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이규리 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이규리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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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소리는 허공인데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

사랑과 상실을 손실 없이 끌어안는
투명한 농담의 시학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당신은 첫눈입니까』로 세대를 막론하고 시 독자들의 취향을 폭넓게 만족시키며 뜨거운 애호를 얻어온 이규리 시인이 다섯번째 시집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로 돌아왔다. 이규리의 표증과도 같은 통렬한 아포리즘과, 사랑스러운 유머와 농담으로 삶의 고난을 무화해내는 언어유희는 이번 시집에 이르러 한층 더 깊어졌다. 제목인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라는 질문이 개인의 역사에 자리한 공허를 넘어서 ‘연인’의 자리에 무수히 다른 단어를 넣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허공으로 작동하고 있듯이. 사람에게 무력감을 강제하는 삶의 무력은 매일같이 슬픔을 자아내지만, 슬픔 곁에서 명랑을 깎아 나눠 먹는 시인의 따스한 아포리즘은 그 무게를 투명하게 만들며 초여름 햇살처럼 청연한 빛을 발한다.

시대는 자유한가 우울은 가고 있는가

일행이 조금씩 더 기울어지고 있을 때

자신을 남쪽에 산다고 소개한 사람이 일어나
내 슬픔을 사겠다고 했다
_「명랑」 부분

시인은 사람을 짓누르는 슬픔의 기원들을 가만 들여다본다. “너무 가늘어서 가여운 슬픔에 목이라는 말이 붙는다”(「온도」)고 말하는 화자들은 각자 슬픔에 젖어 있다. 가까웠던 이들의 죽음(“한 사람을 기억하라면, 죽은 사람이야”, 「수희」), “겨우/ 조숙, 자숙, 정숙이나 가르”(「비유」)치는 세계, “길 건너 여린 초록의 피 흘리는 소식”(「부추 생각」), “연약함도 힘이 되느냐 묻는” “어떤 폭력”(「일인칭」) 등 좀처럼 슬픔을 멈춰 세우지 못하는 일들이 연잇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슬픔들은 동전의 한쪽 면과도 같아서, 이규리는 슬픔에 골똘해지다가도 그 맞은편의 명랑으로 뒤집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면/ 사람아, 내가 그 명랑을 살게”(「명랑」) 말하듯, 바로 곁의 사람 혹은 내 안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명랑에게 합당한 자리를 내어준다. 그때 비로소 슬픔은 물리쳐야 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명랑을 배태하는 근거로 모습을 바꾼다. 이처럼 이규리 고유의 산뜻한 시적 순간들은 슬픔과 웃음이 서로를 배반하지 않고 순환한다는 삶의 진실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되리라.

감자를 두더지라고 바꾸어 불렀더니

의자가 돌아보았습니다

사물은 사정거리 밖에서 꿈틀대고

두 개의 거울로 비춰보아도 사각지대는 있듯이

오늘은 허무, 내일은 전망이라는 일기를 쓰고
당신을 고슴도치라 읽을 겁니다

도마는 소리 내고 싶은 기분이 있고
_「사물 놀이」 부분

이규리 시는 매일의 일상을 구성하는 바로 내 앞의 사물을 관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계단 아래로 쏟아진 토마토를 바라보며 “내 생의 문장이 이토록 힘을 받아 굴러간 적 있을까 (…) 방울과 방울들이 목금소리를 들려주네”(「월요일의 도시락」) 생각하고, 도마는 “소리 내고 싶은 기분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이규리에게 있어 언어유희는 “줄타기하는 곡예사가 공중에서 손을 놓을 때” “넘어지지 않으려 허공을 쥐는 것”(「공중」)과도 같다. 허무가 많은 사람이 세계에 맞서는 기교이자, 생의 “무거움을 견뎌온 이유는/ 무거워서였다”(「유머」)고 말하듯 그 무게를 반대로 이용해 간단히 넘겨버리는 솜씨인 것이다.

