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불던 바람 (유재병 시집)

내 안에서 불던 바람 (유재병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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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기억의 재생 그리고 치유의 시학

유재병 시인의 시집 『내 안에서 불던 바람』이 <푸른시인선 12>로 출간되었다. 등단 10여 년 만에 상재한 첫 시집은 깊은 사색과 삶의 연륜이 씨줄과 날줄로 만나 이루는 언어미학이 돋보인다. 시인의 따뜻한 시선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위로해준다.
저자

유재병

저자 유재병
인천 신도 출생. 충남대학교 기계공학교육과,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2009년 『순수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인천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

목차

ㆍ 시인의 말

제1부 아이들의 바다
도깨비바늘 / 우리 아이들은, 지금 / 선인장 / 매미 / 해피 / 달맞이꽃 / 벽장 / 부엌칼의 내력(來歷) / 사랑은 / 그가 돌리는 필름 속에는 서해안이 살아 있다 / 시집 사리 / 가을 단상(斷想) / 아이들의 바다 / 사랑하기 때문에 / 내 안에서 불던 바람

제2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 / 함께 웃을 수 있도록 / 티눈 / 아이의 기도 / 조직검사 / 아름답게 보인다 / 방학날 / 무좀 / 어떤 할머니의 전화 / 빵의 흔적 / 홍시 / 능소화 / 지웠다 쓰고 다시 / 백지(白紙) 앞에서 / 비우다 / 시인이 되려면

제3부 아침 햇살
아침 햇살 / 시가 빛날 때 / 아내의 다림질 / 소래포구 갈매기 / 겨울 동화(童話) / 펜 / 봄날 / TV를 보다가 / 창피한 이야기 / 내 친구 인수 / 발 / 보름달이 방싯 / 발교산 김씨 / 행복한 산장 / 투잡스

제4부 쓴맛을 알다
지금 이 순간 / 쓴맛을 알다 / 자물쇠 / 난(蘭) / 사진첩 / 어떤 알리바이 / 고대(苦待) / 덕적도에서 / 누워 있는 나무 / 겨울 강 / 은행나무 아래서 / 그럼에도 / 다시 자연으로 / 못 / 밤바다에서 / 속눈썹

작품 해설:기억의 재생 그리고 치유의 시학 - 정연수

출판사 서평

유 시인의 이번 시집에 나타난 특징은 기억과 상처를 매개로 하여 삶의 존재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시화한 점이다. 기억 속의 상처를 시로 다루는 일은 산문 장르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데도 유 시인은 시의 미학을 잃지 않으면서도 삶의 의미와 존재 방식을 구체적으로 잘 풀어내고 있다. (중략)
유재병 시인의 시적 정조는 상처·회상·슬픔·절망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시적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가 않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과거의 상처를 통해 삶의 본질적 가치뿐만 아니라 현재의 의미를 파악하고 나선 때문이다. (중략)
유재병 시인의 시는 상처의 시간, 고통의 시간, 부서지는 시간으로 가득하다. 그런 시간을 감내하는 까닭은 바로 온전한 사랑을 위해서이다. “자신을 부딪쳐 산산이 부서질 때/바람이 된다”, “온몸을 으깨야 바람이 된다”,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그것은/사랑이 아니다/상처 입은 마음에 부어졌을 때/힘없고 가난한 이와/하나가 되었을 때/그때 비로소 마음이/사랑이 된다”(「사랑은」)는 구절은 숭고한 사랑의 참뜻을 전달하고 있다. (중략)
상처와 아픔, 슬픔으로 가득한 유 시인의 시에는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숨어 있다. 그것은 상처를 삶으로 껴안고, 자아가 타자와 만나 사랑의 세계를 드러내는 타자지향성 덕분이다. “속눈썹이 내 눈을 찌를 때가 있다/무심코 건넨 말 한마디가/평화로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오래도록 슬픔으로 남을 수 있다”(「속눈썹」)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타자를 향한 너그러운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발견하거나 성찰한 뒤에 타자를 수용하는 세계까지 나아가는 시정신은 유 시인의 시가 지닌 미덕이기도 하다.(후략)
-정연수, 작품 해설 중에서

[책속으로 추가]

부엌칼을 간다
무뎌서 껍질조차 벗겨내지 못하는 칼
듬성듬성 이빨 빠진 칼
숫돌에 문질러도 좀처럼
날이 서질 않는다
한때는 내 우주의 중심이었던
서슬 퍼렇던 칼날
나의 옹고집 정도는 눈빛만 스쳐도
여지없이 잘려나갔었다
혈기가 왕성했던 그때는
수백 도의 열기, 수천 번의 쇠망치를 받아내고도 끄떡없던
단단한 몸
이제는 찬물만 닿아도 움찔움찔
근근이 버티고 있다
‘잇몸만 남았어, 채소나 썰어야지’
아내에게 부엌칼을 건네며
한 세대의 내력을 더듬어본다
자루 끝은 뭉툭해지고
희미한 어둠 속에 물러선
굽은 등이 허옇게 드러난 당신
- [부엌칼의 내력(來歷)]

바람이 새어나가면서 내 어디에선가 슬픈 피리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낯선 골목의 담벼락 아래서 하룻밤을 지샐 때였습니다 어둠 저편에서 누군가가 스쳐 지나는가 했는데 아뿔싸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습니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하늘이 노래지고 매가리가 탁 풀리는 것이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여태껏 나를 지탱해온 것은 바람이었구나 나는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불던 바람이 별이 총총한 하늘로 오르며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내 안에서 불던 바람]


씀바귀를 뿌리째 씹다 보니
뒤끝이 묘하게 달다
고독 같은 쓴맛에의 중독, 단맛을 위해
쓴맛을 즐기다니
씁쓸한 사랑을 아름답게 추억하다니
믿지 못하겠지만 끼니마다
밥상 어디엔가 배어 있을 쓴맛을 들춘다
고요하게 맺혀 있는 인고의 눈물,
눈물도 오래 곱씹으면 달다
어둠이 깃들어야 돋는 별처럼
슬픔이 깊어져야 우러나는 맛
단맛을 가르쳐준 그 쓴맛
- [쓴맛을 알다] 부분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 거리에는 다리 저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또래 아이의 비슷한 증상만 보아도 조금만 절뚝거려도 쫓아가서 살펴보고 문진(問診)을 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아이의 아픔이 나의 병이 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아픔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별일 없이 얼굴 맞대던 사람들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아픔, 하나쯤은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픔을 승화시킨 오색 진주, 소중하게 보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를 낮추고 세상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들이 향기롭다.
- [아름답게 보인다 - 우리 아이는, 지금ㆍ8]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