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미의 창백 - 문학동네시인선 221

백장미의 창백 - 문학동네시인선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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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인생이라는 신앙, 그 기이하고도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믿는 시
구상문학상 수상 시인 신미나 신작 시집
시를 쓸 때는 신미나, 그림 그릴 때는 싱고. 경쾌하고 진중하게, 발랄하고 사려 깊게 독자들과 만나온 신미나 시인의 세번째 시집 『백장미의 창백』을 문학동네시인선 221번으로 펴낸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첫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창비, 2014)에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토대 위에 쌓아올린 애잔하고 웅숭깊은 언어의 진수를 선보였으며, 구상문학상을 수상한 두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 2021)를 통해 소외되고 밀려난 존재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다독였다.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실과 현실 너머를 엄하게 거두어 더 깊은 곳으로 길을 내길 바”란다는 구상문학상 심사평에 부응하듯,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태어난 언어를 그러모아 인생이라는 신앙을 살뜰히 빚어낸다. 실패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 시의 역할에 낙심하면서도 낭떠러지에 발을 내디디는 심정으로 다음 문장을 써내려간다. 지난 시집 출간 이후 3년간 생애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고 밝힌 시인이 죽음에 대해, 그리하여 삶에 대해 치열하게 묻고 답해온 흔적이 이 한 권의 시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시인이 고이 접어둔 이야기를 펼치면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이 밀려들 것이다.

절정이 지나간 백장미는
오래전 옛날을 지나온 얼굴이고

당신은 한 톨의 소금도 집어먹지 않고
싱겁게 웃었습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서운 꽃밭에서 풀어졌습니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속눈썹이 붉은 아이가
검은 입을 크게 벌리며 오고 있습니다
양팔을 벌리며 당신을 데리러 오고 있습니다
_「백장미의 창백」 전문

이번 시집의 서시이자 표제작인 「백장미의 창백」에서 “절정을 지”난 백장미는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진다. 빨간 장미가 흔히 매혹적인 열정을 상징한다면, 모든 색을 흡수하는 흰빛을 지나 투명하고 창백해진 장미는 어둠을 찢고 나오려는 기미를 내비친다. 두번째 수록작 「검은 바위 물밑에서」에는 “밤의 고요 속에/ 조용히 미쳐가는 눈보라/ 어둠 한가운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이윽고 “도끼를 쥐고” “유리창을 깨뜨”린 채 “아찔하게 빛나는 유리를 밟고 서 있”다. 「선생님 전 상서」에는 선생에게 안녕을 고하고 떠나는 화자가 등장한다. “흔하고 고운 것 보시고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이라는 작별의 말로 미뤄볼 때, 그가 앞으로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기보다 생생하고 참혹한 삶의 현장을 마주하게 되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나의 형제”(「검은 바위 물밑에서」)라 칭하는 시인은 평온한 어둠을 깨뜨리고, 과거의 가르침에 결별을 선언하며 ‘순수한 창백의 시대’를 맞이하고자 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장은영은 1부의 제목 ‘순수한 창백의 시대’가 “죽음에 대한 감각이 퇴화한 시대, 다시 말해 죽음의 불가해성이 삶의 영역에서 박탈된 시대를 명명한다”고 말하며, “누구에게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보편성이 망각된다면 삶의 유한성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역설한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신미나의 시는 죽음이 삶에 요청하는 바에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이다.

붙잡아!
흩어지는 단어를
도망쳐!
정돈되려는 말로부터
단어를 쥐고, 한 번에 올라타

죽음을 경험했니?
몸속의 실핏줄 하나가
기타의 현처럼 징, 울리는 것을
나는 통과했어
정확히 느꼈지
의미를 버리고 감각을 믿는다면

(...)

