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 문학동네 시인선 226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 문학동네 시인선 226

$12.00
Description
“한 발을 딛고
두 발짝 딛고
다음 발은 싱크홀”

개똥 같은 삶을 껴안는 명랑함으로 나아가기
‘몸으로 쓰는 시인’ 진수미 12년 만의 신작 시집
1997년 제1회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진수미의 세번째 시집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를 문학동네시인선 226번으로 펴낸다. 한국 시단에 낯선 족적을 남긴 첫 시집 『달의 코르크 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와 “다른 차원을 꿈꾸는 고백의 나라”(권혁웅 시인)를 선보인 두번째 시집 『밤의 분명한 사실들』(민음사, 2012) 이후 꼬박 12년 만이다. 밤이 찾아오면 선명해지는 꿈을 기다려왔던 시인은 이제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다. “이 꿈은 어서 깨도록 하자”(‘시인의 말’)고 채근하며 “한 발을 딛고/ 두 발짝 딛고/ 다음 발은 싱크홀”(「죽은 자의 휴일」)인 세계를 상상한다.
시집의 제목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는 마지막 수록작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의 시구에서 따온 것으로, 이 시는 시인과 함께 사는 고양이가 시집 원고가 담긴 파일을 삭제한 실화에 기반해 창작되었다. 데뷔 후 28년 만에 세번째 시집을 펴내는 천천한 속도로 미루어볼 때,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올린 세계가 “한갓 신기루”에 불과해졌던 경험은 마치 신의 농간처럼 느껴졌을 터다. 그리하여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우연 위에 덧씌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집이 탄생했다. 어느 장을 펼쳐 읽어도 언제든 헛것으로 사라질 줄 알면서도 기어코 다시 쓰인 문장들, “이미 없는 것들” 위에 새로이 쓰인 문장들을 마주할 수 있다. 다만 주지하듯 꿈에서 깨어나 마주한 싱크홀이 어둡고 냄새나는 것은 필연적인 결말이다.

저자

진수미

저자:진수미
1997년문학동네신인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달의코르크마개가열릴때까지』『밤의분명한사실들』,연구서『시와회화의현대적만남』,미술평론서『연대의포에틱스,열정과초연사이』가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사유는사유하다의사유이고
무섭다/10번출구에서돌아보라―강남역에서/버스보이,시인,웨이트리스그리고혁명/센세라는이름의고양이/처형의이듬/공포분자

2부구경을했으면구경거리가되어야한다
젖어서아름다움/더작은입자보다조그만/개미는애인이라도있지/당신의혐오당신의근심/세상의모든풍선/후드득후드득날갯짓/구겨진골목/거꾸로서있는나무/처형극장A/B

3부이다음발은싱크홀,
세겹의죽음,그리고카사밀라의재회/당신행성의위치/듣는다―지영에게/죽은자의휴일/푸른잎우주_20140416/심해어/누군가는달이없어졌으면……하고빌었다

4부인간은어디까지식물이아니고
자연광독서/검은화환/20세기적혼종/텐미니츠첼로/이해변은당신을닮았다/번갯불에콩볶아먹는일/번갯불에똥덩어리/여기,털피지의기적

5부왼쪽에서는자유,오른쪽에선사랑
이빨이갖고싶구나/소리와빛/모두가쿠로브스키부인/죽음과씨름하는건물/소파를버렸다/장거리여행중인빛의견지에서/복도의끝,세계의끝/좀비도방귀를뀝니까/암종/검은꿈의오르페

6부지우면서우는붓이있다
생존연습/보이스오버2/종달새는파업중/천장관찰자의수기/이상한나라의이상한앨리스/신적인너무나신적인

발문|아름다운나의개똥,당신들에게
김민정(시인)

출판사 서평

삶이란
누군가한번은밟아야하는
개똥의다른이름

젖은교차로에서
냄새나는생이
끈덕지게달라붙는나의바닥을
세상모서리에비벼닦는다
스크린도무대도없이
아름다운나의

개똥,
당신들
_「젖어서아름다움」부분

이시집에서‘삶’은결코아름답게묘사되지않는다.시인은그러나바로그점때문에삶이슬프도록아름답다는사실을일찌감치알아차린자인듯하다.“삶이란/누군가한번은밟아야하는/개똥의다른이름”이라면기꺼이“누군가”가되어“개똥밟는여인으로불”리는운명을받아들이고자한다.또다른시「처형의이듬」의화자는‘WhippingPost’,즉죄인을묶어놓고채찍질할때사용하는기둥에매달려있다.“순종과굴종사이에서눈알굴리”며때때로날아오는채찍이“매일까사랑일까”고민하는‘나’에게“생은한없는모욕”이다.

