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성의 하녀님 1 (소리엔 장편소설)

공작성의 하녀님 1 (소리엔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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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소리엔 장편소설『공작성의 하녀님』제1권. 마왕의 제물이 된 공주 세레니안. 마법진 위에서 눈을 뜬 그녀 앞에 펼쳐진 세상은 300년 후,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왕국의 자랑이던 공주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고, 설상가상 그녀의 상징인 은발과 은빛 눈동자까지 까맣게 변해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뿐.
저자

소리엔

저자 소리엔은

이야기를 사랑하는 공상가.
친한 친구처럼 편안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2015 카카오페이지X도서출판 가하 공모전’특별상 수상.

목차

1부
#01. 돌아온 공주
#02. 입성
#03. 수습 하녀 세레나
#04. 동쪽 방의 주인
#05. 시녀의 품격
#06. 빛을 삼킨 밤
#07. 솔즈베리 백작부인
#08. 실종된 공작
#09. 레치넨티아의 의미
#10. 여름 장미 축제
#11. 움직이는 마음
#12. 한여름 밤의 꿈
#13. 마녀 사냥

출판사 서평

아나이스 여신이시여. 이것은 당신의 안배입니까.

마왕의 제물이 된 공주 세레니안.
마법진 위에서 눈을 뜬 그녀 앞에 펼쳐진 세상은
300년 후, 대륙의 북쪽 끝이었다.

“엄마, 예쁜 언니가 깨어났어요!”
“아유, 사흘 동안 꼼짝없이 숨만 쉬더니 드디어 눈을 떴네. 어디 정신이 좀 들어요?”

왕국의 자랑이던 공주의 존재는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혔고,
설상가상 그녀의 상징인 은발과 은빛 눈동자까지 까맣게 변해버렸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뿐.

“나……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요.”

이제 공주, 아니 수습하녀 세레나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발루아 공작이 다스리는 잿빛 겨울성에서!

책속으로 추가
중년 여성은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말을 끊고는, 서둘러 딸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참으로 무례한 백성들이로구나. 공주는 처음 겪는 그녀들의 무시와 외면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허나 목숨을 구해주었다 주장하는 자신의 은인들이 아닌가. 한 번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관용을 베푸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집을 탐탁지 않게 둘러보던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누더기 원피스를 보고 기겁을 했다.
‘서둘러 새 드레스를 가지고 오라 이르고 집 안 청소부터 다시 시켜야겠어.’
머리를 저은 공주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줄 모녀가 나간 문을 덩그러니 바라보고 있으려니, 둘의 대화가 벽을 타고 드문드문 들려왔다.

“저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언니가 불쌍해요.”
“호수에 몸을 던진 후유증 때문일 게야. 아마 곧…….”
“……공주님 놀이는 나도 여섯 살 때까지 하고 접었는걸요.”
“어쩔 수 없지. 하나부터 차근차근 다시…….”

잠시 후,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들어온 중년 여성은 세 살배기 어린애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듯,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던 건국 역사부터 그녀를 구했던 당시의 이야기까지 차근차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죠. 이곳은 엘베른 13세가 마왕과 마물을 몰아내고 세운 제국 루이네리아, 발루아 공작령의 그림자 숲 마을. 전쟁이 끝나고부터 사용한 제국력으로 지금은 362년이고. 얼음 호수에 빠져 꽁꽁 얼어 있던 나를 구한 것이 바네사, 당신과 레니.”
“맞아요. 이해가 빠르군요.”

바네사는 박수를 치며 기꺼워했다. 기껏 목숨을 구해줬더니 기억 상실증 따위에 걸려 못 쓰게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었다. 이 상태로라면 금방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도 떠올릴 것 같았다. 말만 한 처녀가 어쩌다 이 험한 곳까지 와서…… 하여간 달빛 호수라니.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란데 산맥 중턱에 위치한 호수는 달빛을 받으면 표면이 은빛으로 신비롭게 반짝인다 해서 달빛 호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대륙의 끝’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기도 한 이 호수는 신기하게도 1년 내내 쌓인 눈이 녹지 않는 산맥에 있으면서도 물이 얼지 않았다. 그것이 어떻게 소문이 난 것인지 종종 멀디먼 내륙에서까지 절망한 사람들이 찾아와 이렇게 하나둘씩 빠져 죽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구한 소녀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건가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나는…… 난 밖에 나가봐야겠어요.”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다. 바네사는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 그렇게 해요. 밖은 어제까지 내린 눈으로 미끄러우니 조심하고.”

소녀는 레니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바네사는 절뚝거리는 그 모습마저도 그림이 된다고 생각했다. 있는 땔감 없는 땔감 쪼개어 불을 피우고 사흘씩이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도 소녀를 돌본 것은 자신이 꼭 인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어서는 아니었다. 결혼식 날 보았던 여신상의 모습이 꼭 이렇게 생겼던 것 같다. 일전에 멀리서 보았던 황녀 출신의 전 공작부인보다 아직도 시체 같은 소녀가 몇 배는 더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물을 머금어 축 늘어진 검은 머리칼만 아니었더라면 틀림없이 어디의 지체 높은 귀족 영애라고 믿었을 것이다.
같은 여자지만 바라만 봐도 눈요기가 되는 이 소녀를 그대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딸인 레니도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낯선 손님을 간호한다, 약초를 구해 온다 난리였다.

