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 (박현덕 시집)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 (박현덕 시집)

$12.00
Description


기억의 해안선에서 길어 올린 저물녘의 시학
- 박현덕 시집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

중앙시조대상, 백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역류’ ‘율격’ 동인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박현덕 시인이 신작 시조집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를 작가 기획시선 48번으로 출간하였다.
저자 박현덕 시인은 1967년 전남 완도 출생으로 광주대학교 문창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시조문학》 천료와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조가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 되었다. 시집으로는 『겨울 삽화』 『밤길』 『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 『스쿠터 언니』 『1번 국도』 『겨울 등광리』 『야사리 은행나무』 『대숲에 들다』 『밤 군산항』 『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가 있다.
4부로 나뉘어져 총 65편의 신작 시조를 수록한 박현덕의 이번 시조집은 “기억의 해안선에서 길어 올린 저물녘의 시학”이다. 저녁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처럼, 박현덕의 시는 오랫동안 현장의 먼지와 사람의 체온을 함께 실어 나르며 생의 허기진 머리맡에 도착해 왔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지난 40여 년간 한국 현대시조의 정형 미학을 견지하며 소외된 자들의 곁을 지켜온 파수꾼이었다.
허희 문학평론가는 “박현덕의 서정적 시 세계를 구축한 『겨울 삽화』와 『밤길』에서부터 노동과 소외의 면면을 응시한 『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와 『스쿠터 언니』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늘 변방의 삶을 향한 따뜻한 리얼리즘의 시선을 잃지 않았다. 2026년 봄에 도착한 이번 시집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 역시 일용직 노동자의 고단한 숨결이나 야근조의 바랜 기억을 소주잔에 곁들이는 퇴근길의 풍경을 벗 삼아, 그가 걸어온 생활 중심의 문학적 행보가 여전한 생명력으로 약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는 외부의 기록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예컨대 “안전화를 대충 씻고 늦은 밥을 한술”(「국밥 그릇」) 뜨는 장면은 지친 실존의 증언이자, 삶의 비애를 묵묵히 씹어 삼키는 고독한 진실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평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시집은 흔들리는 스노볼 속 눈송이처럼, 흩어졌던 기억이 한데 모여 시적 장면을 빚어내는 과정의 기록물이라고 할 만하다. 시인은 스스로 “바다를 건너가는 목선 한 척”(「시인의 말」)이 되어, 보이지 않는 내일의 섬을 향해 노를 저어 간다. 견고한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 개인의 상처가 저물녘의 빛을 받아 피워내는 시적 결실은 시조라는 양식이 어떻게 오늘날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상하는 그릇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섬에 닿을 때까지 무릎을 껴안고 / 내일을 기다리련다”(「시인의 말」)는 다짐은 칠흑 같은 밤을 보내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빛 한 점으로 남으리라.
저자

박현덕

1967년 전남 완도 출생으로 광주대학교 문창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시조문학》 천료와 198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조가 199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 되었다.
중앙시조대상 김만중문학상 백수문학상 송순문학상 현구문학상 오늘의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으로는 『겨울 삽화』 『밤길』 『주암댐, 수몰지구를 지나며』 『스쿠터 언니』 『1번 국도』 『겨울 등광리』 『야사리 은행나무』 『대숲에 들다』 『밤 군산항』 『와온에 와 너를 만난다』가 있다. ‘역류’ ‘율격’ 동인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국밥 그릇 13
난파선 14
12월, 눈은 내리고 15
옛집에서 하룻밤 16
사막을 읽는 법 17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 18
금요일의 퇴근버스 19
긴 뱀이 달아난다 20
오토바이 몰고 밤거리를 21
옥상에 올라 비눗방울을 불었다 22
겨울 바다, 밤 8시 23
여름 빗소리는 24
저녁 숲 새들처럼 25
자작나무숲에 내리는 눈 26
다시, 겨울바다 27

2부
상처도 꽃이 된다고 31
사월, 미시령에 눈이 온다 32
어둠이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33
우울은 비를 부르고 34
지붕 위를 걷다가 35
술 취한 밤 36
생의 발자국이 물뱀처럼 지나간다 37
어둠살이 집집마다 뚝뚝 내려 앉는다 38
만 갈래 여울의 봄 39
비가 내리니 작파하고 40
겨울숲은 혼자다 41
개밥바라기 42
우쿨렐레 켜는 밤 43
옥상에 올라 44
새들의 지저귐 45

3부
비양도 저녁 49
숨비기꽃 50
신촌 이야기 51
용눈이 오름 52
가을 한라산 53
겨울 비자림 54
지삿개 주상절리 55
성산에 뜨는 달 56
모슬포 봄밤 57
엉또폭포 58
쇠소깍 이야기 59
따라비오름 61
불새여, 다시 날아라 62
곤을동 63
금오름에 올라 64

