작품 발표회에서 하차투랸 등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정추는 모스크바를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알마티에 정착한 1961년 4월,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서 자작곡 〈뗏목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했고, 이 장면은 소연방 전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또 1959년부터 1968년까지 10년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노동가요와 민요 1천여 곡을 직접 녹음기에 담아 채록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정추는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공훈예술인’ 칭호를,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KBS의 ‘해외동포상(예술부문)’을 받았다. 저자는 남한, 북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4개국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사진을 통해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심도 있게 복원해냈다. 가히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은 2022년 6월과 7월에 각각 출간된『북한 영화의 대부 정준채 평전』(선인 간)과『정근 전집』(전3권, 작가 간)에 이어 분단과 이산의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민족사 차원으로 복원한 저작이기도 하다. 정준채는 저자의 부친 정근의 큰형이며, 정추는 둘째 형이다.
정근(1930∼2015)은 국민동요 〈텔레비전〉, 〈둥글게 둥글게〉, 〈구름〉, 〈우체부 아저씨〉 등을 작사 작곡했으며, KBS방송국 어린이합창단 지휘자, KBS 〈모이자 노래하자〉, 〈TV유치원 하나둘셋〉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로 활동한 우리 동요의 선구자였다.
정준채(1917∼1980 추정)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도쿄에 유학, 일영영화사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해방 후인 1945년 11월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의 서기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민족전선〉을 제작하기 위해 월북했다. 그 후 평양의 ‘국립 영화촬영소’ 제작부장 겸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영화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북한 최초의 기록영화 〈우리의 건설〉, 〈민주선거〉, 〈국제여성절〉 등을 연출했고, 1950년 체코슬로바키아 ‘카를로비바라 국제영화축전’에 출품한 〈친선의 노래〉로 ‘최고기록영화상’을 수상했다. 또 1956년 무용가 최승희 주연의 북한 최초의 컬러 극영화 〈사도성의 이야기〉의 연출가로도 활동했다.
정추의 가계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희곡작가인 고모부 김우진과 광주 양림동 외조부인 양파 정낙교, 그리고 그의 세 아들인 병호, 상호, 석호로 확장된다. 이 가운데 정석호는 1920년대 독일 베를린 음악원에서 공부한 성악가로 소년 정추에게 음악적 영향을 준 인물이다.
정추는 광주고보 재학시절, 일본어 상용을 거부해 15번이나 정학 처분을 받았고, 교련교육 반대와 일본인 교련 교관을 무시한 언행으로 퇴학 처분을 당했다. 이에 정추는 손기정을 배출한 양정고보로 편입해 졸업한 후 일본대학 예술학부 작곡과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1945년 1월, 오사카로 징병되어 노동부대원으로 복무하다가 일제패망 후인 1945년 8월 31일, 현해탄을 건너 귀향할 수 있었다. 광주로 돌아온 정추는 광주고교 국어 선생으로 부임해 1946년 ‘국자신론(國子新論)’이라는 한글 가로쓰기 운동을 펼친 송필수 선생 등과 ‘국자개정동맹’을 결성해 간사로도 활동했다.
1946년 정추는 작곡가 나운영과 함께 경성에서 〈민족음악협회〉를 결성했으며, 월북 이후 평양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 평양음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월북음악인 김순남, 정율성 작곡가 등과 교류했다. 1952년 1월, 모스크바유학 7기생으로 선발되어 ‘차이코프스키 명칭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한 정추는 소련의 저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박사를 지도교수로 6년간 작곡을 공부했다.
정추는 1956년 작곡한 첫 오케스트라 교향곡 〈조선적 주제에 의한 교향조곡〉(1956)을 통해 소련음악계에 그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1956년 2월, 스탈린 사후 3년 만에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 제1서기가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 청산을 위한 비판 발언을 함으로써 큰 파장이 일어났다. 이른바 흐루쇼프에 의해 찾아온 ‘모스크바의 봄’을 계기로 정추는 1957년 10월, ‘모스크바광산대학’에서 열린 재소 북한유학생동향회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발언을 주도하고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1958년 8월 모스크바음악원의 졸업작품 발표회에서 하차투랸 등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해 9월 정추는 모스크바를 떠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알마티에 정착한 1961년 4월, 그는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유리 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서 자작곡 〈뗏목의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했고, 이 장면은 소연방 전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또 1959년부터 1968년까지 10년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노동가요와 민요 1천여 곡을 직접 녹음기에 담아 채록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정추는 카자흐스탄공화국에서 ‘공훈예술인’ 칭호를,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과 KBS의 ‘해외동포상(예술부문)’을 받았다. 저자는 남한, 북한,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4개국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사진을 통해 정추의 삶과 예술 세계를 심도 있게 복원해냈다. 가히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카자흐스탄 망명음악가 정추 평전
$5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