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진길자 제7시조집)

신호등 (진길자 제7시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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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진길자 시인의 제7시조집 『신호등』이 열린출판에서 출간됐다. 이번 시조집은 삶의 여정을 “잘 살아낸 이야기”보다 “버텨낸 시간의 결”로 바라보며, 말과 말 사이의 간극과 드러나지 않는 삶의 무늬를 시조의 정제된 형식 안에 담아낸 작품집이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삶은 늘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되돌아보는 여정”이라고 밝히며, 이번 책을 “짧은 숨, 긴 울림으로, 시조 한 수 한 수를 박음질하듯 엮어”냈다고 적고 있다. 『신호등』은 「물」, 「반가사유상」, 「겨울 나목」, 「신호등」, 「우정의 신호등」, 「주상절리」, 「아, 벚꽃」, 「불타는 산을 보며」, 「화마가 지난 뒤」 등 자연과 일상, 기억과 성찰, 사회적 현실과 내면의 고요를 아우르는 작품들을 수록했다.
표제작 「신호등」은 “나가고 멈출 때를 / 정확히 지시”하는 신호등 앞에서 “적절한 때를 놓쳐서 / 애태우는 나”를 발견하는 작품이다. 일상의 사물을 통해 삶의 선택과 기다림, 멈춤과 나아감의 의미를 되묻는 이 작품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성찰의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조집 말미의 평설에서 김흥열 시인은 향목 진길자 시인의 작품 세계에 대해 “사유의 폭이 넓다”고 평가하며, 시조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예술성을 높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인은 사물의 겉이 아니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작가이며, 작품마다 깊이와 철학, 미학적 성찰이 깃들어 있다고 평한다.
저자

진길자

시인은 1998년 『시조생활』 제37호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한국여성시조문학회 명예회장, 한국산림문학회 부이사장 등을 맡고 있으며, 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강남문인협회 고문,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바람은 길을 안다』, 『쉬어가렴 사람아』, 『렌즈에 비친 세상』, 『모래의 여정』, 『시인의 여행가방』, 『신호등』 등이 있으며, 영역본 『풀잎의 소망』이 있다. 서울문예상, 한국시조문학상, 대은시조문학상 대상, 난대 시조공로상, 한국문협서울시문학상, 시천시조문학상, 산림문학상, 낙강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단시조
물
반가사유상
겨울 나목
콩 꼬투리
신호등
나의 봄날
꽃 시절
제주 돌담
봉사의 힘
나이가 서글퍼
봄날의 꽃
봄맞이
채송화
단풍을 보며
아파치(Apache)족
요세미티(Yosemite) 국립공원
낙화 벚꽃
꽃눈
도토리묵
찻잔 속 공백
치과를 다녀와서
시상詩想을 찾으며
생강나무
부부
허기진 그리움
바위
구직
텔레비전을 끄면서
낙엽
산사 가는 길
나무의 겨울나기
가을바람
고뇌
겨울 숲
세월 속에서
시간의 흐름
큰 나무
은사시나무
겨울 연밭
소리하다
초심으로
내 가을
8월
다시 보면
어느 날
새해 떡국
쉼
비밀의 창
마음 거울
벚꽃 지다
마음의 선택
아쉬움
매화꽃 소식
나무와
나는 왜
말복쯤
오늘은
회상
우정의 신호등
진주알
남한산성 성곽길
나무 되어
적요 寂寥
강물
이월二月
삶의 모자이크


제2부 연시조
주상절리
아, 벚꽃
겨울 모습
봄꽃 지다
가을 정취
빗줄기는 타악기 ㆍ 1
거장巨匠
나팔꽃
본 모습
설산수행雪山修行
숲속에서
과메기
불타는 산을 보며
화마가 지난 뒤
산사에서
밤 풍경소리
첫봄 진달래
강남 탄천 파크 골프장
안경
입춘의 미소
큰 북소리
치자 열매
고사목
겨울밤에
나무야
절간 뜨락에서
짧은 가을
돌아보다
망초꽃
억새 단상
하얀 인생
서대문 형무소
수종사의 아침
볏짚
합장 合掌
빗줄기는 타악기 ㆍ 2
몽골의 초원
꽃의 마음
건널목에서
일상 속에
산란 채취
가을 호수
가을 엿보기
실비에 젖어
길을 찾다가
모순
솔섬 노을에 앉아
모정의 눈
맷돌
시간은
아침노을로 다시 와
에스프레소