“맙소사……!”

공주는 당혹감에 휩싸여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온통 하?다. 엘베른 왕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직 책으로만 보아왔던 눈이 숲 속 작은 마을을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몹시 찼다.
그녀는 잠시 몸을 떨다 마을 너머로 굽이굽이 이어진 험준한 산맥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을을 에워싸듯 겹겹이 늘어선 산맥의 장엄한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마치 이곳이 세상과 격리된 육지 속 섬과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세레니안 라 엘베른. 대륙의 네 왕국 중 하나인 엘베른 왕국의 셋째 공주는 자신이 어떤 때에도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왕족의 교육을 받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이 상황과 풍경을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저 모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허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자신은 지금 마법진에 올라선 그날로부터 약 300년이 지나 대륙 정반대편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깨어난 셈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지. 마왕을 봉인하는 마법진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주문이라도 적혀 있던 것일까? 공주는 옆에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꼬질꼬질한 계집아이에게 물었다.

“달빛 호수라 했니? 나를 발견한 곳이.”
“그랬죠, 엄마의 말에 의하면요.”
“괜찮다면 날 그곳으로 데리고 가주겠니?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도무지…… 믿기 어려운 얘기들뿐이구나.”

레니는 공주의 부탁에 선뜻 응했다.

“호수로 가는 거야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그전에 안으로 들어가 꽁꽁 무장을 해야 해요. 산 위로 올라가면 여기보다 배는 더 추울 거거든요.”

집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두꺼운 외투와 털 장화를 신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아주 오랜만에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온몸의 부자유스러움과 통증을 무시하며 공주는 걸음을 떼었다.
몇 번이고 기운 자국이 있는 외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신고 있는 털 장화에서는 작은 돌들이 덜그럭거리며 연신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옷도 신발도 당장이라도 훨훨 벗어던지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그녀는 계속 걸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옷과 신발 따위가 아니었다. 이곳이 왕국과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 300년이 지났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지 알아내야 한다.
호수로 향하는 이가 적지 않은지 길은 퍽 잘 다듬어져 있었다. 한편 아무리 걸어도 하얀 눈과 나무뿐인 낯선 풍경에 공주의 신경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그녀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인 레니는 별다른 대화도 없이 산을 올랐다. 길게 이어지던 적막을 깬 것은 공주도, 레니도 아닌 낯선 누군가였다.

“레니, 어딜 가는 길이니?”
“한스 오라버니.”

레니를 부른 이는 얼굴 가득 주근깨가 난 비쩍 마른 청년이었다. 별생각 없이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같은 마을 소녀를 불렀던 한스는 그 옆에 서 있는 공주를 보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누구지? 저 아가씨는.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 있는지는 처음 알았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 있는데 세상에, 눈이 얼굴의 반이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또 어떻고……. 넋이 나간 한스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침이 떨어질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던 공주는 처음 보는 누군가의 등장이 일단 반가웠다. 그래서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그의 상태는 아랑곳 않고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졌다.

“말씀 좀 묻겠어요. 혹시 지금이 몇 년도인지 대답해줄 수 있나요? 이곳은 어디죠?”
“예, 예?”
“대륙을 침공했던 불의 마왕은? 마물들은 정말 깨끗이 물러난 건가요?”
“마왕에 마물이라니…….”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한스는 어리둥절했지만 그렇다고 이 낯선 미녀와의 대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얕게나마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가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혹시…… 전설처럼 내려오는 건국 초의 ‘그 이야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신이라 칭송받던 초대 황제 폐하의 막내 따님이 몸을 바쳐 마왕과 분신했다는. 여기가 바로 마왕이 나타났다는 그란데 산맥 위에 지어진 마을 아닙니까.”
“그럴 리가…….”
“그나저나 여기선 처음 뵙는 얼굴 같은데, 아가씨께선 누구십니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공주는 꽃 같은 얼굴을 심하게 일그러뜨리며 청년의 옆을 그대로 지나쳤다. 그림자 숲 마을 촌장의 아들인 한스는 난생처음 본 아름다운 아가씨가 눈물을 흩뿌리며 사라져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미안, 미안. 다음에 설명해줄게. 언니, 같이 가요!”

레니가 한스에게 사과의 손짓을 건네며 저만치 뛰어가는 공주를 좇았다.

산맥을 올라 달빛 호수에 도착했을 때 공주는 말을 잃었다. 잔잔한 호수 너머로 햇살을 머금은 눈 덮인 산의 비경은 눈부신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어디선가 들리는 맑은 새소리가 그녀의 귀를 간질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마왕은 사라졌고 혈족들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세워 엘베른 왕가의 위엄을 드높였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 있었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경배와 찬탄, 질시를 한 몸에 받다 끝내 제물로 끌려갔던 삶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누군가가 되어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하고 있다.
아나이스 여신이시여. 이것은 당신의 안배입니까.
공주는 자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