많은 시가 아포리즘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구사하며 지혜를 건네려 하지만, 대개 아포리아의 종착지를 자처하고자 하는 욕망에 치우치고 만다. 지혜를 갈구하다가 대답을 갈구하는 것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 이규리의 시가 낳은 빛나는 아포리즘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여느 시들과 다른 고유한 묘미가 존재한다. 아포리아를 더 크나큰 아포리아로 데려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포리즘으로써 아포리즘적 기대와 사유를 해체한다. 해체는 이런 경우, 살려내는 일이 된다. 구르는 토마토가 토마토를 살리듯이, 정의(定義)를 해체하는 아포리즘이 아포리즘을 살려낸다. (…) 이 시집에 등장하는 아포리즘들은 단 한 줄로써 칼처럼 날렵하고 매섭다. 지혜를 탑처럼 쌓아둔 여느 도서들을 한 획으로 베어낸다.
_김소연 발문, 「시는 유머와 농담으로 가득한 유서」 부분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에선 끈질긴 괴로움과 허무 뒤에 따듯한 의지를 덧대어보는 아포리즘들이 언어유희와 어우러져 패치워크를 이룬다. 따라서 이 시집을 읽는 한 가지 즐거운 방법을 제안하자면 이렇다. 시집 속 아포리즘들을 경계 없이 횡단하며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경구를 옮겨 담는 것. 입안에서 음절을 굴리고 자유분방으로 필사하며 유머와 농담을 조금씩 자신의 방식대로 따라 해보는 것. 매 순간의 고난, 죽음과 이별, 슬픔을 딛고 “사라지며 살아지는 방식”(「구름 악기」)을 체현하는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편안한 방법으로는 다음을 제안한다. 시집 안의 존재들과 함께 사는 것. 일상의 편린들을 머릿속에서 상영하며 시 속에서 사는 것. “편의점 간이의자에 한 시간을 앉아 있”(「육체」)는 사람, “찬 기도실에서 무릎을 꿇”고 “흰 눈과 종소리와 조용한 용서”(「유머」)를 기다리는 사람, “모임이 있는 날인데// 종일 폭우가 쏟아졌으면”(「캔디」) 하고 바라면서도 막상 타인을 만나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 “비 젖는 화분에 물을 주”(「제라늄」)는 사람 들이 어떻게 삶에 마법을 부리는지 즐겁게 구경하는 것. 시를, 시 안의 삶과 사람들을 한껏 사랑함으로써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체감하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연인이 필요했을까』는 이 세계와 내 곁의 존재들을 잘 사랑하고픈 이들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튜토리얼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저자

이규리

저자:이규리
1994년『현대시학』을통해등단했다.시집으로『앤디워홀의생각』『뒷모습』『최선은그런것이에요』『당신은첫눈입니까』『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가있고,시적순간을담은산문집으로『시의인기척』『돌려주시지않아도됩니다』『사랑의다른이름』이있다.

목차


1부그가줄을놓을땐허공을믿는다
외연(外緣)/위안/온도/경로/골목의이마/새는,그새는/비유/명랑/일인칭/부추생각/공중/수희/101번/도미노/비누냄새

2부어려울때친절하지않기를
캔디/액자/연두의맛/월요일의도시락/카디건/면적/시절/윤리/웃음/육체/날씨/그날/기념일/중의적/대구

3부도마는소리내고싶은기분이있고
존경/사과트럭/숨바꼭질에서들키는법/사물놀이/우린뭐든말리는걸좋아해/유머/샤프펜슬/뷔페/그휴가/동해/호퍼씨의밤/압화/부탁이있는데/비와웃음/그늘만드는사람

4부흰이별과검은슬픔에대하여
구름악기/미니멀리즘/섭씨48도/만두/초대/제라늄/함께운적없지만울고있었지―灰色과悔色과懷色/당신의허기를먼저말하지말아요/옥루에선아직물이떨어지고있는데은하는벌써한바퀴를돌았다/그들은꿈꾸던곳으로갔을까/슬리퍼/파두/주소/본래면목

발문|시는유머와농담으로가득한유서|김소연(시인)