흥미로운것은천형처럼주어지는삶을살아가는모습이음울하고슬프기보단어딘가사뿐하고경쾌하게느껴진다는점이다.「암종」에는인생에서지켜야하는두가지원칙이제시된다.“제1원칙:아프지않은상태를최대한오래유지한다”“제2원칙:아파야한다면,세상명랑한환자가된다”가그것이다.어릴적부터‘신장염’‘동맥염’‘뇌졸중’‘반신마비’등줄줄이이어진병명을앓아온화자는가슴속암종이생긴후에도명랑한태도를잃지않는다.“신상”병명을“못이기는척너그럽게받아”주고선“가슴한쪽을도려내고”“삐딱삐딱삐딱삐딱삐딱삐딱삐딱”걸어간다.

이토록고통으로가득한삶을살아가야하는이유는무엇일까.“궁극적으로질문인세계”(「10번출구에서돌아보라-강남역에서」)에서시인은“눈을감으면/왜동시에감기나요?”하고묻는다.“두개의눈”(「심해어」)은“삐딱임”이“생의디폴트값”(「암종」)이라고백하는시인이유일하게나란히뜨고감을수있는신체기관이다.이시집의발문을맡은김민정시인이말하듯“눈을감았다뜨는것이야말로나의자유”이며“눈알을굴리는것이야말로나의춤사위”인셈이다.하여시인은“너는나를모르겠지”만“내가너를알아볼거”(「번갯불에콩볶아먹는일」)라는약속과함께세상모서리에묻어난존재들의목격자이기를자처한다.

티티,너는새였구나
나의눈알을물고숲속으로사라졌던

여긴티티의꿈속이로구나
나는붉은발을가진새였구나
부리로속삭이고있었구나

나무로된책걸상에앉은아이들이
동전을꺼내
검은도화지를긁는다

새한마리
어깨에얹은아이가나타나고

검은밤이밀려나온다
묵은때처럼후드득
후드득
_「후드득후드득날갯짓」부분

이시에등장하는새티티는“나의눈알을물고숲속으로사라졌”다가돌아와‘나’의“어깨위에앉는다”.티티의꿈속에서‘나’는스스로가“붉은발을가진새였”음을깨닫는다.교실의아이들이까만색으로뒤덮인도화지를긁자“검은밤이”“후드득”“밀려나온다”.“블랙아웃”에서깨어난‘나’는세월호참사를기억하고(「푸른잎우주_20140416」),죽은여성들을기리며(「10번출구에서돌아보라-강남역에서」「세겹의죽음,그리고카사밀라에서의재회」),난민들의어려움에대해이야기한다(「누군가는달이없어졌으면……하고빌었다」「모두가쿠로브스키부인」).이시편들에서화자의시선은단순히약자와소수자의편에서겠다는마음을넘어서,오랫동안그들을억압하고침묵을강요해온세계의시선을재편하겠다는의지를표명한다.

진수미의시는마침표를자주사용하지않는다.특히각연의마지막문장은모두마침표가붙지않은채끝을맺는다.「번갯불에똥덩어리」의화자는“어영부영이라는말이마침표를닮아서/엉망진창이라는말을닫는/마침표가서늘해서”“시를쓰게되었다고말”한다.뒤이어등장하는고양이는“우다다다다다다다다닷/물그릇쓰러뜨리고/밥그릇을뛰어넘”으며“사랑에는마침표가없다고/문밖에서야옹야옹”운다.화장실을박차고나온고양이가바닥에떨어뜨린“새까맣고물컹한”것이“쉼표처럼아늑하다”.쉬이마침표를찍지않으려는것은엉망진창인삶일지언정어영부영마치고싶지않다는마음에서연유한것일까.똥덩어리같은삶을사랑하는시인은그안의더러움과고약함마저기쁘게껴안는다.그렇게마침표대신쉼표를찍으며하루하루를이어간다.