언어로는 부족했어요
한달음에 달려가기까지는
눈물은 그만합시다

실패한 비유를 비웃으며
송전탑과 전선을
원숭이처럼 타넘는 해골의 웃음소리
_「어느 날, 죽음이」 부분

17년의 시력을 거치며 오랜 시간 언어의 영토에 머물러온 시인은 가장 먼저 자신의 언어에 죽음을 선고한다. 깊은 어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해골”은 ‘나’의 귓가에 “아끼는 걸 잘도 숨겨두는구나/ 오늘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걸 가져갈” 것이라고 속삭인다. 시인에게 그것은 필시 평생 부려온 언어인바, 그는 “정돈되려는 말로부터” “도망”치고, “흩어지는 단어를” “붙잡”으며 자신을 “통과”하는 “죽음을 경험”한다.
그렇게 신미나는 “언어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비유로서의 광수 아버지」) 쓰는 행위를 통해 감각의 주체로 거듭난다. 「탕후루를 탕후루라고 말할 때」에서 ‘샤즈샤시’라는 조어를 통해 어금니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설탕을 씹는 모양을 표현한다. 「댐 옆의 붉은 다리를 건너자」에서는 ‘之乙之乙’이라는 한자를 통해 뱀이 하늘을 기어가는 모양을 표현한다. 언어의 의미보다는 어감이 주는 재미나 시각적 효과에 방점을 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는 언어를 해체하는 시도는 인간의 언어 바깥에 놓인 낯선 종(種)의 출현으로 자연스레 귀결한다. 신미나는 그의 첫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에서 이미 ‘싱고’라는 조어를 탄생시킨 바 있다. 수록작 「싱고」에 따르면, ‘싱고’는 시인이 스스로를 칭하는 또다른 이름인 동시에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때로는 어떤 기분을 뜻하고, 때로는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이 되며,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나는 낯선 존재들은 이번 시집에 한층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신 누구세요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

그래요, 아가
이 소라로
무슨 노래를 들려줄까요?

등에 산호가 돋고
앵무새의 부리처럼 코가 구부러지고
잇몸에서 암모나이트가 돋는
낯선 종(種)의 노래를?
_「뿔」 부분

“네발로 기며 침을 흘”리는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엄마’에게 화자는 “낯선 종(種)의 노래를” 들려주고자 한다.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난생처음/ 뿔소라를 보고” 신기해하는 ‘아기’이자 “변이”된 존재로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엄마에게 낯선 종으로서 새로운 탄생을 부여하는 것 같다. 또다른 시 「풀」에서는 토끼처럼 귀가 크고, 코끼리처럼 코가 긴 존재 “코끼”를 떠올린다. “토끼는 귀가 크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말하려다/ 코끼!라고” 잘못 내뱉은 화자가 뒤이어 “지구 바깥에”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장면은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해온 언어를 의심하고 다르게 사용하는 일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리란 기대를 품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시집에 웃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낯선 존재들은 “싱겁게 웃”(「백장미의 창백」)고, “뾰족하게 웃”(「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고, “하늘 보며 웃”(「귀로(歸路)」)고, “눈물나게 웃”(「커튼콜」)는다. “걀걀걀 웃”(「화부산(花浮山), 아기자기 오컬트」)고, “희희희 웃”(「꼭두전」)고, 그야말로 “당나귀처럼 이상하게 웃”(「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는다. 이 웃음들은 시의 맥락에 따라 자조와 풍자, 또는 해학과 유머를 두루 품고 있지만, 결국에는 “세상은 신비롭고 귀엽고 웃긴 비유”(「혁수는 기담이라 말하고 문채는 서정이라 말한다」)라는 시인의 다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4부에 수록된 장시 「꼭두전」은 이 시집에 수록된 마흔 다섯 편의 시에 등장하는 산목숨과 죽은목숨, 인간과 동물, 우리가 아는 세계 너머 낯설고 기이한 존재 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 언어를 빼앗으러 왔던 죽음 이후의 존재들에게 이번에는 인간의 언어로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 대접한다. 총 6악장으로 구성된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신의 의심과 인간의 믿음, 그 경계가 허물어지며 그 언어조차 무용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홀린 듯이 죽음에 몰입했던 시간은 이 지난한 삶의 끝에 구원이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었을까. 시인은 언젠가 그 답을 구하기를 바라며 그저 눈앞에 “딱 한 걸음만큼”의 낭떠러지가 솟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발씩 딛는다는 감각을 믿어야 했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딱 한 걸음만큼 솟는 낭떠러지
누군가는 그것을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_「폭우 속으로」 부분
저자

안희연

저자:신미나
2007년경향신문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싱고,라고불렀다』『당신은나의높이를가지세요』,산문집『다시살아주세요』,시툰『詩누이』『서릿길을셔벗셔벗』『청소년마음시툰:안녕,해태』(전3권)가있다.구상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순수한창백의시대
백장미의창백/검은바위물밑에서/춘니(春泥)/스콜/채석장의손/눈소리1/명주동/선생님전상서/바람주머니가부풀때/귀로(歸路)

2부어휘소탑
비유로서의광수아버지/초과하는시/탁류/탕후루를탕후루라고말할때/개화기(開花期)/핍박받은문장과히스테리아/어느날,죽음이/정원과붉은원숭이낭독회1/정원과붉은원숭이낭독회2/커튼콜/화부산(花浮山),아기자기오컬트