출판사 서평

시대는자유한가우울은가고있는가

일행이조금씩더기울어지고있을때

자신을남쪽에산다고소개한사람이일어나
내슬픔을사겠다고했다
_「명랑」부분

시인은사람을짓누르는슬픔의기원들을가만들여다본다.“너무가늘어서가여운슬픔에목이라는말이붙는다”(「온도」)고말하는화자들은각자슬픔에젖어있다.가까웠던이들의죽음(“한사람을기억하라면,죽은사람이야”,「수희」),“겨우/조숙,자숙,정숙이나가르”(「비유」)치는세계,“길건너여린초록의피흘리는소식”(「부추생각」),“연약함도힘이되느냐묻는”“어떤폭력”(「일인칭」)등좀처럼슬픔을멈춰세우지못하는일들이연잇기때문이다.
그러나이슬픔들은동전의한쪽면과도같아서,이규리는슬픔에골똘해지다가도그맞은편의명랑으로뒤집기를주저하지않는다.“내일아침에도같은말을할수있다면/사람아,내가그명랑을살게”(「명랑」)말하듯,바로곁의사람혹은내안에서자신의차례를기다리고있는명랑에게합당한자리를내어준다.그때비로소슬픔은물리쳐야할부정적인것이아니라명랑을배태하는근거로모습을바꾼다.이처럼이규리고유의산뜻한시적순간들은슬픔과웃음이서로를배반하지않고순환한다는삶의진실에대한깊은이해에서비롯되리라.

감자를두더지라고바꾸어불렀더니

의자가돌아보았습니다

사물은사정거리밖에서꿈틀대고

두개의거울로비춰보아도사각지대는있듯이

오늘은허무,내일은전망이라는일기를쓰고
당신을고슴도치라읽을겁니다

도마는소리내고싶은기분이있고
_「사물놀이」부분

이규리시는매일의일상을구성하는바로내앞의사물을관찰하는데서부터시작된다.계단아래로쏟아진토마토를바라보며“내생의문장이이토록힘을받아굴러간적있을까(…)방울과방울들이목금소리를들려주네”(「월요일의도시락」)생각하고,도마는“소리내고싶은기분이있”지않을까상상하며.이규리에게있어언어유희는“줄타기하는곡예사가공중에서손을놓을때”“넘어지지않으려허공을쥐는것”(「공중」)과도같다.허무가많은사람이세계에맞서는기교이자,생의“무거움을견뎌온이유는/무거워서였다”(「유머」)고말하듯그무게를반대로이용해간단히넘겨버리는솜씨인것이다.

많은시가아포리즘을직접혹은간접적으로구사하며지혜를건네려하지만,대개아포리아의종착지를자처하고자하는욕망에치우치고만다.지혜를갈구하다가대답을갈구하는것으로왜곡되었기때문이다.(…)이규리의시가낳은빛나는아포리즘들은바로이지점에서,여느시들과다른고유한묘미가존재한다.아포리아를더크나큰아포리아로데려가는경향이있기때문이다.아포리즘으로써아포리즘적기대와사유를해체한다.해체는이런경우,살려내는일이된다.구르는토마토가토마토를살리듯이,정의(定義)를해체하는아포리즘이아포리즘을살려낸다.(…)이시집에등장하는아포리즘들은단한줄로써칼처럼날렵하고매섭다.지혜를탑처럼쌓아둔여느도서들을한획으로베어낸다.
_김소연발문,「시는유머와농담으로가득한유서」부분

『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에선끈질긴괴로움과허무뒤에따듯한의지를덧대어보는아포리즘들이언어유희와어우러져패치워크를이룬다.따라서이시집을읽는한가지즐거운방법을제안하자면이렇다.시집속아포리즘들을경계없이횡단하며내마음에들어오는경구를옮겨담는것.입안에서음절을굴리고자유분방으로필사하며유머와농담을조금씩자신의방식대로따라해보는것.매순간의고난,죽음과이별,슬픔을딛고“사라지며살아지는방식”(「구름악기」)을체현하는것이다.
이시집을읽는편안한방법으로는다음을제안한다.시집안의존재들과함께사는것.일상의편린들을머릿속에서상영하며시속에서사는것.“편의점간이의자에한시간을앉아있”(「육체」)는사람,“찬기도실에서무릎을꿇”고“흰눈과종소리와조용한용서”(「유머」)를기다리는사람,“모임이있는날인데//종일폭우가쏟아졌으면”(「캔디」)하고바라면서도막상타인을만나면최선을다하는사람,“비젖는화분에물을주”(「제라늄」)는사람들이어떻게삶에마법을부리는지즐겁게구경하는것.시를,시안의삶과사람들을한껏사랑함으로써살아갈수도있다는걸체감하는것이다.종합하자면『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는이세계와내곁의존재들을잘사랑하고픈이들을위한,더할나위없는튜토리얼이아닐수없다고하겠다.

이규리시인과의5문5답

1.겨울이찾아올때마다독자들의뜨거운사랑을받아온,직전시집『당신은첫눈입니까』로부터어느덧만으로4년이지났습니다.그리고여름이다가오는시기에신작시집『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로독자들을다시만나는소감이궁금합니다.