이번시집에수록된마흔여섯편의시에는음악,미술,영화등시집의모티프가된다양한레퍼런스가등장한다.해당작품이연상시키는감각에서출발한시도있고,내면에쌓인이야기를써내려갔으나다른예술작품의제목을따온시도있다.부조리한삶의순리에정면으로돌파하는몸에서튀어나온문장과더불어,다채로운장르의작품이얽혀들어오감을두루자극하는진수미의시집은몸으로읽어내야한다.책말미에붙은김민정시인의발문은시집의형식을빌려,‘발문자의말’을서두로삼은후여섯개의소제목으로나뉘어구성되었다.그의글이몸소보여주듯진수미시를해석하는데정해진독법은없다.툭툭쏟아지는날것의시어를천천히씹어넘기고,각자의속도와방식으로소화시킬때그것은형체를띤영양소가되어삶의자양분을이룰것이다.

개똥을지르밟는심정으로이땅위에발붙이고살아가는나날과그러한현실과불화하는꿈속을오가는시인의숙명.그삶은한칸의여백도없이“고통상처분노실망거짓”(「생존연습」)으로점철되었을테지만,그는여전히“지금은밤일까/아침일까”고민하며눈뜬다.“나의매일매일”이먼저떠난자들의“빨간날”임을깊이체득하고있기때문이다.“한발을딛고/두발짝딛고/다음발은싱크홀”이라면“다음다음발은무엇일까”(「죽은자의휴일」)생각하며잠에서깨어남으로써그는스스로생존의증거가된다.

훠이훠이
들판의허수아비처럼
두팔을허우적대지만

하염없이배제당하는아이야
하염없이밀려나는아이야
그럼에도
삶을선택하는아이야
그끝엔무엇이기다리는걸까
_「개미는애인이라도있지」부분

진수미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12년만의신작시집입니다.세번째시집을출간하는소회가어떠신지궁금한데요.오랜만에마주하는독자분들께인사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시쓰는진수미입니다.2025년새해첫달독자분을만나게되어서기쁘네요.오랜만에새시집을출간하다보니조금은낯선공기를느끼며지냈어요.시를쓰고묶는활동이평지보행과다르다는걸새삼체감했습니다.약간의착란,약간의혼돈속을부유하는느낌이랄까요,머리를구름속에처박고있는,그런느낌이었어요.어릴때구름을시제로한백일장에서입상한적이있는데,그때마지막연이“나의친구근두운/잡아타고싶어요”였어요.일상이라는평지에발을단단히붙이지못하고있다는점에서어릴적그표현이떠오르더라구요.돈키호테에게로시난테가그러했듯손오공에게근두운은일상의호흡을같이하는탈것(매체)인데……아이고,시라는근두운이,오랫동안손오공으로살지않았던터라,부른다고나한테제때오고그러지않는구나.시를오랜만에쓸때의이물감을즐기는편이었는데,너무뜸했던걸까?이런시간이좀낯서네,그런생각에골몰하다가지하철하차역을놓친다든가반대편노선차량을아무생각없이타는,사소한실수를저지르면서2024년하반기를보냈습니다.

Q2.이번시집의제목은마지막수록작「신적인너무나신적인」의시구에서따온것입니다.이제목이어떻게읽히기를바라시는지여쭈고싶어요.

