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다른 핑크 (이예진 시집)

장르가 다른 핑크 (이예진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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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겠지”

미숙했던 시절이 나를 조롱하지 않도록, 일정한 모양 속에 갇히지 않도록,
제 목소리로 이루어진 집을 허물고 또 허물며
언제나 장르가 다른 핑크를 꿈꾸는 시

밝음 속에 깃든 간절함의 색채, 이예진 첫 시집 출간!
문학동네시인선 236번으로 이예진의 『장르가 다른 핑크』를 펴낸다. “선명하고 정직”한 언어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진술들”과 “괄목할 만한” 이미지를 펼치며 “가계와 욕망과 폭력 같은 유구한 것들의 민낯을 기록”한다는 심사평을 받으며 202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한 시인의 첫 시집이다. 그간 시인이 부지런히 발표한 시 50편이 엮인 『장르가 다른 핑크』에는 자신을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지진 파티」)으로 인식하는 화자가 “일정한 모양의 퍼즐 조각이 되기를 요구하는 세계”에 “포획되지 않겠다”(해설, 김미정)고 선언하는 의지 어린 목소리가 담겨 있다. ‘학교’ ‘선생님’ ‘선배’ ‘아버지’ 등으로 표상되는 세계로부터 가해지는 규율과 억압에 부대끼며 “수시로 말이나 감정을 삼키는”(해설) 이예진의 시 속 화자는 대개 여자아이, 혹은 그런 여자아이가 성장한 성인이다. 동세대의 여성과 ‘언니’로 대표되는 선대 여성의 모습을 성찰하는 시선으로 그려낸 이번 시집을 문학평론가 김미정은 “특정 세대 여성으로서의 자기 맥락을 섬세하게 포착한 자문화기술지(autobiography)의 일종”이자 “한국 문화예술에서 약진해온 여성 성장물의 계보를 잇는 시집”이라고 평한다. 『장르가 다른 핑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한 번이라도 불화해본 이라면, 자신의 미래를 언제나 다른 색깔로 칠하고 싶어하는 이라면 누구든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방과후 실험관찰 친구들은 금붕어를 액체질소에 담가본 적이 있다 드라이아이스를 삼키면 서로를 오래도록 기억할 거라는 말을 하며 웃었다 수업을 째고 눈사람을 만들러 간 선배 둘이

눈이 되어 돌아왔대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고
이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까
머리를 들이밀었다

얼었던 것을 녹이기 위해 빛은 회전할 것이다
우리가 믿었던 선생으로부터
사랑과 우정을 이런 식으로 배울 줄은 몰랐지

(…)

어느 날 선생은 우리 모두에게 눈을 감으라고 시켰다 누구든 거수해서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돌아갈 거라고

실눈뜬 거 다 보인다고
우리는 질끈 감았지만

그래도 다 보인다
전자레인지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빛처럼
이 교실 안에도 환하게 빛나는

불온하게 꿈틀대는
암묵적인 것들

창문 밖으로
작게 쪼개진 선배들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_「우리 모두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귀를 뚫었다」 부분

시집의 문을 여는 「우리 모두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귀를 뚫었다」는 1부 ‘살던 집에 불을 붙이는 건 어떤 마음일까’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암시한다. “금붕어”를 “액체질소”에 담그는 “친구들”, “사랑과 우정”을 “불온”한 방식으로 배우게 하는 “선생”이 있는 교실 풍경은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주요한 시기인 십대 시절이 크고 작은 폭력성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폭력성의 세계는 ‘학교’라는 공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을” “바지에서 꺼내 보여주”(「방학」)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길가’, “화가 나면 사포질을” 하는 “아버지”가 있는 ‘집’ 또한 마찬가지로 화자에게 놓인 난관의 공간이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화자가 “배운 걸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주입식 선과 악을 잘 흡수하는”(「낭만을 먹고 자란 돼지는」) 순응적인 사람으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누구도 피해 입히지 않고 차라리 자신의 “테두리”(「지진 파티」)를 지움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는 “미숙했던 시절”(「다정과 과정」)로부터, “발전과 발명과 발견의 강박”(「낭만을 먹고 자란 돼지는」)으로부터 탈주하고, 자신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집을”(「방학」) 거듭 허물며 자기 갱신을 단행한다.

