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칠자 시선(큰글자책) (반품불가)

건안칠자 시선(큰글자책) (반품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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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건안 시기의 문학을 주도했던, 당시 일곱 명의 대표적 문인들의 작품이다. 건안 문단은 위진 시기 문단의 서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중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안 전기의 시들은 한나라 말기 동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강개한 필치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던 반면, 후기는 문인들이 조조에게 귀의한 이후 정치적 지위를 얻어 조조 일가나 위나라 조정의 은혜를 찬양하거나 연회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되는 건안 시가들의 성격을 통해 당시 사회 변화에 따른 정치 전개 정황에 대해서도 헤아려 볼 수 있다.
저자

공융 외 지음, 문승용 옮김

공융(孔融)
공융은 건안칠자 가운데 나머지 여섯 명과는 여러 측면에서 성격이 다르다. 공융은 조비의 ≪전론·논문≫에서 건안칠자 가운데 첫 번째로 거론되지만, 당시 문단 정황을 알 수 있는 다른 글에서는 공융이 나머지 여섯 명과 함께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공융이 다른 여섯 문인과 함께 일컬어지기에 적합하지 못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공융은 건안 13년(208)에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조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쉽사리 거론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공융은 조조 부자와 나머지 여섯 문인이 어울려 문단 활동을 할 때 그 자리에 함께하지도 못했다. 조조가 죽은 뒤 공융의 문집이 출간된 것은 조비가 공융의 시문을 각별히 아꼈기 때문이다. 현재 <글자를 쪼개어서 내 이름자를 합성해 지은 시>, <잡시(雜詩)> 2수, <임종시>, <육언시> 3수 등 모두 7수가 남아 있다.

목차

1. 공융
글자를 쪼개어서 내 이름자를 합성해 지은 시
육언시
임종시
잡시

2. 왕찬
칠애시
영사시
채자독에게 보내는 시
사손문시에게 부친다
공연시
종군시
잡시

3. 진림
장성 굴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며
유람시
연회시
시

4. 유정
공연시
오관중랑장에게 보내는 시
사촌 동생에게 보내는 시
서간에게 보내는 시
잡시
싸움닭 시
수리 사냥 시
시

5. 서간
유정에게 답한 시
마음의 시
임을 그리며
청하에서 배를 끄는 사내가 신혼에 처와 이별하는 것을 보고 지은 시

6. 완우
수레 내어 북곽문을 나서며
거문고 노래
영사시
칠애시
공연시
잡시
은사시
장마시
원망시

7. 응창
공연시
조숙려에게 답하는 시
오관중랑장을 모시고 건장대에 모여 지은 시
이별시
싸움닭 시

해설
옮긴이에 대해

출판사 서평

건안 문학은 건안 시기의 문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건안 문학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삼조(三曹)와 그들 휘하에서 활동하던 이른바 칠자(七子)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칠자인 공융·왕찬·진림·유정·서간·완우·응창은, 당시 정치권력의 중심이었던 조조·조비·조식과 더불어 건안 문단의 대표적 문인들이다.
중국문학사에서는 흔히 건안 문학을 한(漢)나라 말기 건안 연간의 문학만을 말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한나라 말기와 위나라 초기까지의 문학을 가리킨다.
건안 문학의 시가는 당시 정치와 사회 변화에 따라 두 가지 경향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한나라 말기의 건안 연간은 황제가 힘을 잃어 외척과 환관이 황실을 좌지우지했고, 각 지역 군벌들이 서로 다투느라 사회는 암울했고, 백성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따라서 동란으로 말미암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반영해 강개한 특징의 문단이 건안 전기에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208년 조조가 적벽전에서 크게 패배한 것을 계기로 위·촉·오가 서로 경쟁하는 체제가 되자 전란의 양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당시 이름난 문인 학자들이 조조의 초빙을 받거나 자의로 조조 정권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220년 조조가 죽자 조비가 한나라 헌제에게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황제의 자리를 빼앗아 위(魏)나라를 세워 통치하면서 사회 안정을 꾀했고, 문단에도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건안칠자들이 조조에게 귀의한 이후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지위와 환경은 조조 일가와 위나라 조정이 자신들을 받아 준 은혜를 찬양하거나 궁궐 연회의 즐거움을 노래하게 했으며 그러한 시가 건안 시기 후반 시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렇듯 건안 후기에는 공명심을 드높이거나 조조 부자와 위나라 황실에 대한 칭송에 열중했으므로 건안 초기에 가졌던 강개한 면모는 사라졌다. 설령 강개한 성향의 시가들이 있다 해도 피폐한 사회 현실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불평과 불우한 처지를 비관한 것이라서 그 문학 양상은 건안 전기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건안 시기에는 “세상이 어지러워 뿔뿔이 흩어지고, 풍속이 쇠약해지고 원망스럽기만 한” 상황뿐만 아니라 “조정의 은혜와 영광을 노래하고, 즐거이 연회를 서술하는” 시가도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건안칠자는 당시 권력자인 조조와 함께 자리하면서 건안 문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건안 문단은 중국 문학의 자각기(自覺期)라고 일컬어지는 위진 문단의 서막을 열었으며, 이들 대표 문인들의 시가를 통해 당시 건안 문단의 정황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