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밤

이상한 밤

$12.50
Description
“네 앞에 여름 내내 마음 하나가 있었고
그는 네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멋진 일이었다.”

닿기 위해 물러나는 '진짜 급진주의자 시인'
되어가는 것들이 펼쳐 보이는 흰 빛의 목소리
문학동네시인선의 245번째 시집으로 채호기 시인의 『이상한 밤』을 펴낸다. 198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하여 시력 40년에 육박해가는 그의 10번째 시집이다. 전작 『머리에 고가철도를 쓰고』가 출간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신작 시집을 선보이는 그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초신성’에 빗대고 싶을 만큼, 그의 시작은 매번 새롭게 죽고 매번 새롭게 태어난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참신과 경신을 거듭하며 뜨겁게 빛나는 에너지로 똘똘 뭉친 『이상한 밤』은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점에 이를락 말락 할 때의 바로 그”(인터뷰에서) 시적 에너지로 넘실거리고 우글거리고 예측 불가능한 ‘시적 공작물’에 다름 아니다. 이번 채호기의 시집에서는 빛이 말한다, 음악이 만진다, 벌레가 쓴다, 집이 건축한다. 이 무한한 (불)가능성과 (비)상상력 앞에서 시인은 우주의 필경사가 되어 삼라만상을 기록-현상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저 우주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로서 우주를 쓰고 말하는 필경사가 된다.
저자

채호기

저자:채호기
1988년『창작과비평』을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지독한사랑』『슬픈게이』『밤의공중전화』『수련』『손가락이뜨겁다』『레슬링질수밖에없는』『검은사슴은이렇게말했을거다』『줄무늬비닐커튼』『머리에고가철도를쓰고』『이상한밤』,산문집『그리되,그리지않은것같은,』『주고,받다』(공저)가있다.김수영문학상,현대시작품상을수상했다.

목차

시인의말

I

이상한밤/돌에게,아밤에게/두개의모음/책상,그옆에유리창/‘낙석주의’표지판을위한한조각/둥근유리전구/연필/안경을위한한조각/장갑을위한한조각/피아노/뱃머리/투명한유리/빗물받이홈통을위한한조각/달을위한두개의모음

II

카메라를위한두조각/사다리를위한한조각/빵과돌사이에/식탁보를위한한조각/온도조절기의한부품/유리잔을위한한조각/시계를위한하나의파편/다이빙대/피아노를위한두조각/망각의영토/세개의모음/공에서떨어져나온하나의파편/음악의바다에바다가비치고바다에음악이비친다/집을위한두조각/두묶음

III

커튼을위한한조각/나비/두개의모음/두개의조각/돌을위한세개의파편/고란초를위한한조각/검은눈방울새를위한한조각/미루나무를위한한조각―김창태에게/배롱나무를위한한조각/유도화를위한하나의파편/새를위한한조각/부목을위한한조각/두묶음/꽃마리/세개의조각

IV

금풍뎅이를위한한조각/품안에/세묶음/식물성/청자고둥/모기를위한하나의단편/두개의모음/눈/석류를위한한조각/나뭇가지를위한한조각/작은꽃들/한나무/숲의청춘/초록사태

V

멧종다리/유리딱새/끈끈이귀개를위한한조각/파리를위한한개부스러기/쐐기,변신을위한하나의아포리즘/무화과나무를위한한조각/메타세쿼이아/한죽음을위한세개의단편―안녕,이혜란/검은나무딸기/블랙홀/아직도소용돌이치며울려고하는가/거리를위한한조각/풍경/죽음의순간

VI

부패는생각의힘이다/시냇물을위한한조각/오름/검멀레/계곡을위한한조각/강을위한하나의파편/여름을위한한조각/빗물웅덩이를위한한조각/마음을위한다섯조각/집이건축했다/구름을위한네개의조각/밤을위한두조각/빛을위한두조각

VII

서로설렌다/아침을위한한조각/시간을위한미니어처/그늘을위한세개의조각/웅덩이는생각한다/고도5,596미터를위한두개의부품/아름다운음악은어떻게무가되어버리는가?/날씨를위한두조각/마음의무늬/물의시/물을위한하나의파편/한여름/태풍을위한한조각/언덕이언덕에올라

