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서 에게로 - 문학동네 시인선 225

에게서 에게로 - 문학동네 시인선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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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집은 오래 비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자꾸 말들이 온다.”

저자

김근

저자:김근
1998년문학동네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뱀소년의외출』『구름극장에서만나요』『당신이어두운세수를할때』『끝을시작하기』가있다.서라벌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1부난데없는세계가펼쳐질것만같은기분으로
이사/가려진문장/변명,사형수/너는너를잃고/언제든어디에고/에게서에게로/손하나가/영상/혼자있는사람은/의자는의자가없지만

2부모르는얼굴을들고서
사이사이/정류장/변명,이웃/방문자/세사람이/두밤사이/거짓말1/거짓말2/저쪽에서/거기,없는/몇번의깜박임

3부희끗으로그만사라지지않으려고
자줏빛심장에대고/붉은,/어슴푸레/희끗,/서러우니,아프니,/꽃꿈/천사는어떻게/장마/빛,재,빈/노래,없는

4부너를껴안는어둠의형질에대해
검은숲/언제나그곳에서/윤슬/불귀/곡우라는/미처다물지못한/윤슬/문밖/밤의버스는달리고/변명,식물도감

해설_정동적공간의윤슬
조강석(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집은오래비어있었다.어둠속에서자꾸말들이온다.”

빛과어둠사이,비명과침묵사이,그리고당신과나사이에서
흘러넘치는감정을비집고생동하는시어들

예측불허한상상력과살아움직이는리드미컬한시어들로우리를사로잡는시인김근의다섯번째시집『에게서에게로』가문학동네시인선225번으로출간되었다.김근은첫시집『뱀소년의외출』(문학동네,2005)에서도발적인이미지로신화적상상력과유년의기억을풀어내고,두번째시집『구름극장에서만나요』(창비,2008)에서는탄생과죽음이뒤엉킨기괴한설화들을적극적으로가져와더욱강렬해진시를보여주었다.그리고세번째시집『당신이어두운세수를할때』(문학과지성사,2014)에서는비일상적인이미지들로부터일상의풍경을환기하는시들을통해마치생생한악몽처럼독자들을압도했다.서라벌문학상수상작인네번째시집『끝을시작하기』(도서출판아시아,2021)에는한마리의짐승이출현한다.시집은그짐승과함께달려나가는듯질주하는시들로가득하다.시의목적지가어디인지는정확하게밝혀지지않지만시인은어떤극점을향해무한히다가가는것으로보인다.이처럼시인은그로테스크한이미지와운율감있는시어,그리고아이러니하게다가오는제목처럼‘끝을시작하는것’에대한철학적인고찰을보여주었다.네번째시집이후삼년만에펴내는이번시집에서흥미로운점은명확한화자가등장하지않는다는것이다.시인은정체가불투명한화자의목소리로특정단어나문구를반복함으로써혼란스럽고불안한인간의내면을그려낸다.

겹겹이내가없었다는사실이없었다는사실이
없었다는사실이쌓여만갔지모든잠자리마다
너를눕히고끔찍하게나는없었어구역질
나게모든내장이쏟아져나와순식간에썩어
버릴것처럼멀리밤기차의불빛들은냄새를
흘리고기차를뒤쫓는모든시선들을너로
가로막았지아무도떠날수없었지아무도
헤어질수없었지너로된울타리안에서
집은낡아가고헛간의삐걱거림은멈출줄
모르고나뭇가지들은흉흉해지고밤이이윽고
오고있었지그날모든것이시작되었지시작
되는모든것들속에너의일그러진표정을
발라놓고펼쳐질모든시간생겨날모든풍경
을향해말했어나는없었어오로지그말만
오로지또렷하게이정표처럼너를박아세워두고
_「언제든어디에고」부분

이시에서도화자와화자가처한상황이명확하게제시돼있지않다.시에서는“나는없었어”라는구절이반복된다.화자인‘나’는모든상황을직접경험하고있으면서도자신은이자리에‘없다’고말한다.반면시에등장하는또다른인물‘너’는‘나’와달리어디에든있다.‘나’는‘너’를“모든검고어두운가지마다”“누런먼지바람속에”위치시키며“또렷하게이정표처럼”“박아세워”둔다.형체가없으며그자리에존재하지도않는인물이다른인물을움직이게한다는것은상식적으로불가능한일이다.하지만김근의시에서는논리적인방식으로는설명이어려운이런일들이빈번하게일어난다.이처럼다소기묘하고비현실적인장면으로가득한김근의시는우리가예상한것으로부터몇걸음먼곳에있다.그렇기에김근의시를읽는것은우리가지닌상상력의외연을넓히는일이된다.
또한가지주목할점은이번시집의시들이무수한중얼거림으로채워져있다는것이다.예를들어「영상」은모든단어와구절이쉼표로이어진다.마지막까지쉼표가등장하는이시에는마침표가없기에마치시적화자의넋두리를받아적은듯한느낌을준다.화자는어떤광경을보고“깊어져봤자훤히드러나는,드러나고야마는,골짜기로,이슥하지도않은,깡마른나무들은모두흰,빛으로숨고,흰,흰,물기없이만,바람에베일듯이,빛,빛,뼈만남은,”이라고말한다.마치날것의단어들을정돈하지않고풀어놓듯이화자는쉼표를통해말을이어간다.어쩌면시인은생각을글로정리하는과정에서어떤의미가상실되는것을경계하는것인지도모른다.그리고이를통해독자에게도손상되지않은의미를전달하고자하는것이아닐까.

