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시전집 3(큰글씨책) (교유시(2))

왕유 시전집 3(큰글씨책) (교유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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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왕유 시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삼수 교수가 20여 년간의 연구를 총정리해 ≪왕유 시전집≫ 완전판으로 엮었다. 당나라 3대 시인의 하나로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의 시 308편 376수를 모두 옮기고 각 시마다 상세한 해제를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3권에는 교유시 중 창화시와 왕래시 94편 100수를 실었다.
저자

왕유

저자왕유는시불왕유는시선이백,시성두보와함께성당(盛唐)시단의3대가로,중국은물론우리나라고전문학에도상당한영향을끼친대시인이다.왕유의자(字)는마힐(摩詰)이고하동(河東)포주(蒲州)사람으로,상서우승(尙書右丞)을지낸적이있어흔히‘왕우승(王右丞)’이라일컬어진다.당(唐)ㆍ무후(武后)장안(長安)원년(701)에태어나숙종(肅宗)상원(上元)2년(761)에향년61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으며일생동안무후,중종(中宗),예종(睿宗),현종(玄宗),숙종등다섯제왕의시대를살았다.
왕유는중소(中小)관료집안출신으로,유년시절부터아주총명해아홉살때이미글을지을줄알았다고하며열다섯살때고향을떠나서경(西京)장안과동도(東都)낙양을오가며사회진출을도모하기시작했다.열아홉에경조부시(京兆府試)에응시해해원(解元)급제했다.개원9년봄,스물한살의나이로진사에급제했고,곧태악승(太樂丞)에임명되면서벼슬길에첫발을내딛었다.그러나같은해가을,수하의예인(藝人)들이오직황제를위해서만공연할수있는황사자무(黃獅子舞)를사사로이공연한사건에연루되어제주(濟州)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좌천되고말았다.
개원23년(735)왕유는마침내장구령의천거로우습유(右拾遺)를제수받고낙양으로가서부임했으며,개원24년10월에는현종을따라장안으로돌아왔다.그러나같은해11월,왕유의정신적ㆍ정치적지주였던현상(賢相)장구령이간신이임보(李林甫)의시기와모함으로파면되었고,이듬해4월에는또형주장사(荊州長史)로좌천되고말았다.왕유는감찰어사(監察御史)부터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등의벼슬을오가다가개원29년봄종남산(終南山)에은거했다.천보(天寶)원년좌보궐(左補闕)에오르며다시입경했고늦어도천보3년(744)에는남전현(藍田縣)의망천(輞川)계곡에별장,즉‘망천장(輞川莊)’을마련해역관역은의후기생활을시작했다.그후천보15년에안녹산반군의포로가될때까지여가나휴가때면으레망천별장으로돌아와풍경을즐기며유유자적했다.천보9년(750)봄,50세의왕유는모친상을당해망천으로돌아갔고복상(服喪)하며2년간은거했다.거상(居喪)기간이끝난천보11년봄,다시입조해이부낭중(吏部郞中)을제수받았으며,같은해이부가문부(文部)로개편된후에도계속문부낭중을지냈다.천보14년(755)에는다시종오품상의급사중(給事中)으로옮겼는데,그해11월에안녹산의난이일어났다.
천보15년6월,안녹산반군이동관(潼關)을함락하고급기야서경장안으로입성하자현종(玄宗)은부랴부랴수행원을대동하고촉(蜀)땅으로피난했다.그러나왕유는미처그일행을따르지못하고반군의포로가되었다.일부러환자나장애인인것처럼위장하며위기를모면코자했으나별소용이없었다.반군은왕유를낙양보리사(菩提寺)로압송ㆍ구금하고그들의벼슬을강요했다.왕유는완강히버티며응하지않았지만대략9월이후에는자신의뜻과는상관없이위직(僞職)급사중벼슬이떠맡겨지고말았다.
지덕2년(757)에동ㆍ서양경을수복한조정은같은해12월,그간반군에게억류당해있으며위직을맡았던사람들을모두여섯등급으로나누어논죄했다.왕유는보리사에갇혀있으면서친구배적(裴迪)에게지어보였던시[보리사에갇혀있는데배적이찾아와…(菩提寺禁裴迪來…)]로일찍이숙종을감동시킨데다당시형부시랑(刑部侍郞)의높은벼슬을하고있던동생왕진이자신의관직을삭탈하는대신형의죄를감면해줄것을청원해숙종의특별사면을받게되었다.
그후왕유는망천에서한거하다가이듬해봄에복관되면서태자중윤(太子中允)에문책(問責)제수되었으며,다시얼마후에는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가함받았다.그리고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와중서사인(中書舍人)을역임한뒤가을에마침내급사중에복직되었고상원(上元)원년(760)여름에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승진했다.
상원2년봄,왕유는동생왕진이외직(外職)인촉주자사(蜀州刺史)로나가있는것을안타깝게여기며[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을올려자신의관직을삭탈하는대신동생의내직(內職)귀환을청원했다.그러나왕진이새로운내직을제수받고귀경하는도중인같은해7월,그리운동생을만나지도못한채61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다.그리고오랫동안‘역은(亦隱)’의삶을살았던망천장을개조한사찰,청원사(淸源寺)서쪽에안장되었다.

