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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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 책은 “우크라이나 민족사”라는 인식의 감옥을 벗어나 “우크라이나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민족문제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의 중간 결산이라 할 수 있다. 한때는 “소러시아”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지역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중첩된 모순과 역설 및 혼돈의 역사였으니, 18년 전 필자가 만난 “우크라이나어 방언을 모국어로 구사하는 열혈 러시아 애국자” 향토사학자의 존재야말로 이러한 문제적 역사가 남긴 흔적과 자취의 편린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노인의 사례가 크라스노다르주의 우크라이나계 주민 모두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적어도 쿠반의 수르지크 사용자들이 “진짜 우크라이나인”이라던 이 노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으며, 따지고 보면 상당 부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원래 카자크가 활동하는 “변경” 지역을 지칭하던 동슬라브어 일반 명사였다(1장 참조). 따라서 당시에는 카자크만이 우크라이나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사람은 전원이 곧 카자크였다. 더 나중 시기인 17세기로 가도 카자크 현상과 우크라이나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현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되는 “카자크 헤트만 국가(우크라이나어: Het’manshchina, 러시아어: Getmanshchina)”를 건립한 주역부터가 바로 자포로지예(Zaporozh’e) 카자크였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또한 바로 이 카자크 정체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3장 참조).
저자

구자정

Koo, Ja-Jeong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대학(UC Berkeley)에서 근현대 유럽사 전공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대전대학교 혜화리버럴아츠 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 연구 관심 분야는 러시아/우크라이나/동유럽의 민족문제, 러시아 혁명, 식민지 근대성, 역사 이론, 포스트 맑시즘, 유럽 정치사상사 등이다. 논문과 공저로 「“슈뢰딩거의 클레오파트라?”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 경계에 선 한국서양사학」 「역사학보」 251, 2021, pp. 459-477, “From an Estate to a Cossack Nation: Kuban’ samostiinost’, 1917,” Europe-Asia Studies, 66-10, 2014, pp. 1649-1678, “Universalizing Cossack Particularism: ‘the Cossack Revolu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Kuban’,” Revolutionary Russia, 25-1, 2012, pp. 1-29, 「소비에트 연방은 왜 해체되었는가? - 소련의 “이중 체제”와 “민족 창조 정책”을 통해서 본 소련 해체 문제의 재고 -」 「역사학보」 210, 2011, pp. 357-405, 「혼돈의 시대, 명쾌한 이코노믹스」 (박영사, 2022), 「대륙의 미학 역설의 시학」 (삼인, 2020), 「러시아 근대사」 (민속원, 2014) 등이 있다.

목차

Chapter 01
카자크 현상과 카자크의 땅 ‘우크라이나’의 탄생 1
Ⅰ. 들어가는 말 3
Ⅱ. 스텝 문명과 정주 문명의 경계에서: “콰자크”에서 “카자크”로 8
Ⅲ. “사회 현상”과 “사회 조직”의 경계에서 - 카자크 보이스코(Voisko)의 출현 28
Ⅳ. 맺음말을 대신하여 : “카자크 신분”으로의 길과 “카자크 국가”로의 길 51

Chapter 02
우크라이나 역사의 카자크적 기원과 루시(Rus’) 정체성 55
Ⅰ. 들어가는 말 57
Ⅱ. 카자크 현상의 태동과 자포로지예 셰치의 형성 62
Ⅲ. “카자크 길들이기”와 카자크의 신분화 76
Ⅳ. 카자크 반란과 우니아트 교회 87
Ⅴ. 맺음말을 대신하여 99

Chapter 03
「루시인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민족서사의 첫 탄생 103
Ⅰ. 들어가는 말 105
Ⅱ.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왜” 시작되었는가? 110
Ⅲ.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어떻게” 태동하기 시작하였는가? 122
Ⅳ. 맺음말을 대신하여 140

Chapter 04
악마와의 계약? -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 145
Ⅰ. 문제의 제기 147
Ⅱ. 우크라이나 파시즘의 기원 : UVO와 “우크라이나 파시즘의 아버지,” 드미트로 돈초프 158
Ⅲ. OUN의 조직과 이데올로기 172
Ⅳ. “축제”로서의 학살: 반(反)유대주의 포그롬과 폴란드인 대학살 193
Ⅴ. 에필로그: OUN의 새로운 계약? 212