4부
바다에게 67
저녁밥 68
폭설 69
칸나 70
시작노트 71
밤의 능선 72
별리別離 73
불빛 한점 74
은빛 생각 75
퇴근 무렵 76
낮은 적막 77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78
자드락비 79
저수지에 함박눈이 80
아파트 81
모래언덕 82
마파람 83
절터에서 84
다비 85
애기무덤 86

해설/ 기억의 해안선에서 길어 올린 저물녘의 시학_허희 88

출판사 서평

그가 열어젖힌 언어의 집 창 너머를 살펴보면 1부는 거칠고 비릿한 노동의 자리, 그곳에서 부유하는 단독자들의 고뇌를 들여다본다. 박현덕 시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화려한 도시의 전면이 아니라, 가로등 불빛마저 잦아든 골목 끝 허름한 식당이나 공단의 탈의실 같은 변방의 공간이다. 시인은 존재의 근원을 잠식하는 비정규 노동의 압박감을 “종이상자 택배처럼 저만치 던져지는 / 일용직 세상살이”(「국밥 그릇」)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는 익명의 개체로 형상화한다. 이러한 고립감은 물리적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해 인간의 존엄이 물신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림자를 반영한다.
노동이 결실이 아닌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고, 점점 그러한 자신이 사회적 관계망에서 지워지는 “투명인간”(「12월, 눈은 내리고」)이 되어버리는 현실. 시인은 여기에 기술 문명의 기호를 도입하여 시조의 외연을 확장하기도 한다. 같은 시에서 시적 주체는 파편화된 기억을 정돈하기 위해 “물어나 볼까 챗지피티, 그에게”라고 읊조리고, 인공지능이 부상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고유한 사유와 감각마저 데이터의 파편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전한다. 고독은 타인의 부재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침과 분침 사이 추억이 된 문장”조차 기계적 연산에 의지해야 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생존 전략과 오버랩된다.
2부는 1부에서 노정한 노동의 고단함이 개인의 가족사라는 심부로 침잠하여 어떠한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지 탐색한다. 시인은 공단의 소음 대신 내면의 맥박에 귀 기울여, 생의 옹색한 그림자 뒤에 숨겨진 시린 면면을 하나둘 호명한다. 상처는 아프지만, 파괴된 흔적이나 지워야 할 얼룩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를 깊게 파 내려갈 수 있는 통로이자 새로운 생명력을 잉태하는 토양으로 정의된다. 2부의 주제 의식을 집약한 「상처도 꽃이 된다고」가 그러하다.

가으내 마음 우물 무장토록 깊어져서
혹독한 도시 생활 두레박이 빙빙 돈다
하루 끝 버스 유리창 옹색한 내 그림자

작업복에 내려앉은 시꺼먼 기억처럼
야근조 십 년째에 생각도 바래졌다
퇴근길 돼지국밥에 곁들인 소주 몇 잔

스프레이로 갈겨쓴 빛 좋은 행복 추구
귀 얇은 소문들을 술잔에 부어가며
꽃 필 날 있을 거라고 어머니께 띄운 안부
— 「상처도 꽃이 된다고」 전문

이 시에서 “마음 우물”이 깊어지는 과정은 외부에서 가해진 고통을 수동적으로 인내하는 단계를 넘어, 그것을 내면화하여 성찰의 자양분으로 삼는 정신적 성숙과 연결된다. “혹독한 도시 생활 두레박이 빙빙 돈다”는 시구는 생존을 위해 길어 올려야 하는 일상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을 뜻한다. “야근조 십 년째”라는 시간이 노동의 양적 기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시적 주체의 생각을 닳게 하고, 기억을 시꺼멓게 물들인 소진과 결부된다. 시인은 작업복에 스며든 빛바랜 자취를 직시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시스템에서 서서히 탈색되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낀다. 그러나 시인은 절망적 상황에 좌절하기보다, 그 자리에 “꽃 필 날 있을 거라”는 희망의 안부를 어머니에게 전한다.
“상처도 꽃이 된다”는 아포리즘은 비참한 현실을 가리는 값싼 위로나 미봉책이 아니다. 이는 삶의 비극성을 숭고함으로 전복하려는 박현덕 시의 특징과 연관된다. 시인은 “스프레이로 갈겨쓴 빛 좋은 행복 추구”와 같은 표피적 위안을 거부한다. 대신 그는 퇴근길 소주 몇 잔에 섞이는 “귀 얇은 소문들”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아픔의 심연에서 비롯한 언어로 자기 구원의 길을 모색한다. 이 시는 안으로 피 흘리는 단독자가 본인의 심상을 꽃의 영토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깊은 곳을 파 내려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연금술과 같다. 노동의 거친 손마디 사이로 피어나는 가냘프지만 끈질긴 생의 의지가 귀하다는 뜻이다.
3부에서 박현덕은 개인의 내면과 가족사로 향했던 연민의 방향을 선회하여, 국가 폭력이 휩쓸고 간 공동체의 참혹한 상처를 응시한다. 시집에서 표상되는 제주의 바다와 바람은 한가로운 자연 풍광이 아니다. 수십 년 동안 발화되지 못한 채 억눌려 있던 망자들의 비명을 품은 기억의 저장소로 환기된다. 시인은 관광지로 소비되는 환상의 섬이라는 기호를 탈구축하고, 4·3이라는 야만적 사건이 섬의 지형과 주민들의 육체와 정신에 어떻게 화석처럼 굳어졌는지를 탐색한다. 개별자의 비애를 시대의 증언으로 확장하는 시도는 서사적 깊이와 역사적 책무를 감당하려는 문학적 분투의 산물이다. 아래 시가 3부에 드리워진 분위기를 집약한다.

