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이 책이 청소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귀가 번쩍 뜨였다.
한창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좋은 소설을 읽어주겠다니 참 아름다운 인간교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소설은 그 시대가 창출한 가장 강렬한 정신적 유산이자, 미래를 지향하는 상상적 공간일 텐데, 커가는 청소년들로 하여금 그걸 성장의 발판으로 삼게 하겠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또 직접 창작을 해온 사람으로서, 문학이 인성개발에 미치는 영향을 높게 평가함은 당연하며, 한바탕 성장과 발육을 향해서만 치닫는 청소년기야말로 좋은 소설을 많이 읽을 때라는 생각을 늘 해온 사람이다.
강소천 선생의 「꿈을 찍는 사진관」을 읽으면서 자랐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도시로 나간 시골소년 앞에 갑자기 나타난 이 동화집은 나로서는 세상에는 없던 신대륙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도 신비한 글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책들을 찾아 읽기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훨씬 훗날 미국에 가서 한국문학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무엇을 가르칠까 고심하다가 나는 결국 나의 성장기에 읽은 「꿈을 찍는 사진관」을 갖고 가서 읽어주기로 하였다. 그때 그들은 대학생이었지만 그들이 한국을 이해하는 정도는 아직 중학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학기 수업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나는 내가 미국에 다녀왔다는 생각보다 그들의 세상이 태평양을 건너 우리 대한민국까지 뻗친 것을 보는 것 같아 마음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서연비람〉이 엮어낸 『해설과 함께 읽는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이 오늘의 청소년들에게도 같은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한다. 읽어라! 모르겠거든 알 때까지 읽어라! 이것이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하고 또 소설을 쓰면서 얻은 올바른 소설독법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친절한 해설까지 곁들였으니 서연비람의 독자들이야말로 천군에 만마를 얻은 셈이다. 이 『한국 대표 단편문학 선집』은 아름다운 단편소설 모음집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한다는 등의 이유를 걸어 괜히 낯설거나 정체가 불명한 책을 만들기보다는, 좀 해묵어 보이더라도 우리 조부모 때부터, 부모 때부터 대를 이어 읽히고 검증을 받 아온 모범적인 작품들을 선별하고자 노력한 책이다.
편편이 ‘작가 소개 - 작품 해설 - 작품 - 선생님이 들려주는 작품 이야기’의 순서를 밟아 읽는 이들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완벽을 기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선생님이 들려주는 작품 이야기’는 이 책이 고안한 아주 특별한 코너로서, 그동안 그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한 선생과 학생의 실체를 여기서 만나게 될 것이다. 학습은 꼭 배워서만 안다기보다 그것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회초리와 함께 기억된다는 말이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서 그만큼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여기 실린 단편들도 그렇게 선생님이 들려주신 그 시절 이야기와 함께 오래 기억될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 송하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책 속에서
역마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花開峽)에서 흘러내려, 여기서 합쳐서, 푸른 산과 검은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하동, 구례, 쌍계사의 세 갈래 길목이라 오고 가는 나그네로 하여, ‘화개장터’엔 장날이 아니라도 언제나 흥성거리는 날이 많았다. 지리산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다.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아 장수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주머니끈, 족집게, 골백분 들이 또한 구렛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의 해물 장수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자반 조기, 자반 고등어들이 올라오곤 하여 산협(山峽)치고는 꽤 성한 장이 서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28~29쪽
운명을 받아들이며 되찾은 삶의 힘
정착과 유랑이 교차하는 화개장터
김동리의 「역마」(1948)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맞닿고 하동·구례·쌍계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한다. 장꾼과 나그네가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곳은 정착과 유랑이 교차하는 경계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의 성격은 한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기의 운명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작가는 시대 상황을 앞세우기보다 화개장터의 길과 물, 주막과 장터에 담긴 토속적 분위기를 통해 인간이 타고난 운명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따라서 화개장터는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에 그치지 않고, 성기가 정착과 떠남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도록 이끄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
운명을 막으려는 옥화의 노력
옥화는 성기의 역마살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화개 장날마다 책전을 벌이게 한다. 이는 아들이 떠돌지 않고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체장수와 계연이 주막에 찾아오면서 계획은 어긋난다. 옥화는 계연에게 성기의 시중을 들게 하며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아들을 붙잡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그 만남은 정착의 가능성을 열어 주는 동시에 감춰진 혈연의 비밀을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운명을 막으려는 옥화의 노력이 오히려 운명을 실현하는 길이 된다는 역설은 작품의 비극성을 깊게 한다.
- 24~25쪽
비 오는 날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 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끝으로 잔굽을 핥았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몇몇 교회에서 다년간 찬양대를 지도해 온 동욱의 과거를 원구는 생각하며, 요즈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다. 동욱은 멋쩍게 씽긋 웃고 나서 이따마큼 한 번씩 나가노라고 하고 그런 때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 86~87쪽
잿빛 비의 감옥이 된, 비 오는 날
잿빛 하늘 아래 갇힌 전후의 풍경
손창섭의 「비 오는 날」(1953)은 한국전쟁기 피난지 부산을 배경으로, 오랜 기간 이어지는 장마라는 질식할 듯한 기상 조건을 통해 시대의 우울을 형상화한다. 전쟁의 상처가 계속되는 이 피난 도시의 하늘은 여전히 잿빛 비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작가는 끈적거리고 눅눅한 피난지의 배경 묘사를 통해 단순히 비가 내리는 자연 현상을 넘어,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곪아가는 당대의 절망적인 사회 분위기를 탁월하게 시각화했다. 이 작품에서 ‘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의 상징이자 인물들의 삶을 옥죄는 거대한 감옥의 알레고리다.
결핍과 불안 속에 놓인 인물 군상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결핍을 안은 채, 온전한 삶의 자리에서 밀려난 존재들이다. 리어카 잡화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원구, 무능력한 인텔리 동욱, 그리고 왼쪽 다리에 장애를 지닌 동옥은 모두 전쟁기 피난지의 빈곤과 불안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의 불완전한 삶의 조건과 무기력한 태도를 통해, 정상적인 일상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 전쟁기 현실을 드러낸다. 특히 동옥의 육체적 장애는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살아가는 그녀의 고립감과 상처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 82~83쪽
잉여인간
만기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 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온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무렵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익준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한 것이었다. 그런 날은 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저고리를 벗어부치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기 때문이다.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닥에 물을 뿌리고 방구석이나 테이블 밑까지 말끔히 쓸어 내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을 서는 그의 성품은 이런 데도 잘 나타났다. 청소가 끝나면 익준은 작달막한 키에 가로 퍼진 그 등실한 몸집을 대합실 의자에 내어던지듯 털썩 걸터앉아서 신문을 본다. 그러노라면 원장과 천봉우가 대개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 128~129쪽
상처 입은 시대와 인간의 초상
전후의 폐허와 실존적 허무의 형상화
손창섭의 「잉여인간」(1958)은 6·25 전쟁 직후 황폐해진 시대의 상처를 짊어진 인간 군상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