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버넌스 (이론·방법·사례)

거버넌스 (이론·방법·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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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머리말〉

아마도 요즘 거버넌스라는 단어를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버넌스라는 단어는 1990년 이전에는 학술적으로도 자주 사용되지 않는 어렵고 낯선 단어였다. 저자가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은 인디애나대학 “정치 이론과 정책분석 워크숍(Workshop in Political Theory and Policy Analysis)”에서 조교로 일하던 1989년 여름이었다. 한 수업에서 읽었던 당시 워크숍 방문교수였던 오커슨(Ronald J. Oakerson) 교수의 저서인 『지방공공경제 조직(The Organization of Local Public Economies )』은 거버넌스를 “지방공공경제를 작동시키는 규칙과 체계, 즉 지방정부의 수와 유형, 그리고 지방정부 간 관계를 규정하는 헌법적 틀”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지방정부의 행정 체계와 운영 체계를 의미하는 거버넌스의 사전적 정의와 같은 것이었다. 거버넌스라는 단어가 나의 연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될줄은 당시에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후, 거버넌스라는 단어는 기업의 운영 체계를 의미하는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라는 용어의 사용 증가와 함께 관심을 받게 됐다.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거버넌스가 다양한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치(good governance)’와 ‘무능한 통치(poor governance)’ 그리고 ‘사회적 지도 체제’ 등이 당시 한국 언론에서 언급됐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행정학계에서 거버넌스는 민관협력 체계나 수평적 협력을 의미하는 새로운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거버넌스라는 단어의 사용은 급속도로 확산됐다.

그 확산의 속도는 놀라웠다. Google Ngram 데이터를 보면, 1800년부터 1980년대까지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던 거버넌스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는 2000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국내 언론 기사 검색 사이트인 빅카인즈 데이터에서도 거버넌스 관련 기사는 200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해 2024년에는 연간 2만 건을 넘어섰다. 거버넌스는 사회과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념이 됐다. 그러나 인기가 높아질수록 거버넌스의 의미는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유행 초기에는 정부와의 차별성, 수평적 협력과 개혁의 이미지를 앞세우며 협치·네트워크의 의미로 사용됐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사전적 의미인 관리·운영으로 수렴됐다.

거버넌스의 폭발적 인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는 이것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진 행정학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표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부의 무능과 통치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회의, 자발적 협력과 수평적 조정의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새로운 사회문제 해결 방법에 대한 요구 등이 거버넌스에 대한 폭발적 관심과 인기를 촉발했다. 그러나 거버넌스의 인기와 유행은 오히려 거버넌스의 개념적 모호성을 증가시켰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모호한 거버넌스의 정의는 정부 개혁의 실질적 동력을 약화시키고, 오히려 전통적 계층제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거버넌스의 명확한 개념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거버넌스를 사회적 조정(social coordination)으로 정의하고(이명석, 2002), 현실의 사회문제 해결 방법을 계층제 거버넌스(hierarchical governance: H), 시장 거버넌스(market governance: M) 그리고 네트워크 거버넌스(network governance: N) 등 세 가지 사회적 조정 양식의 혼합인 협력적 거버넌스(collaborative governance: CG)로 정의할 수 있다(이명석, 2006). 적절한 사회문제 해결 방법 탐색에서 중요한 것은 세 가지 거버넌스 유형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세 가지 거버넌스 유형을 어떻게 혼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Rhodes, 1997). 즉, 사회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사회문제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계층제, 시장,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최적 수준의 혼합비율(H%, M%, N%)인 ‘가장 적합한 협력적 거버넌스(CG)’를 탐색하고 집행해야 한다(이명석, 2017).

가장 적합한 협력적 거버넌스, 즉 가장 효율적인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노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적재(私的財) 문제를 다루는 시장에서 기업은 거래와 경쟁이라는 M을 활용해 가장 효율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업은 시장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M만을 활용하지 않는다. 기업은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M, H, N을 모두 활용하는 최적 형태의 협력적 거버넌스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활용한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 문제를 다루는 경제 거버넌스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시장에서도 때로는 H와 N이 더 효율적인 사회문제 해결 방법이 될 수 있고, 특히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 이 세 가지 사회적 조정 유형이 유연하게 혼합돼 사용된다는 연구를 한 로날드 코즈(Ronald Coase), 올리버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 그리고 엘리노어 오스트롬(Elinor Ostrom)과 같은 학자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대신에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은 코즈와 윌리엄슨이 설명하는 시장에서 H가 활용된 대표적 사례이다, 그리고 최근 AI 빅테크 최고경영자들의 소위 ‘깐부회동’은 오스트롬이 강조하는 전형적인 N 활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거버넌스 개념이 더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공공 거버넌스(public governance) 분야에서는 가장 적합한 협력적 거버넌스, 즉 최적 수준의 H, M, N 혼합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이 매우 부족하다. 사적재를 다루며 문제 해결 성과가 기업 등 관련 행위자의 존폐를 좌우하는 경제 거버넌스와 달리, 공공재(公共財)와 공유재(共有財)를 다루며 공익을 추구하는 공공 거버넌스에서는 사회문제 해결 성과가 정부와 행정부 등 관련 행위자의 존폐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공익을 위해서 사회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데 무관심하며, 거버넌스 유행에도 불구하고 계층제 조직과 계층제적 통제를 최선의 대안으로 처방하는 전통적인 주류 행정학의 전통은 여전히 유지된다. H는 과대평가 되고, N은 H의 보완 도구 정도로 과소평가된다. 행정학에서 공공 거버넌스를 다루는 대표적인 연구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신공공거버넌스론(new public governance)도 초기에 신뢰에 근거하는 관계적 거래(relational contracts), 즉 자발적·수평적 협력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최근에는 법적 강제력과 명시적 규제에 근거하는 ‘강제된 협력(mandated collaboration)’을 강조한다.