「신적인너무나신적인」은실제경험이기초가된시예요.고양이와살아가면정말이런저런생각지도못한일과맞닥뜨리게되는데요.우리집고양이는책장밖으로길게늘어진도서끈을씹어서끊어먹는다든가(고양이소화관에위험해서,이후론도서끈을감춰서꽂습니다)집에불을내려한다든가별의별사건사고를많이치는아이예요.
작년초어느날,거의정리가다된시집을며칠뒤송고해야하는데,컴퓨터에시집파일이사라진걸발견한거예요.분명며칠전까지작업을했는데,내손으로이걸지웠을리없는데……,혼자컴퓨터를쓰니까백업같은걸소홀히한잘못이겠는데,이런일이처음이니정말막막하고,가슴이철렁하더라구요.전문가를불러와도복구가불가능했어요.시집은이미써놓은것묶는거아니야?하실수있는데그걸묶고도오랫동안연과행갈이,시편배치같은걸반복해서손보거든요.특히조사나문장부호고친건너무소소해서기억도안나요.어쩔수없이편집자님께양해를구하고다시작업에돌입해야했어요.
그런데한참일하는중에,언제나그랬듯이,고양이가책상위를어슬렁거리더니자판을꾹즈려밟고가는거예요.또거기턱을괴고잠든척한다든가……그러고보니파일이사라졌던게요놈때문이아닐까?라는생각이들었고,나의허점을파고들어서삶에긴장감을주려했던주인님의깊은뜻을깨닫게된거죠.
사랑하는고양이의만행을고발하는동시에,컴퓨터저장파일이삭제되듯시라는것이언제든무(無)로돌아갈수있는,즉헛것과얼굴맞댄세계라는이야기를,제목을통해말하고싶었어요.딜리트키하나누른것처럼어제의세상이삭제되고,사랑하는존재가갑자기곁에서사라지는일을우리는종종겪습니다.저역시그렇게사라질운명이고요.시는그걸잊지말라고끊임없이상기시키는매체죠.

Q3.총46편의시를여섯개의부로나누어엮었습니다.짐짓어둡고무거운시도적지않지만,적절한때에흐름이나뉘는덕분에산뜻하게책장이넘어간다는느낌을받았습니다.이러한부구성을통해의도하신바가있을까요?

발문을읽으셨다면김민정시인이“성실하다고는말못하겠”다고쓴걸보셨을거예요.세상기준에서시인으로서저는,성실하지않은게맞아요.그럼에도‘비겁한’변명을좀해보자면,시한편한편완성하는일이너무힘에부쳤던거죠.많은시인이그고통을기꺼이감내하면서도다작을하는데,그러기에는제가다소약한재질인것같습니다.그러니천천히,천천히속도를조절하는수밖에요.주저하면서한편쓰고또돌아보고괴로워하고,이걸쓸까말까……다시한편,그러고나서그고통을또?이렇게망설였던시간의감각과호흡을반영하고싶었어요.그래서조촐한시편대비부나눔이다소웅장하게,여섯개까지나왔던것같습니다.

Q4.시편에달린각주에서노래,미술,영화등다양한레퍼런스를엿볼수있습니다.그내용이때로는느슨하고엉뚱하게,때로는긴밀하고의미심장하게느껴졌는데요.선생님의창작활동에어떤영향을준작품들인지궁금합니다.

내향인이라혼자있는걸좋아하고,그때마다‘인간은대체무엇인가’라는테마로제내면을장시간탐사하곤해요.깊은갱도로들어가는광부라도된것처럼요.그때너무딥하게들어가서호흡곤란이일어나지않게해주는생의장치가제겐공부였고,음악,미술,영화감상이었어요.그런의미에서인접예술은저를초월한감각적세계의확장이라할수있죠.각종예술은가족유사성을공유하니까,깊은내면에서서로통하잖아요.그러다보니이런저런공부를많이하게되었는데,시로학위논문을쓸때는회화와의만남이주제가되었어요.미술을독학해보니지속성과깊이가부족한거아닌가?싶어서영화는전문적으로공부하기로마음먹었어요.그래서두번째박사도전을영화로했고요.그때의논문주제가하위주체(subaltern)였고,그걸쓰면서세계를보는시야가이전보다넓어지고단단해졌던것같아요.
영화쪽공부를해보니,문학에서말하는예술의자율성개념이,현대에태어나자기생일을기억하는예술인영화에는거의인용되지않더라구요.그러니세계와더직접적으로대면하는느낌이있었고,정치적으로첨예한이야기를할때기댈수있는좋은버팀목이되었어요.그래서영화에서레퍼런스를얻은시가좀많아졌죠.그건제시적ㆍ심리적변화와맞물리는지점인것같아요.예컨대난민같은소수자문제를다루었던「누군가는달이없어졌으면……하고빌었다」「모두가쿠로브스키부인」이그렇고요.페미니즘주제도「세겹의죽음,그리고카사밀라에서의재회」에서직접적으로다룰수있었어요.반면,「좀비도방귀를뀝니까?」는영화에서제목만느슨하게가져왔어요.이렇듯시편들의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