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동안 (고선 소설집양장본 Hardcover)

천년 동안 (고선 소설집양장본 Hardcover)

$19.12
Description
고선 작가의 소설집 『천년 동안』. 유년의 기억, 가족애, 은밀한 관능성이 교묘하게 엮여 있는 아홉 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다. 소설의 역할 중 중요한 한 가지가 세상 한구석에서 서럽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의 생을 전하며 대신 아파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들은 그 역할에 충실하여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들에게 공명하고 있다.
저자

고선

저자고선은전북부안에서태어나협성대학교와한신대학교문예창작대학원을졸업했다.2007년『한국소설』에단편소설「울밑에선당신」을발표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같은해,시전문계간지『시와시학』에서신인상을받았다.시집『내처음의딸이라섹을하는동안』이있다.

목차

청동의방
초록뱀
천년동안
빨간구두발자국
갈치총각
꽃신한짝
아주오래낯익은
석두가왔다
백만송이장미

작품해설:구원의서사에새겨진감각의영원성_김문주

출판사 서평

■도서소개
약하고밀려난것들을향한공명


고선작가의소설집『천년동안』이〈푸른사상소설선13〉으로출간되었다.유년의기억,가족애,은밀한관능성이교묘하게엮여있는아홉편의작품들이실려있다.소설의역할중중요한한가지가세상한구석에서서럽고외롭게살아가는이들의생을전하며대신아파하는것이라면,이작품들은그역할에충실하여소외되고연약한존재들에게공명하고있다.

■출판사서평
현실의폭력에상처를입고신음하는세상의모든약하고밀려난존재들에대한짙은공감을소설가는아홉편의작품으로빚어냈다.
병약했던아버지와새로운남자들과의만남에서그아버지를추억하던어머니,그러한유년시절과현재가몽환적으로교직되고있는「청동의방」,아기를빼앗기고미쳐버린여인과어린소년소녀의사랑을이야기하는「초록뱀」,나비와큰아버지의추억을흥얼거리는표제작「천년동안」전쟁터에서사라져버린오빠와어른이되어가는누이의교감을신발의원형적상징으로묘사해내는「빨간구두발자국」,아버지가부재한상황에서시장골목에서자라나며너무일찍어른이되어버린어린소녀가들려주는「갈치총각」……고선의소설들은마치구전설화나주술적인무가처럼신비로운옛이야기를속삭이며현실과환상을오간다.그리고그속에서유년시절의슬픈기억과상처입은가족애와,은밀한관능성을교묘하게엮어나간다.

■작가의말중에서
전생을잊을수없는까닭일까
간이역으로가는길
철길옆
처마낮은붉은벽돌집
그벽돌집이유달리정겨운건,

분꽃피는마당
내생각의울타리감고오르는덩굴장미
예사롭지않아

아주오랜옛날
나는그집의첩이었거나계집종이었거나

분꽃이피고장미가피는내내
내몸에분내가나고
본처의손톱같은붉은가시에찔려,
나는필시
누군가를친친감아올린
시앗,또는그몸종이었으리

폭풍우와지축을흔드는우렛소리지나
현생으로건너와
이렇게망연히바라보는날,

뒤란두레박소리,나지막이
담장을넘어오는먼그집앞
―「그집앞」전문

처음엔꽃피고새가우짖었으나,곧눈비와폭풍우가몰아치는날이많았다.지쳐가던어느한때,무연히돌린눈길속으로나지막한장미울이들어왔다.덩굴장미가붉게붉게타오르고있었다.내전생의처마낮은빨간벽돌집이었다.

나의전생은계집종이거나첩이었지만실은“그집”의셋째딸이지않았을까?

지축을뒤흔드는폭풍우에휩쓸려나는현생으로건너온것일지도모른다.

오래내가마실가있는사이등장한계부나계모의수작으로그집마당에갇혀버렸는지도모르겠다.현생의꿈속에서언제나나는흐득거리니까,장미울이있는집대문을두드리다깨어나고는했던것이다.

삶은너무고단했고,지독하게외로웠다.뒤늦게찾아온문학에의열망이유일한구원의처소였다.그열망의힘으로이야기들을엮었다.
문학만이나에게유일한등불이고,나는그안에서온전히충만해진다.여기있는이야기들은그밝고충만한순간들의기록이다.내존재의진정한의미를나는그속에서확인할수있었다.

