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전체로 시야를 넓히면, 『무채색의 가을』은 붉음과 무채색, 열기와 고요, 상처와 귀환 사이를 오가며 존재의 결을 다듬는다. 「꽃무릇」에서 ‘피가 아니라 뜻이 번진다’고 말하듯, 감각적 이미지들은 관념으로 환원되지 않고 육체적 체온을 지닌 채 사유로 확장된다. 「길」에서는 “없는 길을 한 걸음 또 한 걸음 열어간다”는 선언을 통해, 삶이란 이미 주어진 노선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만드는 행위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유는 표제작에서 강이 바다를 향해 흐르듯 꺾이지 않는 방향성으로 재확인된다.
이기성의 시는 과장되지 않는다. 대신 절제된 언어로 깊이를 만든다. 문장은 길지 않으나, 이미지 사이의 여백이 넓다. 그 여백에서 독자는 각자의 기억을 불러낸다. 무채색의 시간은 곧 독자의 시간이 된다.
결국 『무채색의 가을』은 상실의 계절을 통과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다. 화려한 색을 잃은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숨 쉬고, 상처 입은 강도 자세를 잃지 않으며, 작은 풀벌레 소리 하나가 계절을 일으킨다. 이 시집은 말한다. 가장 깊은 색은 때로 무채색 속에서 태어난다고.
무채색은 끝이 아니라, 다시 물들기 전의 가장 고요한 순간이다.
-박우담 시인의 발문 중에서
달에게 묻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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