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시전집 4(큰글씨책) (정치시)

왕유 시전집 4(큰글씨책) (정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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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왕유 시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삼수 교수가 20여 년간의 연구를 총정리해 ≪왕유 시전집≫ 완전판으로 엮었다. 당나라 3대 시인의 하나로 시불(詩佛)이라 불리는 왕유의 시 308편 376수를 모두 옮기고 각 시마다 상세한 해제를 추가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4권에는 정치시 43편 54수를 실었다.
저자

왕유

저자왕유는시불왕유는시선이백,시성두보와함께성당(盛唐)시단의3대가로,중국은물론우리나라고전문학에도상당한영향을끼친대시인이다.왕유의자(字)는마힐(摩詰)이고하동(河東)포주(蒲州)사람으로,상서우승(尙書右丞)을지낸적이있어흔히‘왕우승(王右丞)’이라일컬어진다.당(唐)ㆍ무후(武后)장안(長安)원년(701)에태어나숙종(肅宗)상원(上元)2년(761)에향년61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으며일생동안무후,중종(中宗),예종(睿宗),현종(玄宗),숙종등다섯제왕의시대를살았다.
왕유는중소(中小)관료집안출신으로,유년시절부터아주총명해아홉살때이미글을지을줄알았다고하며열다섯살때고향을떠나서경(西京)장안과동도(東都)낙양을오가며사회진출을도모하기시작했다.열아홉에경조부시(京兆府試)에응시해해원(解元)급제했다.개원9년봄,스물한살의나이로진사에급제했고,곧태악승(太樂丞)에임명되면서벼슬길에첫발을내딛었다.그러나같은해가을,수하의예인(藝人)들이오직황제를위해서만공연할수있는황사자무(黃獅子舞)를사사로이공연한사건에연루되어제주(濟州)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좌천되고말았다.
개원23년(735)왕유는마침내장구령의천거로우습유(右拾遺)를제수받고낙양으로가서부임했으며,개원24년10월에는현종을따라장안으로돌아왔다.그러나같은해11월,왕유의정신적ㆍ정치적지주였던현상(賢相)장구령이간신이임보(李林甫)의시기와모함으로파면되었고,이듬해4월에는또형주장사(荊州長史)로좌천되고말았다.왕유는감찰어사(監察御史)부터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등의벼슬을오가다가개원29년봄종남산(終南山)에은거했다.천보(天寶)원년좌보궐(左補闕)에오르며다시입경했고늦어도천보3년(744)에는남전현(藍田縣)의망천(輞川)계곡에별장,즉‘망천장(輞川莊)’을마련해역관역은의후기생활을시작했다.그후천보15년에안녹산반군의포로가될때까지여가나휴가때면으레망천별장으로돌아와풍경을즐기며유유자적했다.천보9년(750)봄,50세의왕유는모친상을당해망천으로돌아갔고복상(服喪)하며2년간은거했다.거상(居喪)기간이끝난천보11년봄,다시입조해이부낭중(吏部郞中)을제수받았으며,같은해이부가문부(文部)로개편된후에도계속문부낭중을지냈다.천보14년(755)에는다시종오품상의급사중(給事中)으로옮겼는데,그해11월에안녹산의난이일어났다.
천보15년6월,안녹산반군이동관(潼關)을함락하고급기야서경장안으로입성하자현종(玄宗)은부랴부랴수행원을대동하고촉(蜀)땅으로피난했다.그러나왕유는미처그일행을따르지못하고반군의포로가되었다.일부러환자나장애인인것처럼위장하며위기를모면코자했으나별소용이없었다.반군은왕유를낙양보리사(菩提寺)로압송ㆍ구금하고그들의벼슬을강요했다.왕유는완강히버티며응하지않았지만대략9월이후에는자신의뜻과는상관없이위직(僞職)급사중벼슬이떠맡겨지고말았다.
지덕2년(757)에동ㆍ서양경을수복한조정은같은해12월,그간반군에게억류당해있으며위직을맡았던사람들을모두여섯등급으로나누어논죄했다.왕유는보리사에갇혀있으면서친구배적(裴迪)에게지어보였던시[보리사에갇혀있는데배적이찾아와…(菩提寺禁裴迪來…)]로일찍이숙종을감동시킨데다당시형부시랑(刑部侍郞)의높은벼슬을하고있던동생왕진이자신의관직을삭탈하는대신형의죄를감면해줄것을청원해숙종의특별사면을받게되었다.
그후왕유는망천에서한거하다가이듬해봄에복관되면서태자중윤(太子中允)에문책(問責)제수되었으며,다시얼마후에는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가함받았다.그리고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와중서사인(中書舍人)을역임한뒤가을에마침내급사중에복직되었고상원(上元)원년(760)여름에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승진했다.
상원2년봄,왕유는동생왕진이외직(外職)인촉주자사(蜀州刺史)로나가있는것을안타깝게여기며[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을올려자신의관직을삭탈하는대신동생의내직(內職)귀환을청원했다.그러나왕진이새로운내직을제수받고귀경하는도중인같은해7월,그리운동생을만나지도못한채61세를일기로세상을떠났다.그리고오랫동안‘역은(亦隱)’의삶을살았던망천장을개조한사찰,청원사(淸源寺)서쪽에안장되었다.