목차

3.창화시(唱和詩)
친구의운모병풍에적다
사군오랑의[서루에올라아득히바라보며고향으로돌아가고파하다]에화답하다
숭범사스님께부치다
동악태산의초연사에게주다
초도사에게주다
조영에게주다
노씨령방관에게주다
노습유의[위급사의동산별장을찾아서20운(韻)40구(句)]에화답하다:위급사의초봄휴가때내이미함께노닐었고,또이번유람역시함께하라는명을미리받은바있으나공교롭게도지금내게거마가없어그동유(同遊)의약속을지킬수가없도다
윤간의의[사관의원림연못]에화답하다
[종남산을바라보며]를서중서에게주다
형주장승상께부치다
배민장군에게주다
아우장인에게재미스레주다ㆍ3수
아우장인에게답하다
복야진공의[천자의여산온천행차에호종하다]에화답하다
여거사의[석천에서짓다]에응수하다
원사인이범자서예에도능하고범음에도통달해두방면에서모두그오묘함을곡진히하므로재미스레시를지어주다
원낭중에게거듭응수하다
비부양원외랑의[정월대보름밤놀이를하다가정자계를그리다]에화답하다
이기에게주다
위척태수께삼가부치다
비부양원외랑이저녁에금대에서묵고아침에서각에올라급히지어준시작(詩作)에응수하다
옛친구장인은시도잘짓고점복에도능하면서회화와초서ㆍ예서에도뛰어난데,근자에지어준시를잘받고이제이시를지어응수한다
사촌아우고부원외랑왕구에게주다
구교서의쌍계별장에대해묻다
곽급사에게응수하다
태상주부위오랑의[여산온천관람]에화답하다
망천에서한거하며배적수재에게주다
배적이망곡어귀에서비를만나종남산을생각하며지은시작에답하다
배십적에게주다
배적에게주다
수재배적이시읊는것을듣고재미스레주다
우부소원외랑의[남전별장을찾았다가주인장도만나지못하고]에응수하다
남전유현령에게주다
수풀우거진전원의풍경을노래하며아우담에게부치다
여러분의방문에감사하며
장소부에게응수하다
산중에서아우에게보이다
보리사에갇혀있는데배적이찾아와역적안녹산의무리가응벽지가에서음악판을벌여이원(梨園)의악공(樂工)들이모두음악을연주하기시작하다가말고문득일시에눈물을흘렸다고하매사사로이입으로흥얼거려서즉흥시를지어배적에게읊어보이다
입으로흥얼거려지은즉흥시를또배적에게읊어보이다
엄소윤과서사인이나를찾아왔다가만나지못하고간것에시로써응수하다
최부의[현제에게답하다]에화답하다
송중승의[여름날복현관과천장사를유람하며]에화답하다
봄밤대숲정자에서,남전으로돌아가는전소부에게주다
과원시
모용십일에게응수하다
진감사랑의[가을비속에사촌아우진거를생각하며]에화답하다
호거사가와병중에있어쌀을보내면서시를함께드리다
나와호거사가모두병이나매이시를호거사에게부치며아울러불도를배우는이에게도보이다
좌중(座中)에서급히붓을놀려설거와모용손에게주다
정우의농가에서지어주다
옛오(吳)나라땅관리에게주다
양부마여섯째영랑(令郞)의[가을밤풍경을노래하다]에삼가화답하다
하사가갈건을준데감사하며
재미스레지어소씨생질에게보이다
심십사습유의대나무햇순이바야흐로그독경처에돋아남을노래한여러분의시작에화답하다
위목에게주다
황하강변의단십육에게부치다
사환을재미스레놀리다