이것이 빈센트 오스트롬(Vincent Ostrom)이 1973년에 진단한 행정학의 지적 위기이다. 반세기 전에 그가 진단한 주류 행정학의 근본적인 문제는 주류 행정학이 계층제 조직과 계층제적 통제가 유일한 최선의 대안이라는 가정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류 행정학의 사회문제 해결 처방과 정부를 대신하는 새로운 대안이 강조되는 거버넌스 시대라고 불리는 현재에도 주류 행정학의 암묵적 가정은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저자는 이 현상을 ‘거버넌스 신드롬’이라고 정의한다(이명석, 2017). 거버넌스 신드롬은 거버넌스의 개혁적 이미지만을 채용한 채, 전통적 계층제 중심의 사회문제 해결 방식이 갖는 근본적 문제점을 고치지 못하는 일종의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새롭고 개혁적인 대안으로 거버넌스를 말하지만, 전통적 정부와 실질적으로 차별화되지 못하는 강제된 협력 정도를 새로운 대안으로 인식하고. 결과적으로 충분히 새롭고 근본적인 거버넌스 개혁에 무관심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최적 대안 탐색과 활용에 실패한다. 물론 전통적 정부의 계층제적 통제 또는 계층제 거버넌스(H)는 여전히 효율적인 사회문제 해결 대안이다. 그러나 유일한 최선의 대안 또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사회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 거버넌스(M)와 네트워크 거버넌스(N)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거버넌스 유형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혼합(H, M, N)인 협력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각자의 연구 현장에서 이론을 검증하고 발전시켜온 제자들의 연구를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대안인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협력으로서의 거버넌스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 준비됐다. 이 책이 거버넌스 신드롬을 극복하고 협력적 거버넌스 이론이 현실의 맞춤형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이론, 방법 그리고 사례의 세 부로 구성된다.

이론을 다루는 제1부에서, 제1장은 거버넌스의 학술적 개념을 정의하고 이론적 기초를 다룬다. 제2장은 협력적 거버넌스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다룬다. 제3장은 협력적 거버넌스의 장기적 지속을 위한 ‘적응’ 전략을 정의하고 참여자 역량 및 제도적 요소를 분석한다. 그리고 제4장은 거버넌스 환경에서 정책 변동을 설명하는 옹호연합틀(ACF)과 내러티브정책틀(NPF)을 비교하며 국내외 동향을 설명한다.

방법을 다루는 제2부에서, 제5장은 거버넌스 신드롬 연구의 방법론적 한계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제6장은 협력적 거버넌스의 측정에 대한 방법과 적용 사례를 제시한다. 제7장은 대변혁의 시대에 공공리더가 갖춰야 할 가치와 실질적인 협력 통치 역량을 탐구한다.

사례를 다루는 제3부에서, 제8장은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계층제, 시장, 네트워크 거버넌스의 혼합 전략과 시민사회의 역할을 분석한다. 제9장은 신기술 확산에 따른 규제 지체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 기반의 참여 모델을 제안한다. 제10장은 민관 가교 역할을 하는 중간 지원 조직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하고 전문성 및 자율성 확보 방안을 논의한다. 제11장은 독거노인 보호 서비스 네트워크의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고 자원 배분의 불균형 문제를 제기한다. 제12장은 공유냉장고의 협력적 거버넌스와 자발적 민간 네트워크의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조율하는 정부의 메타거버넌스 책임을 강조한다. 제13장은 안산시 사례를 통해 하향식 규제의 실패를 극복하고 시민 주도의 민주적 거버넌스가 안착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제14장은 서울과 부산의 북한이탈주민 취업지원 네트워크를 비교해 지역 자원 특성에 맞는 강화 전략을 강조한다. 제15장은 정부 주도 지역혁신 전략의 한계를 진단하고, 실질적인 지역 주체 간 연결을 강조한다.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다. 제일 먼저 저자의 은사님이신 빈센트 오스트롬 교수님과 엘리노어 오스트롬 교수님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두 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자도, 제자들도, 그리고 이 책도 없었을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와 국정전문대학원 동료 교수님들께서 오랜 세월 동안 보내 준 격려와 지원에도 깊이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이 책을 함께 집필한 제자들에게 각별한 감사와 애정을 전한다. 이 책은 저자의 은퇴를 기념해 제자들이 뜻을 모아 함께 집필한 것이다. 거버넌스 신드롬과 협력적 거버넌스에 대한 문제의식과 학문적 관심을 공유하고 각자의 연구 현장에서 묵묵히 이론을 검증하고 발전시켜온 제자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학자 그리고 특히 교수로서 저자가 누린 가장 큰 행복이었다.

끝으로 가족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유학 시절부터 교수 시절, 그리고 은퇴 후 이 책을 마무리하기까지 오랜 연구의 여정을 언제나 말없이 곁에서 지켜 준 사랑하는 아내 정은미에게 가장 깊은 감사를 전한다. 늘 옆자리에서 저자를 묵묵히 지지해 준 아내 덕분에 나는 긴 학문의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언제나 저자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는 저자를 늘 자랑스럽게 생각해 준 부모님과 가족 모두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 강단을 떠나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은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쓴 이 책이 그 약속의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2026년 여름, 돈암동 서재에서

제자들을 대표해

이명석
저자

이명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