그 시절 썼던 시는 휴지통에 넣고
나는 새로 적는다
_「다정과 과정」 부분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2부 ‘주인공은 세계를 꼭 구해야 하는 걸까’로 연결, 확장되는 듯하다. 2부의 화자는 “빵집”과 “패스트푸드점”(「그땐 프렌치블랙을 피웠다 같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프렌치블랙 난민들이라 불렀다」), “피자집”(「피자 커터」)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살다보면 싸울지 말지를,/ 말할지 말지를 고민”(「수건이 쌓여 무덤을 만들었어」)하며 성장한 “어른”(「장르가 다른 핑크」)이다. 가게 밖에서는 여느 동료 시민일 따름인 손님들은 화자에게 가혹하게 굴고, 그런 취약한 노동 현장에서 화자는 고통받는다.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이제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라는 거겠지

창고에 살던 무언가는
학교가 폐교된 뒤로 봉인되어 있다

오래전
줄을 넘던 그 운동장에서
우리는 모래구름을 만들며 정의를 약속했다

정의는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야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우리는 기를 모았다

세계의 작은 움직임을 포착하기 위해
_「존재의 성립」 부분

그러나 화자는 누군가를, 혹은 세계를 비난하기보다 그런 세계의 폭력성에 잠깐이나마 물들어 있던 자신을 먼저 성찰하는 윤리적인 태도를 보이며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이번 시집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존재의 성립」에서 또 한번 아름답게 빛난다. 화자는 “오래전” “누구가” “매질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하던 “학교”의 “체육관 창고”를 떠올리면서, “정의”란 “다음 사람에게/ 창고를 조심하라고 일러주는 거”라고 말한다. 그 정의란 한 명의 주인공이 “세계를 구해야 하는”(「장르가 다른 핑크」) 영웅 중심적 세상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부”로 둔 “네 살 많은 언니”가 화자에게 일러준 것처럼, “내 장면은 내가 책임지”(「존재의 성립」)는 것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와 나는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다
평생을 약속한
믿음 하나로

현재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나는 통조림 공장에 간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뚜껑을 잠그다 돌아온다

(…)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

이제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술에 취한 미래가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것을 본다

(…)

미래는 우리집에
꽁초를 버리는 언니의 이름

나는 미래의 벗은 몸을 생각하다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안으로
손을 넣을 뻔한 적이 있다
_「오랜 미래」 부분

3부 ‘우리는 기울어진 시소에서 내려올 수 없겠다’에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시편들이 담겨 있다. 이예진 시 속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각자 마음의 “무게”가 달라서 “기울어진 시소”(「영화부」)처럼 관계가 어긋나 있는 듯하다. “오 년째 같이 살고 있”는 현재와 ‘나’의 이야기를 그린 「오랜 미래」에서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현재,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나’는 현재가 가르치는 한 아이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데, 현재는 그 아이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심상치 않은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열을 맞춰 서 있는 통조림”을 떠올릴 뿐이다.
이처럼 “금간 얼음 위에 서 있는 연인”(「스노볼」) 사이의 몰이해, 균열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는 무엇일까”(「러브 앤 에너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애인”을 “이해”하기 위해, 한때 “‘사랑’이 포함된 제목의 시집을 찾아”(「사랑이 누리고 간 자리」)다니기도 했던 화자는, 이제 “지루”하고 “익숙”(「러브 앤 에너지」)하고 낡게 느껴지는 사랑에 얽매이기보다는, “이런 이야기는/ 무엇을 끌어오는 힘이 있나요?”(「러브 앤 에너지」)라고 생각의 회로를 바꾸며 관계 속에서 한 발짝 떨어져나와 자신과 타인이 누리고 간 ‘사랑의 자리’에 대해서 묘사하는 성숙한 시선을 획득한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장을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사람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

여기선 문을 잠그지 않아도 괜찮아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
_「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부분