3부인간이외의괴(怪)
두번본영화/혁수는기담이라말하고문채는서정이라말한다/방죽위/꼬리/댐옆의붉은다리를건너자/풀/나의음산하고야성적인/돼지와나/굴/뿔/주택가/북에서온사람

4부신의미뢰찾기
백탁(白濁)/에코/화이트아웃/음악을위해1/폭우속으로/순수주의자/인면조의자부심에답함/음악을위해2/사미바녀다가함(函)보고/희로/꼭두전/목단꽃이지기전에

해설|말을모르는너에게
장은영(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장미가맹렬히붉기를거부할때
모든색에서멀어져
다만흰빛으로만희미해질때”

인생이라는신앙,그기이하고도불가해한아름다움을믿는시
구상문학상수상시인신미나신작시집

시를쓸때는신미나,그림그릴때는싱고.경쾌하고진중하게,발랄하고사려깊게독자들과만나온신미나시인의세번째시집『백장미의창백』을문학동네시인선221번으로펴낸다.2007년경향신문신춘문예에당선되며작품활동을시작한시인은첫시집『싱고,라고불렀다』(창비,2014)에서전통적인서정시의토대위에쌓아올린애잔하고웅숭깊은언어의진수를선보였으며,구상문학상을수상한두번째시집『당신은나의높이를가지세요』(창비,2021)를통해소외되고밀려난존재들을호명하며그들의고통을함께짊어지고다독였다.
이후3년만에펴내는이번시집에서시인은“현실과현실너머를엄하게거두어더깊은곳으로길을내길바”란다는구상문학상심사평에부응하듯,삶과죽음의경계에서태어난언어를그러모아인생이라는신앙을살뜰히빚어낸다.실패한비유에지나지않는시의역할에낙심하면서도낭떠러지에발을내디디는심정으로다음문장을써내려간다.지난시집출간이후3년간생애가장밀도높은시간을보냈다고밝힌시인이죽음에대해,그리하여삶에대해치열하게묻고답해온흔적이이한권의시집에오롯이담겨있다.시인이고이접어둔이야기를펼치면“미래,미래,미래로물결쳐오는문장들”(「바람주머니가부풀때」)이밀려들것이다.

절정이지나간백장미는
오래전옛날을지나온얼굴이고

당신은한톨의소금도집어먹지않고
싱겁게웃었습니다

투석을마치고돌아와서는
무서운꽃밭에서풀어졌습니다

장미가맹렬히붉기를거부할때
모든색에서멀어져
다만흰빛으로만희미해질때

속눈썹이붉은아이가
검은입을크게벌리며오고있습니다
양팔을벌리며당신을데리러오고있습니다
_「백장미의창백」전문

이번시집의서시이자표제작인「백장미의창백」에서“절정을지”난백장미는“모든색에서멀어져/다만흰빛으로만희미해”진다.빨간장미가흔히매혹적인열정을상징한다면,모든색을흡수하는흰빛을지나투명하고창백해진장미는어둠을찢고나오려는기미를내비친다.두번째수록작「검은바위물밑에서」에는“밤의고요속에/조용히미쳐가는눈보라/어둠한가운데”한소년이있다.소년은이윽고“도끼를쥐고”“유리창을깨뜨”린채“아찔하게빛나는유리를밟고서있”다.「선생님전상서」에는선생에게안녕을고하고떠나는화자가등장한다.“흔하고고운것보시고안녕히계세요,선생님”이라는작별의말로미뤄볼때,그가앞으로질서정연하고아름답기보다생생하고참혹한삶의현장을마주하게되리란사실을짐작할수있다.
이들을“나의형제”(「검은바위물밑에서」)라칭하는시인은평온한어둠을깨뜨리고,과거의가르침에결별을선언하며‘순수한창백의시대’를맞이하고자한다.이시집의해설을쓴문학평론가장은영은1부의제목‘순수한창백의시대’가“죽음에대한감각이퇴화한시대,다시말해죽음의불가해성이삶의영역에서박탈된시대를명명한다”고말하며,“누구에게나필연적이고피할수없는죽음의보편성이망각된다면삶의유한성도쉽게잊히기마련”이라고역설한다.죽음에대한감각을일깨우는신미나의시는죽음이삶에요청하는바에귀기울이겠다는의지이다.

붙잡아!
흩어지는단어를
도망쳐!
정돈되려는말로부터
단어를쥐고,한번에올라타

죽음을경험했니?
몸속의실핏줄하나가
기타의현처럼징,울리는것을
나는통과했어
정확히느꼈지
의미를버리고감각을믿는다면

(...)

