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만분문록

용만분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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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1592년 4월 12일, 일본군이 부산포를 침입하며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관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쳤으며 선조는 의주로 몽진했으나,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의 의지는 곳곳에서 의병으로 일어났다. 당시 18세였던 함양의 선비 진우재(眞愚齋) 양황(梁榥)도 그중 한 사람이다. 《용만분문록(題龍灣奔問錄)》은 양황이 부친 양홍주와 함께 사재를 털어 화살대 4만 개, 화살 300부를 만들어 의주로 몽진한 선조를 찾아가 진상하고, 이를 통해 평양성 전투의 승리를 견인한 뒤 다시 한양으로 환궁하는 왕을 호종한 기록이다. 당시 전황의 급박함과 민중의 고초, 젊은 선비의 우국충정의 심정이 일기와 그 일기에 수록된 한시들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저자

양황

진우재(眞愚齋)양황(梁榥,1575∼1597)은함양출신으로,자는학기(學器)다.그는스물두살의젊은나이에요절해어떤인물인지에대한기록은그다지전하지않는다.다만여러곳에산재한그의행적을찾아유추해보면그는상당한문재(文才)를지닌비범한인물이었음을알수있다.스승이었던우계(牛溪)성혼(成渾)은양황에대해“양모(梁某)의재기는평범하지않으며,학문과문장으로힘써서그의문장은참으로대문장가의솜씨다”라고극찬했고,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는“크고넓구나.만약성취한다면세상에서드문사람이될것이다”라고하며그의장래를크게기대했다.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은양황이전장에서지은시가발군이라“일시의뛰어난선비들이문채로복종하며비록이름이알려진자라할지라도사귀기를원하지않는자가없었다”고평했다.양황의벗인농포(農圃)정문부(鄭文孚)는양황의감식안(鑑識眼)은‘하늘이감춘것도간파할만큼뛰어나다(破天藏)’고시에서말했다.그러나양황은안타깝게도그재능을다꽃피우기도전에,1593년2월에있었던제4차평양성전투에참여해입은부상에서회복하지못하고22세의젊은나이로요절했다.

목차

제용만분문록

용만분문록
임진년(1592)10월1일
10월2일
10월3일
10월4일
10월5일
10월7일
10월13일
10월14일
10월15일
다음날(10월16일)
10월17일
10월18일
10월19일
10월20일
10월22일
11월13일
11월17일
11월25일
11월27일
11월28일
12월1일
다음날(12월2일)
모일(某日)
섣달그믐날
계사년(1593)정월초
1월6일
모월모일
모일(某日)
모일(某日)
모일(某日)

원문


해설
옮긴이후기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지만지한국문학의〈지역고전학총서〉는서울지역의주요문인에가려소외되었던빛나는지역학자의고전을발굴번역합니다.‘중심’과‘주변’이라는권력에서벗어나모든지역의문화자산이동등한대우를받을수있도록합니다.지역학문발전에이바지한지역지식인들의치열한삶과그성과를통해새로운지식지도를만들어나갑니다.

함양에서용만까지,12개월의기록
《용만분문록》은서계양홍주와그의장자진우재양황이전죽(箭竹)4만개와장편전(長片箭)300부를만들어경남함양으로부터용만,즉지금의의주까지몽진한선조를찾아가진상하고,그전죽과장편전으로평양성전투의승리를견인한뒤다시한양으로환궁하는왕을호종한기록이다.함양에서출발하는1592년10월1일부터시작해경유지와도착지를기록하고,그사이에있었던일과를적거나창작한시를수록하는것으로내용의대략을완성하고있는데,출발하는10월부터11월까지는일자별로기록되어있으나이후는상당부분이결락되어온전한형태가아니다.원래는1593년10월환궁할때까지의기록이었으나병자호란에훼손되어1592년12월과1593년의1월은대부분결락되었고,그이후는일자를알수없어서‘모일(某日)’이라고기록하고있으며간간이결락된부분이이어지다3월1일이후는완전히일실되어전하지않고있다.

한시로전하는서정
《용만분문록》의기록중에서가장많은부분을차지하는것은시다.양황은막출발한며칠을제외하고는거의모든일정에시를지어수록했는데,현재남아있는5개월간의기록에수록된작품만도5언율시16수,7언율시12수,7언절구3수,고풍1편으로모두32수다.이는양황의시만을헤아린것으로,함께수록한다른이들의시까지포함하면훨씬더많은작품이실려있다.이시들에는우국충정의심정을비롯해,전쟁중에두고온고향과가족에대한향수,그와중에도간과할수없었던아름다운고국산하에대한찬탄등,18세의젊은선비가전쟁중에느낀기쁨과슬픔,분노와탄식이고스란히드러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