4부 ‘칼을 숨긴 사람들은 왜 울면서 웃고 있었는지’는 주로 유년 시절 가족에게 받은 상처의 모습을 그리면서 독자로 하여금 아릿한 회상에 잠기게 하는 한편, 이예진 시의 내밀한 근원적 세계를 살피게 한다. “호랑이띠라서 성질 죽여야 했”(「나는 호랑이띠라서」)던, “닭 잡는 소리”가 들려오는 명절의 한가운데에서 “너 예쁜 딸은 못 낳겠구나”(「구정」)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화자의 이야기는 가족 내에서 화자와 같은 세대의 여성이 겪은 차별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예진의 시는 상처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따로 살게 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떠나간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시인의 데뷔작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의 마지막 문장이 “집이 사라지고 방향이 생겼다”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안전하게 기거하는 이미지로 표상되는 ‘집’이 사라지자 ‘방향’이라는 목적이 생겼다는 데에서 이미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으로서의 존재 방식을 예견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시인은 문학동네시인선 200번 기념 티저 시집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감정이 감정으로만 문장이 문장으로만 남지 않는, 그런 곳에 마을을 짓고 견디는 것”이라 답한 바 있다. 시인은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을 통해 자신처럼 ‘테두리가 없는 퍼즐 조각’ 같은 무수한 이들에게 ‘마을’이 되어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장르가 다른 핑크』는 한 시절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언제나 ‘장르가 다른 핑크’가 되기를 꿈꾸는, 쨍한 밝음 속에 깃든 간절함의 색채 그 자체이다.

이 이후의 이야기는 당신이 읽고 나서
이로운 세상이란 무엇인지
결말을 작성해주기 바란다

먼 옛날 어딘가에서 힘을 모으던 소저의 후손이
당신일지도 모른다
_「이 소저는 큰 힘이 여기서 나온다고 믿었다」 부분

『장르가 다른 핑크』의 자문화기술지는, 진공상태 속 오롯한 이미지로 상상된 자기(self)가 아닌, 무수한 타자들의 흔적이자 동시에 거기에서 비롯된 특이성으로서의 ‘나’들의 기록이다. 또한 이 시들은 무한한 다시 쓰기를 가능케 하는 그 구멍들을 찾고 응시하는 일에 우리를 연루시킨다. (…) 이예진의 『장르가 다른 핑크』는 다시 쓰일 시들의 진원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 시인의 첫 시집에 대한 말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 삶을 점점 더 회로화하는 세계 속에서 시라는 장르에 거는 믿음의 말이기도 하다. _김미정, 해설에서
저자

이예진

저자:이예진
2023년한국일보신춘문예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

목차

시인의말

1부살던집에불을붙이는건어떤마음일까
우리모두가같은날같은곳에서귀를뚫었다/장마/빙상/테러범/지진파티/레크리에이션/목제/방학/낭만을먹고자란돼지는/놀이터/부력/■/다정과과정

2부주인공은꼭세계를구해야하는걸까
그땐프렌치블랙을피웠다같은담배를피우는사람들을프렌치블랙난민들이라불렀다/기초명암/그럼에도거리의나무들은적당히자란다/피자커터/수건이쌓여무덤을만들었어/사방치기/닌자는스키장에서도기척을숨길수있을까/어쩌면대박날지도모르는/산행/존재의성립/장르가다른핑크

3부우리는기울어진시소에서내려올수없겠다
오랜미래/사랑의시대/자유로운영혼과리듬/피아노/불협화음/영화부/신년/크리스마스/스노볼/세한빌라/전당포/산책로/러브앤에너지/사랑이누리고간자리

4부칼을숨긴사람들은왜울면서웃고있었는지
나의마을이설원이되는동안/우는돌/구정/밤새/빛이좋아서어둠을반으로그었다/흰토끼검은똥/그시절몰래스도쿠를풀다혼났고/미세/스릴러/나는호랑이띠라서/밥집/이소저는큰힘이여기서나온다고믿었다

해설|‘구멍이빼곡한시’에대한한개의주석
김미정(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방과후실험관찰친구들은금붕어를액체질소에담가본적이있다드라이아이스를삼키면서로를오래도록기억할거라는말을하며웃었다수업을째고눈사람을만들러간선배둘이