막이오르면조명이꺼진다.어둠뿐인무대.무대위에의자하나가놓여있다.의자는의자를모른다.웅크린듯놓여있는의자옆에는의자하나가쓰러져있다.쓰러져있는의자는쓰러짐을모른다.
(어둠뿐인객석.관객은어디있는가.관객은있는가.)
의자는눈이없지만무대에서눈을뜬다.의자는눈이없지만의자는눈을깜박거려본다.어둠뿐인무대.의자는눈이없지만의자는눈을감았는지떴는지분간할수없다.의자는눈꺼풀이없는것같은기분이다.의자는눈이없지만.의자는눈꺼풀이없지만.
의자는손이없지만어둠속으로손을뻗어휘휘저어본다.의자는바닥을쓸어본다.의자는손이없지만손끝에무언가만져진다고느낀다.의자는감각이없지만.의자는곁에쓰러져누워있는의자가있다고느낀다.의자는쓰러져힘없이누워있는서서히식어가는의자를더듬어본다.의자는손이없지만.
_「의자는의자가없지만」부분

「언제든어디에고」와「영상」이상황을감각적으로묘사한다면「의자는의자가없지만」은감정을배제하고눈앞에보이는상황만을그려낸다.“막이오르면조명이꺼진다.어둠뿐인무대.무대위에의자하나가놓여있다”는시의도입부를읽으며독자는자연스럽게화자가연극이상연되는극장객석에앉아있다고생각할것이다.그런데바로다음연에서화자는“관객은어디있는가.관객은있는가”라고묻는다.화자는관객이아닐수도있는것이다.의자또한“무대에서눈을”뜨거나“바닥을쓸어”보는등의지를가지고있는의문의존재로그려진다.그렇다면이의자를지켜보는화자역시반드시사람일필요는없을것이다.화자는천장에매달린조명일수도있고무대를가리는커튼일수도있으며심지어는의자그자신일수도있다.이와같이화자와상황이명확하게규정되지않기에독자는자신의경험과상황에따라훨씬유연하게이시를읽어나갈수있다.
그러므로김근의시를읽는다는것은단순히글자를읽고상황을파악해나가는일을넘어시의정서에흠뻑빠져들어스스로규정하지못했던복잡한감정을살펴나가는특별한경험이된다.김근의시는상황과감정을명료하게지시하지않는다.즉,상황과감정을언어에가두지않는다.중요한것은“희끗”(「희끗,」)하고“어슴푸레”(「어슴푸레」)한감각이다.이감각들은쉽사리규정할수도,설명할수도없는것이기에이시집에수록된시들에방점을찍는다면단어가아니라행과행사이,단어와단어사이의여백에찍어야할것이다.어둠과빛이명확히구분되지않는어슴푸레한영역,비명과침묵이교차하는찰나,김근의시는그런곳에존재한다.그렇기에김근의시를읽은후우리앞에는미처예상하지못했던“난데없는세계가”(「가려진문장」)우리를반기고있을것이다.환하면서도어둡고,어두우면서도환한세계가말이다.

내가도무지남아나질않아도이생면부지의닿을수없는시간의진창에서발이빠지며도무지한발짝도그쪽으로는내디딜수없는자세로이런막다른슬픔이어떤슬픔인지도오직모른채너에게가야한다는가서마주해야한다는생각만남아허우적거리며생면부지이전과이후의아득한경계에서못알아본너를어쩐지는알아본적이있었을것만같다는가려운기분으로,아무리긁어도긁어도긁힌자국에피가배어나와도가려움좀처럼은멈추지않을것만같은기분으로.우리가아는몸인가요물으면몸만으로멀리서꽃졌다는소식이오고난데없는세계가펼쳐질것만같은기분으로,
_「가려진문장」부분