Chapter 05
독일 무장친위대 제14척탄병사단 ‘할리치나’, 1943~1945 217
Ⅰ. 들어가는 말 219
Ⅱ. 할리치나 사단의 탄생 226
Ⅲ. 브로디 전투(Bitva pid Brodami) 244
Ⅳ. 사단의 재건 - “할리치나 사단”에서 “우크라이나 사단”으로 253
Ⅴ. 맺음말을 대신하여 267

맺음말을 대신하여(Quo Vadis Russia?) 275

출처 282
참고문헌 284
찾아보기 308

출판사 서평

필자가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버클리 대학(UC Berkeley) 박사과정생으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필자는 러시아 현지 문서보관소 자료 조사를 위해 남부 러시아 크라스노다르(Krasnodar)주 지역을 방문했었다. 제정 러시아 시기에는 “쿠반(Kuban’)”이라는 지명으로 불렸던 크라스노다르 지방은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러시아 연방 내의 작은 우크라이나”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때 필자는 크라스노다르주 국립 문서보관소 열람실에서 만나 친해진 한 향토사학자의 초대로 크라스노다르시 서쪽에 자리한 옛 협동 농장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략 20, 30가구 정도의 주민이 살던 이 마을은 과거 후토르(Khutor: 카자크의 농장)가 모여있던 곳으로 주민 전원이 우크라이나계였다. 물론 이 주민들이 말하던 우크라이나어는 현대의 표준 우크라이나어와는 많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마을 주민들이 구사하던 우크라이나어는 어법과 단어에서 러시아어가 많이 섞인 “수르지크(Surzhik: 우크라이나어의 방언)”였기 때문이다.
현대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현대 러시아에서도 물론) 수르지크는 표준어가 아니라 일종의 방언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필자를 초대한 향토사학자의 말은 달랐다. “우리가 쓰는 우크라이나어 입말, ‘발라치카(Balachka: 쿠반 카자크가 사용하는 수르지크)’가 진짜배기 우크라이나말이요.” 카자크를 직계 조상으로 둔 이 향토사학자가 덧붙인 말도 기억난다. “젊은이, 사실 진짜 우크라이나인은 우리 카자크뿐이라오.” 자신의 선조인 카자크 조상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노년의 이 카자크 향토사학자는 또한 확고한 러시아 애국자였다. 우크라이나 카자크의 피가 흐르는 이 전직 엔지니어 연금생활자에게 우크라이나 정체성과 러시아 애국주의는 상호 충돌하는 가치가 전혀 아니었다. 그에게는 러시아인이 우크라이나인이고 우크라이나인이 곧 러시아인이었는데, 이 카자크의 후예에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묶는 공통의 정체성은 바로 러시아/우크라이나가 공유하는 유산인 “카자크”로서의 역사적 자의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로 이 자의식이야말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에서 엔지니어로 젊은 시절을 보낸 이 노인이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카자크 역사를 탐색하는 향토사학자가 된 이유였다.
필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공존하는 이 카자크의 후예로부터 실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필자가 읽어야 했던 사료는 상당수가 수르지크로 쓰여 있었는데, 문서보관소 열람실에 개근하며 필자가 물어볼 때마다 사료 해석을 도와주던 이 노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자가 그 많은 자료를 어찌 단시간 내에 검토할 수 있었을까? 특히 필자에게 핵심적 사료였던 1919년도 크라스노다르주 지역 의회(쿠반 라다: Kuban’ Rada)의 의사록은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고 사전에 없는 단어들도 많아서 해석에 특히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때 수르지크가 모국어였던 향토사학자 “올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도움이 없었다면 필자가 당초 6개월로 예정했던 이 지역 사료조사 필드웍을 계획한 시간 내로 마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근대적 정체성과 카자크로서의 전근대적 자의식이 공존하던 “쿠반 카자크” 올렉산드르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또한 필자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민족문제” 전공자로 거듭날 수 있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러시아사, 독일사, 프랑스사 등 국민국가별 경계가 역사연구의 대상을 구획 짓고 있는 한국 역사학계의 현실에서 이 지역 민족문제를 전공하는 필자는 언제나 전통적 의미의 러시아사 연구자로 호명되었지만, 필자는 이 호명을 굳이 거부하거나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필자가 아무리 설명해도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라는 한국 사회 속 “인식의 감옥”을 깨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필자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근대적 의미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던 전근대 시기 인물에게 러시아 또는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국적을 부여하려는 민족사 창조 공정을 우리는 과연 역사연구라 부를 수 있는가? 카자크의 지도자였던 보그단 흐멜니츠키(Bogdan Khmel’nitskii: 1595∼1657)나 마제파(Ivan Mazepa: 1639~1709)에게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찾는 행위가 흐멜니츠키의 “이메일 주소”나 “페이스북 아이디”를 찾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물론 흐멜니츠키에게 이메일 주소는 없었다. 17세기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다. 