■작품해설중에서
언어예술이자시간예술인소설장르는통념상시나드라마보다이성적능력이더욱요구되는영역이다.서사구성과기획은본질적으로고도의전략적이성이필요한부분인데다,단편소설은세부요소들의유기적짜임이좀더요청되는문학적형식이다.갈래자체의일반적인성격으로본다면,소설은형(形)에해당하는구성력이장르의미의식을견인하는핵심요소라고할수있다.
그러한점에서고선의소설은서사장르의주류적성격으로부터일탈해있다.그의소설은본질적으로상징적이고,때때로몽환적이다.고선은서사자체의장력에치중하기보다인물이나대상에대한서술을통해생(生)에관한느낌과태도를표명한다.그표명의양상은일정한성격을드러내는인물들이나그들에관한연민의서술방식을통해,한편으로는사물세계에대한서술자의주관적인묘사를통해개진된다.여기에서눈여겨볼대목은고선의소설에유년의서술자가빈번하게등장한다는것,혹은성인화자라고하더라도성장기의기억을중요한정서적자질로보존하고있는서술자에의해소설이씌어진다는점이다.그래서그녀의소설은이성에기초한세계의서사적이해라기보다우리들의유년기의경험이나기억이그러한(했던)것처럼,선험적이고원초적인감각으로포착한이세계를그려낸다.하여우리가고선의소설에서보게되는것은‘지금-이곳’의현실이라기보다어떤생(生)의정념들,몇컷의풍경으로각인된생의감각이다.그녀의소설이때때로서사를벗어나,아니서사적필연성을사물세계에대한몽환적감각으로우회하는것은,이세계에대한작가적이해를표명하는한방식인셈이다.

고선의소설에는마치광속의풍경처럼시간의더께를입은내면의서사들이경이롭게들어앉아있다.희미한빛으로둘러싸인사물마냥옛정취를입고있는그녀의서사들은현실과환상을오가며생의비의(秘義)를그려낸다.그녀의소설이주는기이한느낌은어떤주술에든것처럼이세계의알수없는힘속으로읽는이들을밀어넣는다.그것은고선의소설이기반하고있는동화적환상과신화적원초성에서기인한것일텐데,이러한성격은하나의작품뿐만아니라그녀의소설세계,나아가고선의문학전체를가로지르는특징이다.뜻밖의돌출과서사적비약을자연화하거나특정한이미지주위를끝없이선회하는서술전략은그녀의소설이주술력을선취해내는타고난능력인바,이는고선의글쓰기가본질적으로어떤세계에‘들려’있는자의작업임을시사한다.찰나에서이세계의본질을포착해내는것을‘시적’이라고말할수있다면,고선의글쓰기는장르적경계를떠나모두시적이다.그녀는자신의생을스쳐간어떤순간에들른자이며,그순간을에피파니(epiphany)로서공궤(供饋)하는자이고,이미지의영원성을사는자이다.
그녀의서로다른소설에서우리가어떤형제애를느끼게되는것은,상이한서사에흔적처럼박혀있는이미지들의친연성,변주되면서다시돌아오는모티브들의완강함때문일것이다.뿌리식물처럼순간의기억들을영원의이미지로서줄줄이매달고있는(무)의식의도저함이그속에는자리잡고있다.고선의소설에서우리가겪게되는데자뷔(d?j?vu)의경험은변주되면서반복되는이완강한서사적모티프나이미지들의선회에서기원하는것일터이지만,이는궁극적으로세계를감수(感受)하는그녀의생-체험양상의문학적반영이라고할수있다.그녀의작품을휘감고있는혼몽함은여기에서비롯된다.이는그녀의글쓰기를구성하는내용이자형식적특성이다.

고선의소설에나타나는가장중요한특징중의하나는서술자가주로어린여자아이라는점이다.「초록뱀」의수연이나「빨간구두발자국」의은우,「청동의방」의‘나’,「갈치총각」의아랑,「천년동안」과「꽃신한짝」의은희등,「백만송이장미」,「아주오래낯익은」을제외하고소설집에수록된작품들에는모두유년의여성화자가등장한다.그녀의작품은유년화자가작품전체의서술자이거나동일인물의유/성년화자를함께배치하는경우로나눌수있지만,주된서술자가어린여자아이라는점은고선소설의주요한특징이다.서술자는세계를경험하는시선과감각의주체라는점에서성인이아닌유·소년의여성화자를주요서술자로삼는고선의소설은그자체로서의미있는개성을시사한다.세계를이해하는인식수준의한계에도불구하고어린여자아이가서술자로빈번하게등장하는것은,일차적으로고선의서사를구성하는이야깃거리가유년시절의체험으로부터온것이라는점에서기인한다.유년의서술자가등장함에도불구하고그녀의소설에서지나온세대의생활상을구성할수있는것은작가의개인적경험이그서사를뒷받침하고있기때문이다.지금은접하기어려운소재나어휘들ㅡ씨받이,방물장수,상엿집,동동구리무장수,물자세,똑다리,소금장수,꽃신,아이스께끼,창포화장품장수ㅡ가산재(散在)해있어서그녀의소설은서사자체의핵심적성격이라고할수있는몽환성을구현하는데효과적이다.
아주먼과거는아니지만현재에는찾아볼수없는사물들이출현함으로써고선의소설은한시대의핍진한기록의성격을띠고있지만이를단순히과거경험의서사적복원으로만해석할수없는것은,그녀의작품들에나타나는어떤반복적친연성때문이다.이친연성은유사한성격을띤유년화자에서비롯된것이지만본질적으로그러한화자를서술자로삼게되는(무)의식적동기에서연원한다.기억의생태학이라고할수있는그녀의소설에서어떤일군의모티프들이반복해서등장하는것은이와관련된다.고선의소설은왜유년화자로말하는가?아니유년화자로말할수밖에없는가?이물음에답하는것은고선소설의의미를해명하는일이다.

