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 사집(큰글자책)

이욱 사집(큰글자책)

$27.00
Description
‘사(詞)’는 당대 중엽에 발생해서 송대에 유행하다가 송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장르다. 사는 대부분 악곡에 맞춰 노래하기 위한 가사로 지어졌다. 이 책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도 사(詞)의 구절을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고 비난받는 남당의 마지막 황제 이욱의 사집이다. 화려하고 우아한 표현, 섬세하고 처연한 감성의 극치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이욱

이욱(李煜)
이욱은서주(徐州)출신으로,초명은종가(從嘉),자는중광(重光),호는종은(鍾隱)이다.오대십국시기남당(南唐)중주(中主)이경(李璟)의여섯번째아들로태어났다.송(宋)건륭(建隆)2년(961)금릉[지금의난징(南京)]에서즉위해15년간남당을통치했기때문에세칭이후주(李後主)라고한다.이욱이즉위할때부터남당은이미송의연호를사용하고있었으며971년부터는송에대해‘칭신(稱臣)’했다.개보(開寶)7년(974)송태조가여러차례이욱을변경(汴京)으로오도록했으나끝내가지않자,10월에군대를끌고강남토벌을시작했다.다음해11월에금릉이함락되고항복한후주는포로의신분으로변경으로압송당해위명후(違命侯)에봉해졌다.포로가된지3년째되던해(978),<우미인>사의“故國不堪回首月明中”,“一江春水向東流”등의구절이문제가되어독살당하고말았다.향년41세였다.후에오왕(吳王)에추증되었고,낙양(洛陽)망산(邙山)에장사지내졌다.17세에남당의원로대신주종(周宗)의딸인아황(娥皇)과결혼했다.이여인이바로대주후(大周后)라고불리는소혜황후(昭惠皇后)였다.결혼후10년정도지나서대주후가병이들자언니를간호하러궁정에들어왔던대주후의동생과눈이맞았고,소혜황후가죽자이욱은이여인을황후에봉했으며언니보다더큰사랑을주었다.이여인이바로소주후(小周后)다.소주후는후주가송에항복한후에도변경에서함께생활했으며,송태종에게개인적으로멸시를많이받았다고전해진다.후주가독살당하자소주후도슬픔끝에같은해에숨을거두었다.

목차

완계사(浣溪沙)
일곡주(一斛珠)
옥루춘(玉樓春)
자야가(子夜歌)
보살만(菩薩蠻)
보살만(菩薩蠻)
보살만(菩薩蠻)
경루자(更漏子)
희천앵(喜遷鶯)
채상자(采桑子)
장상사(長相思)
유지(柳枝)
어부(漁父)
어부(漁父)
도련자령(搗練子令)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사신은(謝新恩)
청평악(淸平樂)
채상자(采桑子)
우미인(虞美人)
오야제(烏夜啼)
임강선(臨江仙)
파진자(破陣子)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망강남(望江南)
완랑귀(阮郞歸)
상견환(相見歡)
후정화파자(後庭花破子)
도련자(搗練子)
자야가(子夜歌)
낭도사(浪淘沙)
삼대령(三臺令)
우미인(虞美人)
낭도사(浪淘沙)
상견환(相見歡)
장상사(長相思)
접련화(蝶戀花)
완계사(浣溪沙)

해설
지은이에대해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사(詞)는당대중엽에발생해서송대에유행하다가송의멸망과함께사라진장르다.사는현재의관점에서보자면당연히시(운문)의범주에속하기때문에사를시라고해도틀린말은아니다.그러나중국에서사와시는표현하는내용과사용어휘도다르다.게다가사는대부분악곡에맞춰노래하기위한가사로지어졌다는점이시와비교해가장큰차이점이라고할수있다.사는이처럼시와유사하면서도다르다.
모든문학장르와마찬가지로사또한민간에서발생했다.위진남북조이래이민족과의접촉이빈번해지자갖가지경로를통해흘러들어온서역(西域)의음악과내륙의민간가곡이결합하면서신흥속악이생겨났다.일반인들은이신흥속악에맞추어노래부르기시작했고,그노랫말이바로사다.성당(盛唐)시기에접어들면서사회가안정되자민간에서대량의사가쏟아져나왔고유명문인들도이신흥장르에관심을가지게되었다.악곡의가사용으로창작되던사라는신흥문학형식은만당시기에이르러더욱발전해정식문학장르로자리잡게되었다.그리고오대십국시대에는이욱과같은황제마저도사작(詞作)에전념하는등사가시대를대표하는문학장르가되었다.
이욱이즉위하기전부터도남당의국력은이미기울어있었다.그의아버지중주때에도후주(後周)의강공전략앞에서후주의명에순종할수밖에없었다.북송건립후에중주는남당의수도를강서성남창(南昌)으로옮기고금릉에는태자인이욱만남겨놓았다.그리고몇달뒤중주가병사하고이욱이25세의나이에남당의군주가되었다.
이욱은문장뿐아니라서예와음악과그림에도뛰어났다.그래서그는황제이전에문인이었고,문인중에서도타의추종을불허하는훌륭한사인이었다.불행이라면이런그가황제가된것이다.문인의감정과시각으로위기에빠진조국,소용돌이치는강대국과의대치국면을헤쳐나가는것은불가능그자체였을것이다.그런그가할수있는일이라고는신앙으로불경을낭송하고,취미활동으로사를짓고,여흥으로연회와가무를즐기며취생몽사하듯살아가면서송나라가와서남당을거두어줄날만을기다릴수밖에없었을것이다.
이욱의부친이었던중주이경또한훌륭한사인이었다.게다가대신들중에는시사의대가였던풍연사(馮延巳)도있었다.이런남당의문화적인분위기속에서이욱은당시만해도신흥문학장르였던사의새로운경계를열었다.이욱에대한일화로빠지지않고회자되는것은,조광윤의군대가금릉을포위하고있을때에도“櫻桃落盡春歸去”로시작하는<임강선>의사구를놓고고민했다는것이다.그러다가이사를다짓기도전에송의군대가금릉을함락해그는포로의신분으로변경[汴京:개봉(開封)]으로압송되었고,변경에서이사의마지막세구절을완성했다고한다.
이욱의사풍은송의포로가되어변경으로끌려가던975년을전후로확연하게나뉜다.그래서이욱의사는대체로전기와후기두단계로구분한다.전기는중국최초의사집으로후촉(後蜀)의조숭조(趙崇祚)가편찬한<<화간집(花間集)>>의사풍을그대로답습해궁궐의호화로운생활과극도의우수를담아내던시기였다.그리고후기는송의포로가되어생활하던시기로,이시기의사가예술적으로나후세에대한영향력면에서가장뛰어나다.“春花秋月何時了”로시작하는<우미인>,“簾外雨潺潺”으로시작하는<낭도사>,“四十年來家國”으로시작하는<파진자>는지금까지도애송되는천하의절창이다.특히<우미인>은덩리쥔(鄧麗君)이<근심이얼마나많으신지요?(幾多愁)>라는제목으로노래함으로써현대인의열렬한사랑을받기도했다.이후기의사풍은소식(蘇軾)과신기질(辛棄疾)등의호방파사풍을선도했다고할수있다.결론적으로이욱의사는<<인간사화(人間詞話)>>에서왕국유(王國維)가이야기한것처럼“이후주에이르러서사의경계가확대되고느낌이깊어졌다”라고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