김근의새시집『에게서에게로』는불명과미상그리고흐름속에있다.대개의시에서발화자의윤곽조차종잡을수없고시가발화되는장소역시특정할수없다.누가누구에게어디서무엇을말하고있는지명료하지않고발화자의신원은미상이다.더욱이발화된음성조차분명하게분절되지않고때로는소리가혀속으로말리고,때로는반복되며늘어나고있기도하다.발성된소리조차계속흐름위에있다는말이다.이러한불명과미상그리고단속없는흐름을원리로삼고있는한장소를우리는알고있다.바로정동적(affective)공간이그것이다.김근의이번시집에실린시들은정확히정동적공간에서발신되고있다.
_조강석,해설에서

■김근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이번시집은『끝을시작하기』이후3년만에출간하는다섯번째시집이지요?이번시집은문학동네시인선의2024년을마무리하는시집이되어편집부에게도뜻깊은시집이에요.출간소감을듣고싶습니다.

올해로제가등단한지25년째입니다.25라는숫자에특별한의미는없지만,제가등단하고첫시집을출간했던문학동네에서25주년을마무리하는시집을내게된것은의미가남다르네요.녹록지않았던저의문학적여정에대해격려받고위로받는느낌이랄까요.이격려와위로를바탕으로다시새로운출발을할수있을것같은기분이들어요.

Q2.시집의제목을‘에게서에게로’로결정하실때이제목이시집을가장잘아우르는제목인것같다고말씀해주신게기억나요.이시를표제작으로삼은이유를독자분들께살짝공유해주시면어떨까합니다.

사실「에게서에게로」를쓸때다음시집은이제목으로하면좋겠다고막연히생각했던것같아요.표제작이이시집을대표한다고꼭은말할수없겠지만한편의시제목이시집제목이되었을때는그의미의위상이달라진다고생각해요.시집제목이어서이제목이붙은시의의미도다르게읽힐가능성도있어요.이번시집에서발화의주체와대상이확정되지않는일이자주일어난다고생각하는데,체언을생략한채어떤이행(移行)그자체만지시하는이조사들이이시집의그런특성을드러내주기에적확하다고‘나중에’생각하게되었습니다.시집을묶고시집의제목을붙이면서사후적으로의미가발생하는걸지켜보는일은늘재미있는일이지요.

Q3.시집을편집하면서‘빛과어둠’이고루등장하는시집이라는인상을받았어요.어두운골목이나방이시의배경이되기도하고시의화자가어쩐지으스스한말을내뱉는시들이많아서자칫어두운느낌의시집이라고느낄수도있겠지만,“아니요,여기반짝이는시간에머물고싶어요”(「윤슬」부분)같은시구들을보면시집전체에서빛과어둠이은근히조화를이룬다는생각이들기도했습니다.시를쓰실때이런균형을의도하시는것인지궁금합니다.

‘빛’이나‘어둠’을의식하고시를쓰지는않았던것같아요.굳이얘기하자만,제말들은빛에서어둠으로든어둠에서빛으로든그사이에가고있는모양으로있고싶은것아닐가해요.편집자님께서‘빛과어둠의균형’을읽어내셨다면제시집의첫독자로서제시를나름대로완성하신결과가아닌가합니다.시를쓰고나서독자들에게갔을때는저는더이상의미의주재자가아니라고생각합니다.언제나저는독자들이제시에적극적으로참여하면서각자의방식으로시를완성해나가길바라요.이시집이하나의의미가아니라독자들의참신한읽기에의해서수많은의미의가지를뻗으며커다란의미의수관(樹冠)을이루면좋겠다고생각하곤하지요.

Q4.「희끗,」이나「자줏빛심장에대고」같은시에서는동일한시어를여러번반복해마치화자가말을더듬고있거나중요한말을상기하듯계속읊조린다는느낌을받았어요.이렇게반복되는시어들을어떻게받아들일지고민하는독자분들도있을듯한데,이런시들을읽는선생님만의독법을제시해주실수있을까요?

일단의미를생각하지말고소리를내서읽어보시길권해드려요.자신만의목소리로읽어가면서맥락없는반복들과비문법적인말들이만들어내는언어의무늬를우선느껴보시면어떨까요.그무늬들이불러일으키는자기안의정서들이어떤것들인지감각해보시면어떨까요.의미는모르겠지만그때어떤울림이있다면그건이미시가당신의몸에스며든걸거예요.의미는거기서부터새롭게구성되기시작할겁니다.

Q5.마지막으로,『에게서에게로』와함께올해를마무리할독자분들에게인사를건네주세요.

이겨울거리에서더이상외롭거나춥지않았습니다.그래서울었습니다.거리에나온사람들뿐아니라거리바깥의사람들과무수히연결되고있다는느낌을받았습니다.국경을넘어서까지보이지않는관계를맺고있다는실감을하게될줄은몰랐어요.이십대때거리에나서면무섭고외로웠거든요.우리는고립되었고돌아오는건국가의폭력과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