고선소설의유년화자는폭력적인현실과생의결핍으로인해내상(內傷)을입은존재들이다.그들은대체로부모로부터온전한사랑을받지못하거나강퍅한현실환경에노출됨으로써어른들의세계에일찍눈을뜬자들이다.영악하고위악적인이러한유년화자의반복적인등장은고선의서사가단순히작가의현실적체험의소산을넘어이세계에대한어떤(무)의식적태도임을의미한다.폭력적인현실로인한고통을성인의서술자가아닌유년의여성화자를통해형상화하는것은해소될수없는상처의근원성,이생의치명적인비극성에대한표현이다.아이들에게오는고통은그들의생속으로깊이뿌리를내리는법이다.고선의유년화자가보여주는조숙한내면과위악성은어찌할수없는이생의비극성을받아안는작가의(무)의식적전략이자섬뜩한서사적대응인셈이다.세계에대한거부나싸움걸기방식이아닌독특한활력을지닌유년-여성화자로의내면화는생에대한고선의감수/대응방식이다.드물게도성인화자가등장하는「아주오래낯익은」의서술자가,아버지와대물림된동생의도박으로인해경험한헤어날수없는삶의부하를고선의유년화자는생래적인결핍으로서무의식적으로내면화하고있는셈이다.
그런데이유년의화자는영악하고위악적이지만그악스럽거나악마적이지않다.이는고선소설의전체적인경향,따뜻한비관주의와연관된다.그녀는폭력적인현실에대항하기보다이를생의운명으로서받아들이고인간에대한보편적인연민으로감수한다.아버지가부려놓은짐때문에평생을고통속에서살았음에도불구하고「아주오래낯익은」의서술자는부친과동생의삶을회한의생으로서받아들인다.“눈보라가휘날리는바람찬흥남부두에∼”로시작하는아버지의노랫말을상기하면서,술집에서마주한가난한노인의그림자에아버지와아버지로인해자살한형,그리고평생의짐이었던동생과고단한삶을살아가고있는아내의그림자를겹쳐놓는서술자에게는생의비극성을보편적인것으로서떠안는작가의시선이잠복해있다.앞에서언급한고선문학의음악성은이따뜻한비관주의와관련된다.위에인용한「갈치총각」의후반부대목에서김경사에게마음이흔들리는엄마의표정을읽고,아울러엄마를위로하는유년화자아랑의랩은생에대한작가의이러한양가적(兩價的)시선,즉생래적운명에의배애와이를생에대한보편적연민으로수용하는따뜻한비관주의를형상화한다.엄마의“재바르게움직이는”손과“발그레지는”얼굴에서김경사를향한이성적호감을살핀영악한서술자가,분명하지는않지만아름다움과슬픔을함께읽어내어이를랩의리듬으로표현해내는것은고선소설의성격을웅변적으로시사한다.생의진실에일찍눈을뜬조숙한화자의위악성과생의비극성을보편적연민으로서,음악적유희로서승화해내는작가적시선이그녀의유년화자속에내재되어있는것이다.세계에대한상처와치유의결점점으로서유년화자는자리하고있는셈이다.

소설은어떤이들의사정과사연을전달하고자하는마음의한형식일터,호기심에서발원한내면이공감과연민을경유하는도정,그것이소설의형식을구성하는서사일것이다.이는사연의진실을체현하는과정이라고할수있다.고선의소설은제의에서선포되었을최초의문학언어처럼,어떤사연을전달하는핍진한무당의말을닮았다.그녀의소설언어는쓸쓸하고서러운삶들,그러나입을갖지못한생을자신의몸에부려놓은여사제(女司祭)의말이라고할수있다.약하고밀려난것들을향한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