눈이되어돌아왔대

전자레인지의문을열고
이안에사람이들어갈수있을까
머리를들이밀었다

얼었던것을녹이기위해빛은회전할것이다
우리가믿었던선생으로부터
사랑과우정을이런식으로배울줄은몰랐지

(…)

어느날선생은우리모두에게눈을감으라고시켰다누구든거수해서사실대로말하면우리는무사히집에돌아갈거라고

실눈뜬거다보인다고
우리는질끈감았지만

그래도다보인다
전자레인지내부를환하게밝히는빛처럼
이교실안에도환하게빛나는

불온하게꿈틀대는
암묵적인것들

창문밖으로
작게쪼개진선배들이
반짝이며흩날리고
_「우리모두가같은날같은곳에서귀를뚫었다」부분

시집의문을여는「우리모두가같은날같은곳에서귀를뚫었다」는1부‘살던집에불을붙이는건어떤마음일까’의전체적인분위기를암시한다.“금붕어”를“액체질소”에담그는“친구들”,“사랑과우정”을“불온”한방식으로배우게하는“선생”이있는교실풍경은정체성을형성해가는주요한시기인십대시절이크고작은폭력성으로가득차있음을보여준다.이러한폭력성의세계는‘학교’라는공간에서끝나지않는다.“학교에서배우지않는것을”“바지에서꺼내보여주”(「방학」)는사람을만나게되는‘길가’,“화가나면사포질을”하는“아버지”가있는‘집’또한마찬가지로화자에게놓인난관의공간이다.
그러나주목할점은화자가“배운걸곧이곧대로믿”으면서“주입식선과악을잘흡수하는”(「낭만을먹고자란돼지는」)순응적인사람으로머무르려하지않는다는것이다.화자는누구도피해입히지않고차라리자신의“테두리”(「지진파티」)를지움으로써자신을억압하는“미숙했던시절”(「다정과과정」)로부터,“발전과발명과발견의강박”(「낭만을먹고자란돼지는」)으로부터탈주하고,자신의“목소리로이루어진집을”(「방학」)거듭허물며자기갱신을단행한다.

그시절썼던시는휴지통에넣고
나는새로적는다
_「다정과과정」부분

화자의이러한태도는2부‘주인공은세계를꼭구해야하는걸까’로연결,확장되는듯하다.2부의화자는“빵집”과“패스트푸드점”(「그땐프렌치블랙을피웠다같은담배를피우는사람들을프렌치블랙난민들이라불렀다」),“피자집”(「피자커터」)등에서아르바이트를하는,“살다보면싸울지말지를,/말할지말지를고민”(「수건이쌓여무덤을만들었어」)하며성장한“어른”(「장르가다른핑크」)이다.가게밖에서는여느동료시민일따름인손님들은화자에게가혹하게굴고,그런취약한노동현장에서화자는고통받는다.

가르칠게없다는말은
이제내장면은내가책임지라는거겠지

창고에살던무언가는
학교가폐교된뒤로봉인되어있다

오래전
줄을넘던그운동장에서
우리는모래구름을만들며정의를약속했다

정의는다음사람에게
창고를조심하라고일러주는거야

이보다중요한일이있을까?

우리는기를모았다

세계의작은움직임을포착하기위해
_「존재의성립」부분

그러나화자는누군가를,혹은세계를비난하기보다그런세계의폭력성에잠깐이나마물들어있던자신을먼저성찰하는윤리적인태도를보이며읽는이의마음을움직인다.이러한화자의태도는이번시집의대표작중하나로꼽을수있는「존재의성립」에서또한번아름답게빛난다.화자는“오래전”“누구가”“매질하는소리”가들려오곤하던“학교”의“체육관창고”를떠올리면서,“정의”란“다음사람에게/창고를조심하라고일러주는거”라고말한다.그정의란한명의주인공이“세계를구해야하는”(「장르가다른핑크」)영웅중심적세상에서생겨나는것이아니라“사부”로둔“네살많은언니”가화자에게일러준것처럼,“내장면은내가책임지”(「존재의성립」)는것임을깨닫는데서부터비롯되는것처럼보인다.