평설: 목련이 피는 정원__김흥열

출판사 서평

Ⅰ. 시작하며

향목向木 진길자 시인의 작품집 『신호등』 상재上梓를 축하드린다.
시인은 벌써 여섯 번이나 작품집을 낸 바 있는 화려한 경력의 시인이다. 등단한 경력 또한 사반세기를 훌쩍 넘긴 원로급 시인이다.
시조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까다롭고 격조가 높은 예술 분야이다. 공자께서도 ‘시가 마음 안에 있을 때는 뜻[志]이 되지만 그 품은 뜻이 말로 나타나면 시詩가 된다.’라고 했다. 고려 중기의 시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시詩는 뜻을 세우는 것이 가장 어렵다. 율律은 음의 배열로 맞추면 되지만 시에 심오한 뜻이 담기지 않으면 맛이 없다.’라고 했다.
시조時調는 공자나 백운거사의 말처럼 특히 깊은 뜻이 담겨야만 하는 언어 예술이다. 거기에 더해서 형식이라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내면서 작가가 사유하는 세계나 감정을 실어야 하므로 창작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향목 선생의 작품은 다양한 형태로 현대시조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시조 작품의 예술성은 단순히 형식과 언어의 수사학적修辭學的(rhetoric) 표현만으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사회는 정말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 짜여 있는 공동체이다.
요즘 시중에 나돌고 있는 시조 작품들을 보면 어떤 사물에 대한 설명 또는 수식어의 남용으로 오히려 시조의 본질을 흐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에 반하여 향목 시인의 작품들은 작품에 담긴 뜻과 외형상 나타난 미학적 측면을 모두 살려낸 마술사 같은 재주를 독자들에게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황혼 녘을 즐기는 홍학의 춤사위와 다르지 않다.
향목 시인은 그의 등단 이력이 말해 주듯 강남문인협회 회장과 전국 여성시조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모임이 어렵던 시절에도 강남문인협회를 잘 이끌어 연임을 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 책임감이 강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다고 정평이 나 있는 분이다. 한국여성시조회장을 맡을 당시에도 체제를 정비하고 많은 회원을 유치하여 명실상부하게 단체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도 작품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은 필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루는 신작이라며 「꽃등심」이라는 작품을 보여줬는데 나는 그 작품을 접하는 순간 작가의 심오한 사유의 세계를 재발견하고 감탄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네덜란드의 스피노자가 말했다고 알려진 ‘사과나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나무를 심겠다.” 이 말은 향목 시인의 창작 태도에 잘 어울리는 말이다.
‘시조를 짓는 모든 이가 시조의 정체성을 지키지 않더라도 난 오늘 창작하는 단 한 편의 평시조에 정체성을 심겠다.’
너무나 잘 어울리지 않는가? 난무하는 창작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말이다.
향목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사유하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미학과도 물론 연관은 있겠지만 이보다도 더 심오한 뜻이 담겼을 것 같다. 말마디의 아름다움이나 낯설게 하기의 한 방편으로 언어의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냈겠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작가의 철학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에 상재된 100여 수의 작품도 하나같이 사유의 폭이 넓다. 특히 시조의 정체성을 흐트러짐 없이 잘 지켜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 어느 것 하나 이런 범주를 벗어난 작품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정체성이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해서 작품의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품격을 높인다.
이제 시인이 사유하는 정신세계로 들어가서 작품 하나하나를 파헤쳐보기로 한다.


Ⅱ. 꽃밭 구경

뒤뜰의 감나무가 늦 볕을 받아 안고
연기의 법에 따라 없던 등불 내달 때면
다디단 까치밥보다 만추 향은 더욱 짙다.
-「가을 정취」 둘째 수

이 작품은 의미하는 바가 심오하다. 연기의 법칙이란 불가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의미한다. 윤회의 법칙이며 반야경과도 상통하는 말이다. 연기의 법칙이란 세상 만물은 반드시 어떤 인연에 의해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다.
감나무가 가을 햇살을 받아 안고 노랗게 잘 익은 감을 가지마다 내다는 것은 무에서[空] 나온 유[色]를 만드는 법칙에 따른 자연현상이지만 그냥 자연의 섭리라고 단정 짓는 것이 아니라 더 깊숙이 들어가서 윤회사상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은 반드시 언젠가는 다시 공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음이다.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도 역시 연기의 법칙에 따른 것뿐이다. 만남은 색[色]이요 헤어짐은 공[空]이 아닐까. 작가가 하고픈 말은 색과 공이라는 연기의 법칙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은 감나무 가지에 달린 군침 도는 감이 아니라 존재와 소멸에 대한 연기의 법칙에 머물러 있다. 그렇지만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종장에 ‘만추의 향기’라는 시어를 도입하여 독자의 시선을 묶어두고 있다.
「가을 정취」라는 평범한 소재를 요리하여 이같이 깊은 맛을 내는 글솜씨가 대단하다.

