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시문선집

서천 시문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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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봉건과 근대, 개화와 수구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지역 선비 조정규는 유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했다. 서천 조정규의 문집 가운데, 그가 중국을 다녀오며 기록한 일기, 시, 필담, 편지글, 제문을 골라 소개한다. 근대 전환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현실 인식과 대응, 지역 학자들의 인맥 관계,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읽어 낼 수 있다.
저자

조정규

趙貞奎,1853∼1920
서천(西川)조정규(趙貞奎,1853∼1920)의자(字)는태문(泰文)이고,본관은함안이다.서천(西川)은그의별호다.1853년10월17일에함안안도유암리에서태어났는데,어려서부터언행이예사롭지않았을뿐만아니라,효성이지극했다.학문은대체로가학의영향을받았던것으로보이고,성재(性齋)허전(許傳,1797∼1886)의영향도받은것으로보인다.1910년경술국치이후그는“종묘와사직이무너지고,백성의삶이짓밟혔다”라고통곡하고,자고산으로들어가≪춘추≫를강론해≪주역≫의이치를완색했다.1913년부터중국서간도를거쳐북경,산동지역등을두루여행하며견문을넓히고동포들의생활과독립을지원했다.봉천성에남아있던전후5년간질병을얻어환국했는데,병이위독하게되자손수‘충효문(忠孝門)’이라는세글자를쓰고,그아래에“자손들은영원히충성하고효도하는것으로서로전하라”라고써조카용돈에게주어이를당문(堂門)에걸게하고마침내절필(絶筆)했다.
경신년(庚申年,1920)7월23일신시(申時)에창리(昌里)본가에서조용히일생을마쳤으니,향년68세였다.서산아래구수동(九水洞)해좌(亥坐)에전부인묘우측에안장했는데,친지들과문인들로흰두건과띠를맨자가43명이었고,장례식에모인자가1000여명이었다.

목차

북정시(北征詩)
1.내가중주로가려고하는데송덕중이시로전별하니,그운에따라시를지어감사한마음을전한다
2.이태규가북정서시를준데대해감사하며
3.마산항에서기차를타다
4.대구
5.한양가
6.송경가
7.평양을지나며
8.용만을바라보며
9.안동현
10.맹보순·권병하와함께원보산에올라
?11.권병하에게주다
12.맹보순에게주다
13.맹(孟)·권(權)두벗과이별하며
14.봉황성을지나며
15.봉천으로가는길에서
16.봉천부
17.신민부로가는길에서
18.심양을지나며
19.산해관에올라
20.천진행
21.천진천화잔(天和棧)에서고향의벗들을생각하며
22.연태
23.이종예(李鐘豫)에게드리다
24.이종예에게주다
25.고숙(高塾)에게답하다
26.유채년(劉采年)에게답하다
27.유채년의시에부쳐
28.국자감
29.중화문
30.신무문
31.풍주
32.만수산
33.해전도
34.만생원
35.대종사
36.고려빈
37.두벗을전송하며회포를읊다
38.요동관에서이양래를만나다
39.조용훈에게답하다
40.공태보에서성종호(成鐘頀)를방문하다
41.곡부로가려던때,산리(山裏)의앞산을오르며이승희,이광룡,이문주제공과족손경래와함께읊다
42.곡부에간날동반자가없음을한탄하며
43.황하가
44.태산가
45.주공묘(周孔廟)를알현하다
46.제학(提學)공상림(孔祥霖)에게드리다3수
47.북지
48.봉천관에서이승희에게주다
49.곽종석(郭鐘錫)의파리장서를듣고기뻐읊다
50.방가

북정일록(北征日錄)
4월
5월
6월

필담
이종예(李鐘豫)와의필담

서(書)
제학(提學)공상림(孔祥霖)에게드리다
곡부성탄일(聖誕日)여러선비[章甫]들에게주다

제문(祭文)
공자묘에드리는제문
이승희에게드리는제문

부록
행장

해설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지만지한국문학의<지역고전학총서>는서울지역의주요문인에가려소외되었던빛나는지역학자의고전을발굴번역합니다.‘중심’과‘주변’이라는권력에서벗어나모든지역의문화자산이동등한대우를받을수있도록합니다.지역학문발전에이바지한지역지식인들의치열한삶과그성과를통해새로운지식지도를만들어나갑니다.

나라잃은유학자의고뇌
서천(西川)조정규(趙貞奎,1853∼1920)의자(字)는태문(泰文)이고,본관은함안이다.서천(西川)은그의별호다.조정규가살았던19세기말에서20세기초,조선사회는계속되는외세의침범과함께서양문물의유입,사상의주입등으로변화가컸던시기였다.특히국권피탈이라는전대미문의황당한사건을겪으며,조선사회는혼란그자체였다.1910년경술국치이후그는“종묘와사직이무너지고,백성의삶이짓밟혔다”라고통곡하고,자고산으로들어가≪춘추≫를강론해≪주역≫의이치를완색했다.그러다가오랑캐가어지럽힌땅에서희망을찾을수없을거라여기고,만주에들어갈뜻을세웠다.

중국체험의시적구현
그는1913년과1915년,두차례에걸쳐중국을다녀온다.≪서천선생문집≫에수록된그의<북정시>와<북정일록>은이중국여행의산물이다.그는1913년4월16일마산항을출발해6월29일집으로돌아와한천재에들어가기까지총74일간의여정을자세히글로남기고,특기할만한경험을시로기록했다.특히일기에는다녀갔던장소와인물에대해서만기록했던반면,한시에서는다녀간장소에대한정보뿐만아니라,그공간과한반도와의연관성도연상했다.뿐만아니라중국에서만났던인물들에대한기대등도한시로표현했다.이는그가평소산문보다는시를선호하고,또시교설(詩敎說)의입장에서그가체험한것들을남겨후대의교훈으로삼고자했기때문이다.

중국의현실과유가문명재건의필요성
서천의중국체험은중국에대한그의동경과자손들을안주시킬수있는곳이라는기대에서비롯한것이다.그러나그가실제로목격한중국의현실은달랐다.공맹의학문이면면(綿綿)할것이라는기대와는달리,상업을우선으로여기고있는가하면서양의학문을더욱숭상하고있었던것이다.이뿐만아니라,중국은내적인혼란을겪으면서강상이무너지고,한중국안에서도남과북이세력을다투고있었다.조정규는이러한중국의현실을제삼자의시각으로냉정하게바라보고시를통해중국의‘민낯’을폭로한다.그리고중국에대한실망을딛고유가문명재건의필요성을역설한다.그것이근대를향해달려가고있던시기,외세에의해국권을상실해가는위기에서유학자로서그가선택한국권회복의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