현재와나는오년째같이살고있다
평생을약속한
믿음하나로

현재는학원에서수학을가르치고
나는통조림공장에간다
컨베이어벨트앞에서
뚜껑을잠그다돌아온다

(…)

쓰레기를버리러나간다

이제는미래에대해이야기할때

술에취한미래가
담벼락에오줌을누는것을본다

(…)

미래는우리집에
꽁초를버리는언니의이름

나는미래의벗은몸을생각하다가

공장의컨베이어벨트안으로
손을넣을뻔한적이있다
_「오랜미래」부분

3부‘우리는기울어진시소에서내려올수없겠다’에는사랑과관계에대한시편들이담겨있다.이예진시속‘사랑’하고있는이들은각자마음의“무게”가달라서“기울어진시소”(「영화부」)처럼관계가어긋나있는듯하다.“오년째같이살고있”는현재와‘나’의이야기를그린「오랜미래」에서이것이여실히드러난다.학원에서수학을가르치는현재,통조림공장에서일하는‘나’는현재가가르치는한아이에관해대화를나누는데,현재는그아이가“하나를가르치면/열을깨우”치는“심상치않은아이”라고생각하지만‘나’는“열을맞춰서있는통조림”을떠올릴뿐이다.
이처럼“금간얼음위에서있는연인”(「스노볼」)사이의몰이해,균열은화자로하여금자신의“한계는무엇일까”(「러브앤에너지」)라는질문을불러일으킨다.“애인”을“이해”하기위해,한때“‘사랑’이포함된제목의시집을찾아”(「사랑이누리고간자리」)다니기도했던화자는,이제“지루”하고“익숙”(「러브앤에너지」)하고낡게느껴지는사랑에얽매이기보다는,“이런이야기는/무엇을끌어오는힘이있나요?”(「러브앤에너지」)라고생각의회로를바꾸며관계속에서한발짝떨어져나와자신과타인이누리고간‘사랑의자리’에대해서묘사하는성숙한시선을획득한다.

내가어릴때,동화를쓴적이있다내가언니의숙제장을찢으면서시작되는이야기다언니도화가나서엄마의가계부를찢었고엄마는아빠의신문을찢고아빠는달력을찢다가,온세상에찢어진종이가눈처럼펄펄내리며끝난다

손금이사라진사람들이어디로갔는지아무도말해주지않았다집에남고싶은사람은정말로나하나뿐일까?언니의이야기는여기까지다

(…)

여기선문을잠그지않아도괜찮아

집이사라지고방향이생겼다
_「나의마을이설원이되는동안」부분

4부‘칼을숨긴사람들은왜울면서웃고있었는지’는주로유년시절가족에게받은상처의모습을그리면서독자로하여금아릿한회상에잠기게하는한편,이예진시의내밀한근원적세계를살피게한다.“호랑이띠라서성질죽여야했”(「나는호랑이띠라서」)던,“닭잡는소리”가들려오는명절의한가운데에서“너예쁜딸은못낳겠구나”(「구정」)라는말을들어야했던화자의이야기는가족내에서화자와같은세대의여성이겪은차별을상기시킨다.하지만이예진의시는상처를회고하는데서그치지않는다.따로살게된엄마와아빠,그리고떠나간언니에대한이야기를담은시인의데뷔작「나의마을이설원이되는동안」의마지막문장이“집이사라지고방향이생겼다”인것은의미심장하다.안전하게기거하는이미지로표상되는‘집’이사라지자‘방향’이라는목적이생겼다는데에서이미‘테두리가없는퍼즐조각’으로서의존재방식을예견한것으로느껴지기때문이다.
시인은문학동네시인선200번기념티저시집『우리를세상의끝으로』에서‘시란무엇인가’라는질문에“감정이감정으로만문장이문장으로만남지않는,그런곳에마을을짓고견디는것”이라답한바있다.시인은「나의마을이설원이되는동안」을통해자신처럼‘테두리가없는퍼즐조각’같은무수한이들에게‘마을’이되어주고싶었던건아닐까.『장르가다른핑크』는한시절의상처를딛고일어나언제나‘장르가다른핑크’가되기를꿈꾸는,쨍한밝음속에깃든간절함의색채그자체이다.