언어로는부족했어요
한달음에달려가기까지는
눈물은그만합시다

실패한비유를비웃으며
송전탑과전선을
원숭이처럼타넘는해골의웃음소리
_「어느날,죽음이」부분

17년의시력을거치며오랜시간언어의영토에머물러온시인은가장먼저자신의언어에죽음을선고한다.깊은어둠“방문을벌컥열”고들어온“해골”은‘나’의귓가에“아끼는걸잘도숨겨두는구나/오늘밤,네가가장사랑하는걸가져갈”것이라고속삭인다.시인에게그것은필시평생부려온언어인바,그는“정돈되려는말로부터”“도망”치고,“흩어지는단어를”“붙잡”으며자신을“통과”하는“죽음을경험”한다.
그렇게신미나는“언어의안팎을뒤집어다시”(「비유로서의광수아버지」)쓰는행위를통해감각의주체로거듭난다.「탕후루를탕후루라고말할때」에서‘샤즈샤시’라는조어를통해어금니에찐득하게달라붙은설탕을씹는모양을표현한다.「댐옆의붉은다리를건너자」에서는‘之乙之乙’이라는한자를통해뱀이하늘을기어가는모양을표현한다.언어의의미보다는어감이주는재미나시각적효과에방점을둔것이다.
인류의문명을상징하는언어를해체하는시도는인간의언어바깥에놓인낯선종(種)의출현으로자연스레귀결한다.신미나는그의첫시집『싱고,라고불렀다』에서이미‘싱고’라는조어를탄생시킨바있다.수록작「싱고」에따르면,‘싱고’는시인이스스로를칭하는또다른이름인동시에자신이아닌모든것을뜻하는말이다.때로는어떤기분을뜻하고,때로는“뿔달린고양이”나“수염난뱀”이되며,“몇번이고죽었다살아”나는낯선존재들은이번시집에한층다채로운모습으로등장한다.

당신누구세요
나는모르는사람인데

(...)

그래요,아가
이소라로
무슨노래를들려줄까요?

등에산호가돋고
앵무새의부리처럼코가구부러지고
잇몸에서암모나이트가돋는
낯선종(種)의노래를?
_「뿔」부분

“네발로기며침을흘”리는태초의모습으로돌아간‘엄마’에게화자는“낯선종(種)의노래를”들려주고자한다.생명의빛이꺼져가는‘엄마’의모습을“난생처음/뿔소라를보고”신기해하는‘아기’이자“변이”된존재로바라보는화자의시선은엄마에게낯선종으로서새로운탄생을부여하는것같다.또다른시「풀」에서는토끼처럼귀가크고,코끼리처럼코가긴존재“코끼”를떠올린다.“토끼는귀가크고/코끼리는코가길다고/말하려다/코끼!라고”잘못내뱉은화자가뒤이어“지구바깥에”“진짜코끼가있을지도”모른다고상상하는장면은우리가당연하게사용해온언어를의심하고다르게사용하는일이인식의지평을넓혀주리란기대를품게한다.
흥미로운점은이번시집에웃는존재들이자주등장한다는것이다.시에등장하는낯선존재들은“싱겁게웃”(「백장미의창백」)고,“뾰족하게웃”(「바람주머니가부풀때」)고,“하늘보며웃”(「귀로(歸路)」)고,“눈물나게웃”(「커튼콜」)는다.“걀걀걀웃”(「화부산(花浮山),아기자기오컬트」)고,“희희희웃”(「꼭두전」)고,그야말로“당나귀처럼이상하게웃”(「나의음산하고야성적인」)는다.이웃음들은시의맥락에따라자조와풍자,또는해학과유머를두루품고있지만,결국에는“세상은신비롭고귀엽고웃긴비유”(「혁수는기담이라말하고문채는서정이라말한다」)라는시인의다감한마음에서흘러나오는듯하다.
4부에수록된장시「꼭두전」은이시집에수록된마흔다섯편의시에등장하는산목숨과죽은목숨,인간과동물,우리가아는세계너머낯설고기이한존재들이한자리에모이는축제의장을마련한다.언어를빼앗으러왔던죽음이후의존재들에게이번에는인간의언어로푸짐한잔칫상을차려대접한다.총6악장으로구성된시의후반부에이르면신의의심과인간의믿음,그경계가허물어지며그언어조차무용해지는순간이찾아온다.홀린듯이죽음에몰입했던시간은이지난한삶의끝에구원이있을지에대한물음이었을까.시인은언젠가그답을구하기를바라며그저눈앞에“딱한걸음만큼”의낭떠러지가솟기를기원하는마음으로걸음을내디디고있다.