무섭도록 고요하다
파도조차
잠든 이 밤

손 흔들며 물 위 걷는
수면 아래
낯선 이름

사월에 꽃 진 흐느낌
모래로
쌓여있다
— 「곤을동」 전문

이 작품은 토벌대에 의해 전소된 곤을동의 텅 빈 장소성을 제재로 삼는다. “무섭도록 고요하다 / 파도조차 / 잠든 이 밤”의 적막은 자연의 평화로운 상태가 아니다. 폭력이 모든 생명 현상을 소거한 후의 진공 상태. 비장소의 공포를 구현한다. 생명의 맥박을 상징하는 파도마저 잠든 밤바다에서 시적 주체가 마주한, “손 흔들며 물 위 걷는 / 수면 아래 / 낯선 이름”들은 무명의 희생자들이 존재의 승인을 요구하며 귀환하는 유령론적 풍경이다. 그는 대상과 거리를 둔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수면 아래 잠긴 손짓에 응답함으로써, 폭압에 의해 은폐된 부재의 흔적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끌어당긴다. “사월에 꽃 진 흐느낌 / 모래로 / 쌓여있다”면서 4·3의 참극을 낙화로 은유하고, 망자들의 통곡이 해변의 모래알 같은 물성으로 축적되어 있음을 지시한다.
3부의 시편들은 인간의 폭력이 남긴 상흔을 대자연의 순환 질서와 연동하는 확장을 보여준다. 제주의 자연은 수동적 객체가 아닌, 역사의 참상을 증언하며 연대하는 능동적 주체이기도 하다. “큰북을 두드리듯 세찬 비 퍼붓는다 / 분화구에 가득 채운 투명한 슬픔인가”(「용눈이 오름」). 이 시에서는 오름에 내리는 폭우를 “투명한 슬픔”의 응집체로 치환하고, 대지가 인간의 비극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절경으로만 여겨지는 주상절리를 “무자년 수만 수천 슬픔의 돌을 쌓아”(「지삿개 주상절리」) 올린 통곡의 묘비로 파악함으로써 애도의 제단으로 변모시킨다. 섬의 내밀한 상처의 단층으로 하강하여 그와 공명하려는 작품은 4부의 ‘저물녘 연작’이 펼쳐낼 생성과 소멸의 철학적 담론으로 이행하는 단단한 토대가 된다.
4부는 ‘저물녘’이라는 부제가 부여된 20편의 연작으로, 삶과 죽음의 순환이라는 보편적 존재론으로 사유를 심화한다. 저물녘은 자전하는 지구의 회전이라는 물리적 시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상처 입은 개별자들이 삶에 가해지는 압력으로부터 대자연의 질서로 귀환을 준비하는 임계점으로 읽힌다. 연작의 서두를 여는 「바다에게」는 황혼의 바다를 응시하며 붉은 낙조에서 생의 기원을 발견한다. “선창 술집 마루에서 / 바다에 따르는 술”은 척박한 생의 격랑을 온몸으로 견뎌낸 뭇 생명들을 향한 헌주獻酒이다. 수평선을 물들이는 저녁의 붉은빛은 “평생동안 상처받은 / 그 몸 속 고인 물”, 내상을 입은 존재들이 침묵하며 흘려보낸 피울음이 융기한 결과물로 해석된다.
박현덕은 저물녘 연작에서 생성과 소멸의 틈새를 횡단하는 원숙한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 그는 다가오는 어둠을 도피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심연으로 걸어 들어가 상처 입은 세계를 씻어내는 의식을 집행한다. 현대 시조의 형식은 이와 같은 방대한 철학적 사유와 격렬한 비애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는 제방의 역할을 수행하고, 함축성을 지향하는 언어의 조탁을 통해 시적 의미를 다층화하는 데 성공한다.
박현덕 시인의 신작 시조집 『스노볼을 흔들면 당신이 떠오르고』는 현실의 누추함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트라우마를 관통하고, 삶과 죽음의 입체성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치열해서 서글프고 아름다운 시적 도정이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