VIII

한음의연구를위한미니어처/돌담을위한한조각/마음을위한한조각/선잠을위한한조각/두조각/의지를위한여섯개의퍼즐조각/불켜진창을위한한조각/두조각/새벽을위한세조각/생각을위한다섯개의모음/두조각/내밀함/목소리를위한두조각

IX

정신은나무의자를놓으려애쓴다/바다를위한전주곡/경이로움/꿈/네개의퍼즐조각/히아신스의꿈/애도/데이비드봄의『전체와접힌질서』스핀에서바스러진두개의부스러기/서랍장을위한미니어처/물로나뱅뱅―최예영에게/흰빛에사로잡혀서/흔들어라/녹색안구의식은시/잠속에빛을보낸다/이미곪아가고있다/인공지능과인간지능

X

가문비나무와불안한정신을위한한조각/슬픔을위한한조각/물을위한두개의조각/빙하가녹고있다/미래로부터지금여기로/기후위기/지구온난화를보는한겹코팅/음식/쇳물불덩이를위한한개파편/마네가그린말라르메초상화복제사진/우물거리는우물거림/비생명체를위한한개의부스러기/침묵을위한한조각/중력/돌의시간/사물의흉계/바다

해설|모르는채로만지기
전승민(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진짜급진주의자시인은사물을
새로운언어로명명하지않고
새로운사물을만들어낸다.

진짜급진주의자시인은글을쓰거나말하지않고
시가사물에접근하거나사물이
인간을읽고기록하는시적공작물을만든다.

시인은쓰기에열중하는만큼그것이유일한열정이아니라는것.
시는생각과실행이합치는곳에
종이와잉크와낱말이만나는지점을발명한다.
_「세개의모음」부분

『이상한밤』은10개의묶음으로총145편의시를선보인다.

이예외적으로묵직한시집은시편하나하나가“하나의단일하고유일한개체이면서도”“시집이라는다양체로서의집합에서는제각각의”기능을해야했기에“최대한많은객체”(인터뷰에서)가소집되어야만했다.더불어평론가전승민의제안에따르자면,“반드시목차대로읽을것을권한다”.이는“한편의교향곡을개별악장으로청취할수있으나그곡을하나의음악으로이해하기위해서는반드시1악장부터시작해야하는것과같”(해설에서)은이치로,‘전체를위한하나-하나를위한전체’라는유기적순환을체험하는차원에서도그러하다.그의이번시집을읽는또하나의방법이자비유를제안하자면,마치‘테라리움전시관’을구경하는마음으로한편한편을감상해도좋을듯하다.각기하나의고유한세계이면서그세계가하나로응집된장소로서의시.물론이를감상하는관객인우리역시전시의일부라는것을인지하면서,나아가우리역시테라리움으로부터감상되고있다는사실을상기하면서.

네가달을볼때,달은너를보고있지않다.
네가달을보고있을때달도너를보고있지만,네가보는방식과는전혀다른방식으로―네가너를중심으로달을보듯달도달을중심으로―너를본다.
_「달을위한두개의모음」부분

바다는바다고해변은해변이어서
그것들과너는고유하고독립적이어서
하나의아름다움으로서로설렌다.
_「서로설렌다」부분

시는생래적으로언어와시선에붙박여있을수밖에없기에,시와시인은그한계내에서문학적장치를통해뛰어넘거나무화시키며독자와교감한다.그러나채호기의시는문학적장치라할법한그‘인간적’인수사와기예에는거의관심이없는듯하다.차라리비인칭/비인간의목소리라고말해도좋을법한필경사의쓰기를통해,그는객체를완전히그려내고담아낼수없는불가능성과,인간에게는상상력으로보이지만비인간에게는비-상상력일현상을쓰는일에몰두한다.그리고바로이지점에서그의시를읽는재미가발생하는데,인간이사물을꾀어취하는것이아니라사물의흉계에기꺼이인간이연루되는전복의향연속에서,독자들은진정한시적자유와에너지를느끼는것이다.시편하나하나에서생겨나는차이와반복,주체와객체가전도되거나주체가사라져가는소멸의운동속에서“인칭의물리적인전환이아니라시적주체가자신으로부터물러나타자화되는사상초유의사건”(해설에서)이발생하고,그리하여시와시인이,시인과독자가,독자와시가아름답게만난다.