4.왕래시(往來詩)
제주에서조(趙)노인댁에들렀더니술잔치를베풀어주다
조영이찾아와머물러묵음을기뻐하며
승여선사와소거사의숭구난야를찾아서
위급사의산장
위시랑의산장
정월그믐날대리사(大理寺)위경의성남별장을유람하며ㆍ4수
변각사에올라서
선상인을뵈오며
도일선사의난야에서묵으며
청룡사담벽상인의선원(禪院)에서의모임
노상원외랑과함께최흥종처사의숲속정각(亭閣)을찾아서
소ㆍ노두원외랑과방장사를유람하기로했으나소원외랑이오지않으매이시를짓는다
노원외랑댁에들러스님에게음식을보시하는것을보고함께7운(韻)14구(句)의시한수를짓다
노상과함께주형(朱兄)댁에모여서
봄날하수원외랑의약초밭을찾아서
최부마의산중연못을찾아서
봄날배적과함께신창리에들러여은사(呂隱士)를방문했다가만나지못하다
여름날청룡사에들러조선사를뵈옵다
여흔습유와배적수재의방문을받고가을밤에비를마주하고짓다
배적수재의작은누대에올라서짓다
술부어배적에게주며
화감사담흥상인의산원(山院)을찾아서
화감사를유람하며
과주정태수가찾아와서
늦봄에엄소윤과여러분의방문을받고서
모용승이채소음식을가지고찾아오다
복부산스님께식사를대접하며
아우하남윤엄무(嚴武)가작별차찾아와내누추한오두막집에묵으며각자10운(韻)20구(句)의시를짓다
이처사의산중거처
이읍의거처를찾아서
연자감선사의노래
복선사의난야를찾아서
향적사를찾아서
봄날산사의풍경을노래하다
이산인의거처를유람하다가초옥(草屋)의벽에적다

출판사 서평

당시(唐詩)의문학적가치와고전적향기는오늘날에도불후의생명력을발휘하며전세계문학애호가들을매료한다.시불(詩佛)왕유는시선(詩仙)이백,시성(詩聖)두보와함께당시의황금기를이끈대시인이다.
이백이풍류넘치는삶을살며호방한필치와낭만적인서정으로시운을만나지못한개인적시름과울분을토로했다면,두보는우국우민(憂國憂民)의충정을바탕으로침울하면서도사실적인필치로전란(戰亂)의고통에신음하는사회민생을여실히반영했다.반면불교에심취했던왕유는역관역은(亦官亦隱)의고뇌에찬삶을살며담박하면서도고아한필치로세속적번뇌에서초탈하고해탈한정서를묘사했다.그때문에왕유의시는자연의정취와불가(佛家)적선취(禪趣)가넘치는것으로유명하며이는속세를떠난서정의극치로이어진다.
그러나왕유의시적재능은은일(隱逸)한서정에만머물지않았다.적극진취적인처세를보인전기에는경세제민(經世濟民)의정치적이상을표출하는가하면,현실사회의불합리를풍자하기도했다.또한생애전반에걸쳐창작된교유시(交遊詩)와증별시(贈別詩),그리고일상생활의다양한감정을담은작품에서묻어나는은근하면서도온후한정감은감탄을자아낸다.
입신현달(立身顯達)의꿈을품고열다섯살에고향을떠나장안으로가던왕유는,굳이진시황릉을찾아애절한솔바람소리를들으며흥망성쇠에대한깊은감개를토로할정도로(1208쪽<진시황릉을찾아서>참조)어려서부터이미인생에대한통찰이남달랐다.그러므로그는가정적인불행에정치적실의와실절(失節)이이어지는시련과고통속에서도결코비관하거나염세하지않고,인간의내면적생명가치를추구하며정신적해탈에이를수있었다.
오늘날치열한생존경쟁의틈바구니에서어느누구도현실적인고뇌와갈등으로부터자유로울수는없다.소중한일상속에서진정한삶의의미와가치를찾기는커녕왕왕상대적빈곤과열등의무게를이기지못하고힘들어한다.그래서일까,우리는몸소밭을갈며인생의참뜻을깨닫고희열의노래를부른전원시인도연명(陶淵明)보다는,고통과시련의삶속에서도인생에대한통찰로자신을지켰던왕유에게서더욱매력을느낀다.왕유의시는분명고단한현대인에게초탈과해탈의지혜를일깨워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