오르막 내리막길
힘겹고 버겁지만

귀를 열고 기다리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연탄이 묻은 얼굴에
백옥 같은 꽃이 핀다
-「봉사의 힘」 전문

이 작품을 접하면서 봉사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봉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강자의 배려이다. 강자가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자를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면 봉사라는 말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 낮은 자세는 가슴 속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처럼 순수해야 한다.
중장에 ‘귀를 열고 기다리는 할머니’라는 표현이 참 아름답다. 할머니 얼굴을 떠올리면 오르막길도 내리막길 같고 얼굴에 묻은 연탄 가루마저도 한 송이 꽃이 되고 향기가 된다.
종장에서 시커먼 연탄 가루를 백옥 같은 꽃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솜씨가 비범하다. 연탄 묻은 얼굴에 피는 꽃은 검은 꽃이 아니라 목련처럼 화사하고 깨끗한 꽃이다. 검은 것이 희다는 비상식적인 논리가 진실이 된다.
시인이 발굴한 시어 하나가 희망이 되고 꽃이 되고 향기가 된다. 어찌 보면 실제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봉사라는 꽃이다. 봉사는 나눔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나눔은 삶의 가치가 된다. 나눌 때의 보람보다 크든 작든 간에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이다.

천만 근 무거운 짐 양어깨를 짓눌러서
뼈마디 어긋나고 살점이 찢길망정
뿌리를 지켜내려는 그 의지가 시퍼렇다.

꺾인 절은 패배 아닌 자식 위한 부정父情이다.
눈밭에 섰다 하여 꿈까지 버렸겠나.
설한풍 몰아친다고 끓는 피가 없겠는가.

흐르는 세월 속에 상처마저 향이 되어
대대손손 전하리라 집안의 가보처럼
설산에 우뚝 선 노송은 수행하는 노승이다.
-「설산수행雪山修行」 전문

이 작품의 주인공은 셋째 수 종장에 등장한다. 작가가 눈[雪] 속에 서 있는 노송을 보고 이를 우리의 삶에 빗대어 쓴 걸작이다.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다. 한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가장의 책임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옛날의 아버지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가장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도 조상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 죽음과 맞바꾸더라도 반드시 집안의 뿌리를 지켜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눈 속에 묻힌 노송의 뿌리는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렇지만 자식을 생각하면 그 뼈저린 고통은 기쁨이 된다.
후손을 이어가려는 노송의 의지는 우리 아버지의 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수에서는 눈 맞아 꺾인 가지는 아버지의 의지가 꺾인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식 사랑에 눈물을 머금고 참아내야 하는 인내라고 생각한다. 굴복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승화시킨다. 중장에서 그 강한 의지가 드러난다.
꿈을 버리지 않는 끈기와 종장에서 말하는 꽁꽁 언 몸이지만 피는 끓는다고 한다. 아버지의 피는 식어서는 안 되는 천부적 소명이다. ‘얼다’와 ‘끓는다’라는 모순된 어법(역설법: oxymoron)을 구사함으로써 작품을 더욱 맛깔나게 만들고 있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이 글을 보며 어떤 절망적인 경우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한다.
셋째 수는 노송을 설산에서 수행하는 수도승으로 생각한다. 부처님도 득도하기 전에 설산에서 6년간을 수행하였다고 한다. 작가가 사유하는 세계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짐작이 간다.
하세월 살아오면서 바람에 찢기고 부러진 상처는 오직 인내와 극기로 극복해 내면 그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 빛나는 훈장처럼 옹이로 박힐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들이여 힘을 내라’는 작가의 외침이 내 귓전을 때리고 간다.
세 수로 된 연시조이면서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문장이 짜임새 있고 간결한 것은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대단함을 입증하는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물안개 핀 산길 따라
발길 멈춘 노인처럼

설악에 안긴 단풍
지난날을 반추하네

성숙은 곱게 타는 것
소리 없이 지는 거다
-「단풍을 보며」 전문

초장의 ‘발길 멈춘 노인처럼’이라는 표현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설악산 단풍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성숙’이라는 시어에 멈추어 있다. 단풍 역시 한 생애의 성숙이고 소리 없이 지는 것도 성숙이다. 작가는 자연현상 속에서 자신을 반추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풍은 어쩌면 작가 자신일 것이다. 따라서 자신도 단풍처럼 곱게 늙어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고 싶다는 소망이 아닐까?

어둠에 싸인 적막 사방으로 둘러치고
면벽 수행 중에 풍경이 울고 있다
아직도 득도를 못 해 애간장이 녹나보다

번뇌 속 바람 소린 설법인 듯 다가와서
애절한 목소리로 법당문을 두드리며
단 한 분 임을 뵈오려 문을 열라 재촉한다
-「산사에서」 전문

이 작품은 철학적 사유를 하게 만든다. 초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