눈을떠도눈을감은것같았습니다
사람들은한발씩딛는다는감각을믿어야했습니다

발을디딜때마다딱한걸음만큼솟는낭떠러지
누군가는그것을희망이라불렀습니다
_「폭우속으로」부분

■신미나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3년만의신작시집입니다.한권의시집을묶기에는그리긴시간이아니었을텐데도,이번시집을읽으며선생님께서한시절을건너왔다는느낌을받곤했어요.세번째시집을출간하는소회가어떠신가요?

등단한지17년이되었네요.지금껏7년에한권씩두권의시집을냈는데요.이시집을묶으면서보낸3년은뭐랄까.제인생에서가장밀도높은시간이었어요.개인적으로부침이많았고요.그어느때보다삶과죽음에대해치밀하게질문했던시기였어요.
편집자님께삼교지를보내고나서,‘재밌네.실컷헤맸다’라는생각이들더라고요.자연스레그런생각이들어서스스로놀랐는데요.패자의해방감이랄까요.시와질기게붙고,흠씬두들겨맞고나가떨어진뒤의후련함이랄지......그런게있었어요.시를쓰면서‘어떤성과를바라거나,겨루는마음에서이제좀가볍고싶다’하는생각도들었고요.묵묵히쓸수있는시를쓰자고다짐했는데,이렇게시원한감정이들었던시집은처음입니다.

Q2.이번시집의제목은‘백장미의창백’입니다.첫번째시집『싱고,라고불렀다』와두번째시집『당신은나의높이를가지세요』이후처음으로명사구제목을시도하셨어요.「백장미의창백」은이번시집의서시이자표제시이기도한데요.이제목이어떻게읽히기를바라시는지여쭈고싶어요.

‘순백’이순수를추구하는세계라고가정한다면,‘창백’은핏기없이푸른기가도는‘불길한징조’나‘태어나려는예감’과도같아요.우리는당연하다는듯일상을살아가지만,글쎄요.세상은얼마나그로테스크한가요?아름다워서슬프고,이해할수없어서무서운신비로일렁여요.
가까운예를들면,얼마전에산책하다가겪은일인데요.근방에서매미가귀가찢어질듯이우는거예요.나무를올려다보니귀여운새가앉아있었어요.새가매미의몸통을쪼고있더군요.매미가울면위치가파악되어천적에게들키기쉬울텐데요.그런데도매미는맹렬하게울어요.이를자연의순환이라이름붙이는것이,기이하고묘한질서같아요.
만약‘순백’의시를쓴다면귀여운새를노래하는시를썼겠죠.하지만이제그시절로돌아갈수는없을것같아요.매미는죽고껍질이하얗게말라가도그울음을추모하는일에‘창백’이라는단어를붙인다면어떨까요.

Q3.삶과죽음에대한시편들이자주눈에띕니다.삶과죽음이서로를거울처럼비추고,시의화자는그러한두세계를잇는매개자가되기도합니다.이러한삶과죽음의순리에대해평소에품고계신생각이있는지궁금합니다.

먼저아버지와반려묘의임종을지켰던순간이떠오르네요.눈꺼풀을내려주던순간.차가워진이마를하염없이쓰다듬었던기억이생생해요.장례를치르고어떤날은무궁화를보며걸었고,어떤날은땡볕에말라죽은지렁이를보며걸었어요.홀린듯이죽음에대해몰입했던시간이었어요.그간목도했던사회적참사도그어느때보다뼈아픈질문으로다가왔어요.‘삶의끝은정말아무것도없나?’라는질문을쥐고,싸우듯이답을구하고싶었어요.
누군가는샤먼과문학,사람들사이에인생의답이있다고말할지도몰라요.저는아직찾지못했어요.죽음은완벽한단독자가되는일이니까요.연결되었던세계의끈이툭끊어지는일이기도하고요.하지만엉성하더라도그매듭을잇는일을시로써해볼수있지않을까싶었어요.그일이조금이나마망자들을덜외롭게하고,무릎이꺾인채살아가는이들을부축하는일이라면요.

Q4.“언어의안팎을뒤집어다시”(「비유로서의광수아버지」)쓰겠다는대목에서언어의한계에갇히지않는시인의모습을엿보았습니다.언어를의심하면서도언어에기대어쓴,그리하여언어의무한한가능성을탐구하는시들에대해덧붙이고싶은말이있다면요?

언어야말로인류의가장강력한무기잖아요.세계질서를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