목차

1.궁정시(宮廷詩)
기왕을따라양씨의별장에들렀다가응교하다
기왕을따라위가(衛家)의산중연못가야간연회에갔다가응교하다
임금님께서기왕에게구성궁을빌려주신덕분에함께더위를피하며응교하다
성제(聖製)[사공봉에게곡강연을베풀어주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3월3일상사절곡강연회에시종(侍從)해응제하다
성제[현원황제옥상건립을경축하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어느봄날아침조회시문하성에서당직을하며
성제[옥진공주의산장에거둥해그석벽에10운(韻)20구(句)를적다]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안서로귀환하는부몽도호겸홍려경을배웅하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대동전기둥에영지가자라나고용지위에오색운기가피어나는것을조정백관이다같이볼제황제께서성은을베푸시어즉각주연과음악을내리시매감히시를지어눈앞의경물을노래하다
성제[천장절에재상들에게내리는노래]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강성관에올라재상들과함께아득히바라보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춘명문망루에거둥해중서령의뜰안정자를굽어보며‘낙현’시를읊다]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임금님께서칙명으로백관에게앵두를내리시다
최원외의[가을밤에숙직을하며]에화답하다
성제[늦봄에각기본군(本郡)으로돌아가는조집사들을전송하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태자ㆍ제왕(諸王)들과함께3월3일상사절에용지가에서춘계를행하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중양절에재상과백관의축수를받으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3월3일상사절근정루연회에시종(侍從)해응제하다
성제[정월대보름날밤연등놀이에이어신민(臣民)에게연회를베풀어주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상사절망춘궁에서춘계를올리고주연을즐기는것을보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성제[봉래궁에서흥경궁으로향하는각도가운데서봄경치에취해선뜻떠나가지못하고빗속에봄날을조망하며]에삼가화답해응제하다
가사인의[대명궁에서의아침조회]에화답하다
아침조회
아침조회

2.애도시(哀悼詩)
고(故)서하군두태수를애도하는노래ㆍ3수
달혜이부시랑의부인구씨를애도하는노래ㆍ2수
고(故)태자태사서국공(徐國公)을애도하는노래ㆍ4수
공의태자를애도하는노래ㆍ5수
고(故)남양군부인번씨를애도하는노래ㆍ2수

3.환유시(宦遊詩)
제주로좌천되어가며
장영공께올립니다
시흥공께바칩니다
임금님께불충한죄를용서받은데다얼마후에는또벼슬을제수받고엎드려성은에감격하며삼가보잘것없는뜻을간찰에적어신임사군을비롯한여러분께올리다

4.변새시(邊塞詩)
연지산의노래
변새지대로출사(出使)하며
변새지대에나가짓다
양주신명제사
종군의노래
농서의노래
농산의노래
노장수의노래
사냥구경

출판사 서평

당시(唐詩)의문학적가치와고전적향기는오늘날에도불후의생명력을발휘하며전세계문학애호가들을매료한다.시불(詩佛)왕유는시선(詩仙)이백,시성(詩聖)두보와함께당시의황금기를이끈대시인이다.
이백이풍류넘치는삶을살며호방한필치와낭만적인서정으로시운을만나지못한개인적시름과울분을토로했다면,두보는우국우민(憂國憂民)의충정을바탕으로침울하면서도사실적인필치로전란(戰亂)의고통에신음하는사회민생을여실히반영했다.반면불교에심취했던왕유는역관역은(亦官亦隱)의고뇌에찬삶을살며담박하면서도고아한필치로세속적번뇌에서초탈하고해탈한정서를묘사했다.그때문에왕유의시는자연의정취와불가(佛家)적선취(禪趣)가넘치는것으로유명하며이는속세를떠난서정의극치로이어진다.
그러나왕유의시적재능은은일(隱逸)한서정에만머물지않았다.적극진취적인처세를보인전기에는경세제민(經世濟民)의정치적이상을표출하는가하면,현실사회의불합리를풍자하기도했다.또한생애전반에걸쳐창작된교유시(交遊詩)와증별시(贈別詩),그리고일상생활의다양한감정을담은작품에서묻어나는은근하면서도온후한정감은감탄을자아낸다.
입신현달(立身顯達)의꿈을품고열다섯살에고향을떠나장안으로가던왕유는,굳이진시황릉을찾아애절한솔바람소리를들으며흥망성쇠에대한깊은감개를토로할정도로(1208쪽[진시황릉을찾아서]참조)어려서부터이미인생에대한통찰이남달랐다.그러므로그는가정적인불행에정치적실의와실절(失節)이이어지는시련과고통속에서도결코비관하거나염세하지않고,인간의내면적생명가치를추구하며정신적해탈에이를수있었다.
오늘날치열한생존경쟁의틈바구니에서어느누구도현실적인고뇌와갈등으로부터자유로울수는없다.소중한일상속에서진정한삶의의미와가치를찾기는커녕왕왕상대적빈곤과열등의무게를이기지못하고힘들어한다.그래서일까,우리는몸소밭을갈며인생의참뜻을깨닫고희열의노래를부른전원시인도연명(陶淵明)보다는,고통과시련의삶속에서도인생에대한통찰로자신을지켰던왕유에게서더욱매력을느낀다.왕유의시는분명고단한현대인에게초탈과해탈의지혜를일깨워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