무엇에이끌리는지모르는채우리는어떤것들의심연가까이로허겁지겁달려든다.
사랑은입술을내밀고손으로거머쥐려는포옹

에앞서빛이어루만지는그윽한시선이다.
몸을부리지않고도돌보고지키는,만지지않고도만지는빛의터치.
_「세개의조각」부분

모든있는것의생각은열기다.
어떤것이문턱을넘어먼지가될때
먼지가문턱을넘어어떤것이되어갈때
열이난다.가장차가운것도되어가는것들의불이다.
_「부패는생각의힘이다」부분

채호기의『이상한밤』을읽는일은그러니까시를읽는다기보다,이상하고도기이한시적체험에가깝다.“지금까지열려있던바다의액체가순식간에완전한침묵의고체로닫”힌장면을박제하여선보이는것이아니라,“순수하고강렬한색상,완전하고미친듯한햇빛과빛을감싸는검청색의반복하는패턴,끊임없이변화하고진동하는색상,기하학적형태,선과기호의구성이나타나고반복하며새로운패턴으로진화”(「뱃머리」)하는언어와사고의용융운동그자체를그려내는일을그가하고있기때문.시로고정되는것을택하느니시적인것으로우글거리는,다시말해시가아닌시적인것으로살아움직이는한생명체를채호기는건넨다.

시인의앞선말대로“진짜급진주의자시인은글을쓰거나말하지않고/시가사물에접근하거나사물이/인간을읽고기록하는시적공작물을만든다”.그러므로인간이사물에접근해들어가거나사물이‘되는’고전적인의미에서의‘시’를그는쓸수없다.기성의“세련된언어감각은오히려부숴버려야”하고,구태한질서는“새로운시가나타날때그새로운시에의해부서져야”(인터뷰에서)하기에그의시는언제나낯설고기이할수밖에없을것이다.그리고앞으로도우리는그의시에절대익숙해질수없을것이다.채호기의시가,그리고시인이그것을결코허락하지않을것이기에.그리고그것이바로우리가채호기의시를읽어야만하는가장큰이유다.

독자인우리는이토록‘이상한밤’의체험―‘나’가‘나’를말하는순간‘너’가되고,시가언어로시를쓰는순간그것은몸이쓰는음악이되는기이한세계로초대된이들이다.이밤의한가운데에서우리가경험하는것은세계라는행성의생태계안에서사건적으로이어지고해체되며또다시연결되는반복적변주로서의얽힘,그일렁이는만남의우주적인감각이다.객체들의향연이끝없이펼쳐지고있는이곳은시의새로운존재론적우주다.‘나’는‘너’에게로닿기위해이제천천히,물러난다.
_전승민「해설에서」



1.어느덧10번째시집을묶습니다.이번시집을출간하는소회를간단하게부탁드리겠습니다.

→한조각한조각,그러니까한단어와한단어를잇고,한문장과다음문장을이어쓰면서하나의이미지(형태)를만들어내는데최선을다합니다.그래서한편의시가완성되고나면그것으로끝나는게아니라,그게시집의건자재가되잖아요.비유하자면영화를만들때장면을최대한찍어놓았다가마지막편집과정을통해쓰일건쓰이고버려질건버려지면서앞뒤의순서가정해지고비로소한편의영화가완성되듯이,시집도마찬가지입니다.시집을묶을때역시최선을다해때로시편을고치기도하지만,수정하는데에는한계가있습니다.애초에한조각을만들때제대로해내지못한다면맘에드는시집을만들어내지못하게되겠지요.몇번째시집인가는제게는별로특별할게없는거같습니다.늘처음시집을내는것처럼막막하고,조각조각을쓸당시에좀더잘쓸걸하고늘후회하게되니까요.

2.『이상한밤』에서는총145편의시를선보입니다.문학동네시인선중에가장볼륨이있는시집인데요.이러한구성을하시게된이유와동력에대해들어보고싶습니다.

→『이상한밤』에서는최대한많은객체를소집해야했습니다.그것들이하나의단일하고유일한개체이면서도또한시집이라는다양체로서의집합에서는제각각의다른몫의기능을해줘야했기때문입니다.저도통상한권의시집의적당량이어느정도인지는알고있습니다.그걸일부러거스를생각도없고요.하지만시집주제의특성상이렇게할수밖에없었습니다.그리고지금까지통상적으로부의특성은큰전체의시집속의작은단위의전체로기능했습니다.제가나눈부는그런것과조금다릅니다.그래서1부,2부라하지않고그냥로마자Ⅰ~Ⅹ까지숫자만으로표기한겁니다.독자의편에서읽을때145편의시가부담스러울수있겠다싶었습니다.그래서읽는이의읽는호흡을고려해서단락을나눈겁니다.