흐멜니츠키를 현 우크라이나의 선조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언정 그는 현대적 의미의 우크라이나인이 결코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현대적 의미의 “우크라이나”라는 관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로 비유하면 고려가 비록 Korea란 단어의 어원이 되었을지언정 고려=대한민국이 결코 아닌 것처럼 말이다. 물론 흐멜니츠키는 현대적 의미의 러시아인도 아니었다. 당대의 맥락에서 이 인물의 민족 정체성을 굳이 규정하자면 “카자크 활동 경력이 있는 루시(Rus’)인 지주”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 민족사”라는 인식의 감옥을 벗어나 “우크라이나 문제”의 역사적 진실을 민족문제의 시각에서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의 중간 결산이라 할 수 있다. 한때는 “소러시아”라는 이름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지역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이 중첩된 모순과 역설 및 혼돈의 역사였으니, 18년 전 필자가 만난 “우크라이나어 방언을 모국어로 구사하는 열혈 러시아 애국자” 향토사학자의 존재야말로 이러한 문제적 역사가 남긴 흔적과 자취의 편린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니었을까? 물론 이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노인의 사례가 크라스노다르주의 우크라이나계 주민 모두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적어도 쿠반의 수르지크 사용자들이 “진짜 우크라이나인”이라던 이 노인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으며, 따지고 보면 상당 부분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라는 단어는 원래 카자크가 활동하는 “변경” 지역을 지칭하던 동슬라브어 일반 명사였다(1장 참조). 따라서 당시에는 카자크만이 우크라이나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사람은 전원이 곧 카자크였다. 더 나중 시기인 17세기로 가도 카자크 현상과 우크라이나는 상호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현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되는 “카자크 헤트만 국가(우크라이나어: Het’manshchina, 러시아어: Getmanshchina)”를 건립한 주역부터가 바로 자포로지예(Zaporozh’e) 카자크였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또한 바로 이 카자크 정체성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3장 참조).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바로 그 “우크라이나”라는 관념을 처음으로 탄생시킨 당사자인 “자포로지예 셰치(Zaporozhskaia Sech)”의 “직계” 후손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나라가, 지금의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라는 사실이야말로 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이는 셰치의 카자크 절대다수가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의 명령에 따라 흑해 연안 쿠반강 연변으로 이주하여, 새롭게 창설된 “쿠반 카자크 보이스코(Kubanskoe kazach’e voisko)”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친분을 쌓았던 향토사학자를 포함하여 크라스노다르주에서 만난 수많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들은 모두가 이들 우크라이나계(당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러시아”계) 쿠반 카자크의 후예였다. 
한때 망각하고 있던 18년 전의 일화가 필자의 뇌리에 다시 새삼스럽게 떠오른 이유는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과 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 느닷없이 등장한 “쿠반 카자크”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지역을 공부하는 전 세계의 다른 연구자들처럼 필자 또한 브콘탁테와 트위터, 틱톡, 텔레그램 등 SNS에 올라오는 러시아발 또는 우크라이나발 영상과 소식을 틈날 때마다 체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2022년 9월 어느 날 한 친러 SNS 계정에 포스팅되었다가 잔혹성을 이유로 삭제된 한 동영상이었다. 그 영상은 우크라이나군과 러시아군 간 치열한 공방의 무대가 된 크라스니 리만(Krasnyi Liman) 전투에서 한 친러시아 민병대 군인을 촬영한 것이었는데, 우연히 이 영상을 보던 필자에게는 18년 전 만났던 올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친러”를 상징하는 Z 표식이 선명한 군복을 입은 채 흥분하여 절규하는 러시아 측 병사의 입에서는 바로 우크라이나어,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과거 크라스노다르 체류 시 수도 없이 들었던 우크라이나어 수르지크 방언, “발라치카”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가 만드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분노어린 저주의 욕설을 “우크라이나어”로 내뱉던 이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군인”은 대체 어디에서 온 사람이었던 것일까? 순간 감이 짚이는 것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