이이후의이야기는당신이읽고나서
이로운세상이란무엇인지
결말을작성해주기바란다

먼옛날어딘가에서힘을모으던소저의후손이
당신일지도모른다
_「이소저는큰힘이여기서나온다고믿었다」부분

『장르가다른핑크』의자문화기술지는,진공상태속오롯한이미지로상상된자기(self)가아닌,무수한타자들의흔적이자동시에거기에서비롯된특이성으로서의‘나’들의기록이다.또한이시들은무한한다시쓰기를가능케하는그구멍들을찾고응시하는일에우리를연루시킨다.(…)이예진의『장르가다른핑크』는다시쓰일시들의진원지이다.그리고이것은한시인의첫시집에대한말인동시에오늘날우리삶을점점더회로화하는세계속에서시라는장르에거는믿음의말이기도하다._김미정,해설에서

이예진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장르가다른핑크』는시인님의첫시집입니다.첫시집을펴내는소회가남다르실것같습니다.

안녕하세요?이예진입니다.반갑습니다.시를처음으로쓰던때엔감히상상할수없던지금을오래도록되새기고싶어요.시집을묶으면서그동안통과해온시간을다시느껴보는계기가되기도했어요.이시집이여러분을핑크로물들일수있기를바랍니다.

Q2.1부의문을여는「우리모두가같은날같은곳에서귀를뚫었다」는학교교실을배경으로그린시예요.「장마」에는“물에떠내려”간“선생님”이야기가나오고,자신의“목소리로이루어진집”(「방학」)을허무는화자도등장한다는점에서1부는‘성장’을테마로한다고느껴졌어요.

제시에서학교에남은화자는아직졸업하기싫나봐요.교실밖복도에는여전히우산이펼쳐진채마르고있을것같고,다함께미워하던선생님은아직도재미없는농담을계속되풀이하고있을까요?이제는지나온순간들이지만,미처졸업하지못한마음들이남아시로쓰인것같아요.『장르가다른핑크』에는그만큼학교장면이많이등장하는데눈여겨읽어보는것을추천해봅니다.

Q3.표제시「장르가다른핑크」에서“주인공은꼭세계를구해야하는걸까”라는문장이인상적이었어요.“할줄몰라서안하는것이아닌어른이되어”살아간다는것에대한성찰이담긴듯도하고요.이시는어떻게쓰게되었나요?

예전에본영화를다시보면그때와지금의시차가고스란히전해지는것같아요.당시에는몰랐던장면을발견하는것처럼요.혹은악역을미워할수없게되는것,영화가끝난뒤이후를걱정하게되는것처럼요.때로는주인공이문제를해결하는과정에서위안을얻기도해요.「장르가다른핑크」는영화를다시본뒤남겨진그런마음이담겨있어요.어릴때DVD로몇번을돌려본영화를다시보고있으면그시절의어린나를발견하기도해요.어쩌면어른이된다는것은다시만난영화에서미처발견하지못한균열을마주하는것아닐까요.

Q4.3부는주로사랑과관계의풍경을그린듯해요.“‘사랑’이포함된제목의시집을찾아다녔다”(「사랑이누리고간자리」)라는문장이기억에남아요.이번시집에서특히아끼는시가있다면무엇인지도궁금합니다.

사랑은읽을때마다다르게읽히는문장처럼느껴져요.세상엔사랑에관한문장이많아서때로는내가쓴것이사랑이맞는지의심해보기도하고요.사전을뒤적여도사랑의의미는언제나다르게다가오는것같아요.아마온전히헤아릴수없어서그런가봐요.아끼는시로는「존재의성립」을뽑고싶어요.영화<쿵푸팬더>가개봉했을때동네의아이들은줄넘기를쌍절곤처럼휘둘렀거든요.만나자고약속하지않아도놀이터에서알아서모이던시기가있었어요.우리끼리의무언가를도모하는것은어른들은모르는비밀작전같은것이었죠.사소한것을굳건한믿음으로약속하던시절을시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