3.묵직한양감에반해시의제목속엔모음,조각,파편등을품은시편이많은데요.그래서인지이항대립(들)에서오는운동감이느껴지기도합니다.시어에서도그런경향이보이고요.여기에서오는어떤효과를의도하신바가있으실지요?

→해설을쓰신전승민선생님이아주정확하게짚어주셨던데요.제가아무리객체를잘표현하려해도그객체의전모를드러내는건애당초불가능합니다.그래서제시는그객체의한조각파편일뿐이다,뭐그런느낌을담는제목이필요하다고생각했습니다.고민중에음악의용어가그러하다는걸발견하고그걸빌려다썼습니다.suite,pezzi,pieces,fragment……등등.

4.작가님의시를읽노라면음악,미술,이론등타장르와깊이교류하고있음을느낄수있습니다.어떤때시가쓰고싶어지시는지,그리고타매체에영감을받아시를쓰실때각별히신경쓰는부분이있는지궁금합니다.

→저는시를항상경계에있다고생각합니다.시라는장르가따로있지만,시는특히음악과미술의경계에있습니다.시는음악이되려합니다.시는미술의이미지가되려합니다.시는영화적단편이되려합니다.시가침묵을지향할때도그냥텅빈없음의침묵이아니라침묵하는이미지입니다.시는시의고유의특성상그럴수밖에없습니다.어떤음악을시적이라하고,어떤그림을시적이라하고,어떤영화를시적이라하는건,그저좋다라는칭찬이아닙니다.‘시적’이라는말은아직무언가로고정되기전의,이것도저것도아닌중립의,망설이는에너지를가리키는겁니다.그에너지가정점에이르렀을때그것은하나의고정된형태(개체)가되는데,그때부터에너지는하향곡선을그리며소멸을향합니다.시는정점에이를락말락할때의바로그에너지입니다.아름다움의에너지도그와같은데,그래서뭔가말로표현할수없이아름다울때시적이라고하는겁니다.

저는음악을듣거나전시장에서미술품을관람할때표현된작품을감상하기도하지만,그보다는그렇게표현하기까지의예술가의의도와감각과상상을엿보는걸즐깁니다.그게제창작과비교되고,많은경우제창작의아이디어로옮겨지기도하기때문입니다.

5.작가님만의‘시읽기’노하우한가지를알려주세요.

→시인은언어감각이뛰어나야시를잘쓸수있다고보통말하는데,저는그렇지않다고생각합니다.시는언어충동으로씁니다.그충동은시인의충동이기도하고언어의충동이기도합니다.세련된언어감각은오히려부숴버려야합니다.언어감각은이미있는질서의것이기때문입니다.모든시는새로운질서를만들면서이세상에나타납니다.그질서는새로운시가나타날때그새로운시에의해부서져야합니다.그래서시는시의고유의특성상첨단에있을수밖에없습니다.그런까닭에첨단과잘읽히는것사이에딜레마가생깁니다.첨단은낯선거라서잘읽히지않고,시인은또한독자에게잘읽히는시를써야하기때문입니다.아마모든시인이늘이런딜레마로끙끙앓으면서시를쓸겁니다.제시가어렵다고많이들불평합니다.그분들에게저는이렇게제안하고싶습니다.시를이해하거나해석하려하지말고,시의이미지를그냥받아들이고느껴보면좋겠다고.실제시를많이접해보지않은어떤화가가시의이미지를그냥따라가며읽다보니머릿속에그림이떠오르면서잘읽힌다고하더군요.그리고이제초등학교갓입학한손자가제시를그럴듯하게읽어내는걸보며깜짝놀란적이있습니다.

녹지않는장미색기억은
길이끝나고돌이시작하는즈음에
기어코단애를세운다.

진짜급진주의자시인은
비인간이인간을읽고기록하는
시적공작물을은닉한다.

아,노래하려는순간숨는것들.

2025년11월
채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