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명복 소집(큰글자책)

손명복 소집(큰글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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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송나라 태산학파의 시조인 손복의 문집을 국내 최초로 소개한다. 손복은 송나라 정주학의 기틀을 닦아 호원, 석개와 함께 송초 삼선생으로 불리며 주희, 정이, 정호 등 유학의 대가에게 깊은 존경을 받은 학자다. 그는 겉치레에 빠진 문장과 불교, 도교를 배척하고 경전을 숭상해 올바른 도의 본질을 회복하려 했으며, 태산에서 학문에 몰두하면서 유교 사상을 진작할 수 있도록 인재 양성에 힘썼다. 이 책에는 유학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그의 특징이 잘 드러난 역사 해석에 대한 논변문 13편, 지인에게 보낸 편지 4편, 기문 2편, 시 3편을 수록했다. 옮긴이 전병철 교수의 상세한 해설이 유학을 잘 몰라도 누구나 작품에 빠져들 수 있도록 친절히 안내한다.
저자

손복지음,전병철옮김

손복(孫復,992∼1057)
손복(孫復,992∼1057)은호원과함께그명성을나란히했으며,송학(宋學)의선구자로일컬어진다.그의자는명복(明復),호는태산(泰山)·부춘(富春)이며,지금의중국산시성(山西省)핑양(平陽)사람이다.네번과거시험을쳤으나급제하지못하자,물러나태산의남쪽기슭에서살았다.그러므로사람들이그를‘태산’이라고호칭했다.석개(石介)는산동지방에서저명한사람이었는데,몸소제자의예를갖추고그를스승으로모시며배웠다.석개는손복의지팡이와신발을들고곁에서모시면서,손복이앉으면자신은서있고,손복이절하고일어서면즉시그를부축했다.이모습을본당시사람들은비로소스승과제자간의예의가무엇인지를알고감탄했다고한다.손복은40세가될때까지결혼하지못했다.승상이적(李迪)이그의현명함을알아보고동생의딸을시집보냈다.
석개가학관(學官)이되자<명은편(明隱篇)>을지어‘손복이태산에은거해주공(周公)과공자(孔子)의도를닦은것은홀로그한몸만을깨끗하게하려는것이아니라,세상을이롭게하려는것’이라밝히고,손복을적극적으로추천했다.그리고범중엄과부필(富弼)의추천으로국자감직강에제수되고,이영전(邇英殿)의지후설서(祗候說書)가되었다.하지만손복의학설이이전의학자들과많이다르다는이유로양안국(楊安國)이주청해파직되었다.또한서주(徐州)사람인공직온(孔直溫)이모반을꾀하다가잡혔는데,그의집을수색하는과정에서손복의이름이적힌시가나왔다.이일로손복은다시좌천을당했다.그후한림학사조개(趙槪)의주청으로다시직강이되고전중승(殿中丞)으로이임되었다.1057년7월24일별세하니,향년66세였다.

목차

문(文)
요임금의권도(權道)에대해논함
순임금의체제에대해논함
문왕(文王)에관해논함
사호(四皓)에대해논변함
동중서론(董仲舒論)
양자(揚子)에대해변론함
한원제(元帝)의찬(贊)뒤에씀
가의(賈誼)의전(傳)뒤에씀
평진(平津)을죄줌
무위(無爲)의올바른뜻(상)
무위(無爲)의올바른뜻(하)
범천장에게보내는편지(1)
범천장에게보내는편지(2)
공급사에게올리는편지
장동(張洞)에게답하는편지
연주(兖州)추현(鄒縣)에건립한맹묘(孟廟)기문
신도당기
유자(儒者)의치욕
세자괴외(蒯聵)에대해논함

시(詩)
밀랍촛불
8월14일밤에
학생들을깨우쳐줌

부록
손명복선생묘지명병서

해설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송초삼선생(宋初三先生)
손복은호원,석개와함께‘송초삼선생(宋初三先生)’으로불린다.이들은태산의남쪽기슭에서가난과어려움속에서도진실한마음과성실한자세로강학해송나라정주학의초석이되었다.청나라학자전조망은“송나라때학술의성대함은안정(安定)호원(胡瑗)과태산(泰山)손복(孫復)이선하(先河)를이루었다.정자(程子)·주희(朱熹)두선생도모두그렇게생각했다.안정은침잠했고태산은고명했으며,안정은독실했고태산은강건했다.그리하여각자자기성품에가까운바를얻었으나,우리도를전하려고노력한점에서는같다”라고했다.또한구양수는“스승의도가쇠퇴한지오래되었더니,경우(景祐)와명도(明道)연간이래로배우는자들이스승을얻게되었다.오직선생[호원]과태산의손복,·석개,이세사람이그들이다”라고평가했다.황진(黃震)은“송나라가세워진지80년만에안정(安定)의호원선생,태산의손복선생,조래(徂徠)의석개선생이스승의도로써바른학문을밝혔다.이어서염락[濂洛,주돈이(周敦頤)와정호(程顥)·정이(程頤)]의학문이흥했다.그러므로송나라의이학(理學)은이락[伊洛,정호·정이]에이르러서야정교해졌지만,그싹은실로이세선생에서부터발단한것이다.그러므로주희(朱熹)가‘이천[伊川,정이(程頤)]은감히이세선생을잊지못했다’고말했던것이다”라고평했다.

정주학(程朱學)의선하(先河)
손복을비롯한송초삼선생은모두화려함에치중한과장된문장과불교,도교를강력히비판하고경전을숭상해유가의본질로돌아가기위해힘썼다.특히손복은≪춘추≫에탁월한식견을가지고있어,≪춘추존왕발미≫를지어공자가≪춘추≫를지은마음을유추해주나라천자를존숭하고난신적자를두렵게하고자한뜻을밝혔다.이는육순을계승해호안국의≪춘추호씨전≫이성립하는데에중요한영향을끼쳤으며춘추학사(春秋學史)에서그의미가지대하다.또한유교의사상을진작할수있도록학교의제도를정비하고인재양성에온힘을기울였다.곤궁한처지에서도열심히공부하고도를숭상하고문장을억누르며경전을존숭하고불교와도교를강력히배척한손복의풍도는이후송나라학자들의학풍과정주학의학문적특성형성에중요한지침이되었다.

≪손명복소집≫
손복을비롯한송초삼선생은그학문적위상에비해우리나라에서는그다지널리알려지지못했다.이책은손복의문집인≪손명복소집≫을완역한것으로국내에는처음소개한다.내용은산문19편과시3편으로구성되었는데,산문을문체별로살펴보면논변문13편,편지4편,기문2편이다.논변류는기존의학설을비판적관점에서고찰해올바른의론을제시하고,불교와도교에대해통렬하게비판하고,유학의도통(道統)을계승하고자노력하는손복의특징이잘드러난다.지인에게보낸편지에서는후학교육에대한관심과성인존숭에대한칭송,그리고손복의문학관을확인할수있다.기문과시에서도손복의배움에대한자세와그가지향하는학문의목표를살필수있다.비록작품수는많지않지만북송초기학자들의학문과문학을이해하는데중요한단서가될수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