―새시집을내는마음이두렵듯이새독자들을만나는마음은더욱조심스럽습니다.낭만적으로들릴직전시집의‘첫눈’이나새시집의‘연인’이실상각각‘부질없음’과‘회한’을나타내고있음을아시게될것입니다.표면적인해석이가능하다면그제목을썼을리가없겠지요.이번새시집으로저는인간이가진섬세한안목으로이전과달라진슬픔의모습을어떻게보아주실지기다리고있습니다.

2.시집전반에서명랑과슬픔이다채롭게교차한다는느낌을받았습니다.“내슬픔을사겠다”는이에게“내가그명랑을살게”(「명랑」)말하는것처럼슬픔은명랑에관심을기울이고,명랑은슬픔에빚지고있다는생각도들었어요.명랑과슬픔의이런동전의양면같은관계를어떤계기로천착하게되었는지여쭙습니다.

―우리가더어찌할수없어서,슬픔만으로는계속감당하기벅차고지루해져서저는좀달라지고싶었습니다.유머와농담의형식으로요.그렇다고깔깔웃거나허리를잡는그런몸짓은아니고짐짓딴곳을보거나슬그머니말머리를돌려아픔을눌러보는여유랄까.그것이더슬픈몸짓이란걸눈밝은독자는아시겠지만요.명랑과슬픔은사실뫼비우스의띠처럼한몸이에요.“우리아는사이였나”묻고“글쎄토마토였던거같아”라고딴청을부립니다.그러면서스스로가련해져서말하고있어요.사실은“슬픔이웃음을받치고있었다고//최선이이미웃음이었다고”슬픔이야말로가장선량한내면언어이므로슬픔을아끼고있다면이미우린나름대로최선이었다고말해드리고싶었어요.

3.시집의제목“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는일견개인의감성을연상하는듯하지만시집을찬찬히읽어보면“외로운시대야/종일기계들만마주하고있어”(「호퍼씨의밤」)라는구절처럼결핍과사랑이사회적이고시대적인차원으로확장되는듯합니다.이제목에담고자하신이야기를청해듣고싶습니다.

―부탁드리고싶은것은‘연인’이라는단어를확장하여다양하게해석해주시면좋겠어요.저는‘연인’의자리에무수한다른단어를대입시켜보라고권해드리고싶어요.가령,“우리는왜그토록많은고통이필요했을까”“우리는왜그토록많은절망이필요했을까”등등.말씀하신대로‘결핍’때문에우리는많은걸갈구했고결국더많은결핍에시달린다는걸깨닫게되지요.‘연인’역시‘덧없음’의다른단어입니다.최첨단의시대,문명이결핍을해소하지않습니다.오히려가중시키죠.그럴때상상의나라로숨습니다.저는구름을좋아합니다.자유롭고변화가무궁한구름.어느날,첼로처럼생긴구름을따라가면서,그커다란악기를품어주면소리가오듯사랑을실천하는거라믿으면서,악기소리내며,구름처럼수많은상상의언어를개발하다가문득멈춰서서스스로묻습니다.“우리는왜그토록많은연인이필요했을까”라고,이문장은허무의한가운데서뱉는희디흰한숨,의성어같은것입니다.

4.아직이시집을손으로들기전인독자들에게특별히추천하고싶은한편의시가있다면무엇인가요?

―「월요일의도시락」을추천하고싶어요.거기쓸쓸함과고단함,위와아래라는계급,월요일이라는중압감과어찌할수없는난감한상황에서발휘되는명랑과속도,그럼어때?하면서절망대신목금소리를듣는이아찔한전환을공감하시기바라면서요.

5.보라색인듯분홍색인듯오묘한색상의시집을앞에두고제목과시를연상하고있을독자들에게간단히인사부탁드리겠습니다.

―모든연인은지나간연인,모든인연은다시올인연이라고생각합니다.종이는종이아닌것으로이루어져있으니까요.사랑은더이상낭만이아님을우리는이미압니다.거기서시작하시면됩니다.우리가우리이상이될수있다는믿음말입니다.더면밀하게더낮은곳에서모든존재하는것에진심을다하면연인이고인연이아닐까요?

시인의말

나의모든슬픔은의지였다.

미안하지않다.

2025년6월
이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