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리 (김엄지 소설집)

위리 (김엄지 소설집)

$17.00
Description
한국 소설의 영원히 젊은 상흔,
김엄지 10년 만의 신작 소설집
201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이래 만 1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한국문학의 최전선에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독보적인 고유명으로 자리한 김엄지. 그가 10년 만에 두번째 소설집 『위리』를 펴낸다. 잦은 행갈이와 의미적 간격이 넓은 그의 문체는 전문 독자들 사이에서도 과연 소설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수반했다. 그러나 이것을 ‘시 같은 소설’로 갈음하기 어려운 이유는, 질량이 작고 여백과 휴지가 넓은 것을 단순히 시로 이름할 수 없는 바와 동일하다. 한국 소설의 실존주의 조각가로서 김엄지는 소설에 응당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나 그 근거는 아리송한 허위들을 모조리 베어내어, 자각 없이 반복되어온 믿음과 관습에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긴다. 그로부터 돋아나는 새살처럼 소설의, 그리고 인간의 영역과 가능성은 김엄지로부터 한껏 넓혀질 것이다. 고정된 본질 너머의 태도와 움직임을 조형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와 자유로의 이행을 담보할 것이기에.

y가 무섭다고 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이 집과 관련된 것들, 집안의 정적, 창가를 휙 스쳐지나가는 것, 정체를 알 수 없는 파열음. 그리고 그녀의 부모, y는 자신의 부모를 썩은 살에 비유했다. 반드시 도려내야 해. 마취 없이. 떨칠 수 없는 것들, 자기 안의 분노,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추락하기를 반복하는 꿈, 아무것도 위로하지 않는 너, y가 말한 너는, 나였다.
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y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뭐라 대꾸했던가.

말 많이 했는데 왜. 했던가.
앞으로 말 많이 할게. 했던가.
_「여름 2」에서
저자

김엄지

2010년『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을수상하며작품활동을시작했다.소설집『미래를도모하는방식가운데』,장편소설『주말,출근,산책:어두움과비』『폭죽무덤』『겨울장면』『할도』등이있다.김준성문학상을수상했다.

목차

여름
여름2
여름3
가사
변신
예지5
비오는거리
입생로랑낭떠러지
위리

작가의말

출판사 서평

김엄지의해방의언어가비대하게커진
‘좋은이야기’의진부함을도려내고있다._정용준(소설가)

『위리』의시작은“더단순하게살고싶다”(「여름」)라는문장이다.이단말마에가까운독백이촉발시킨감정과이미지가카페에서꺽꺽거리며우는스스로에대한고백까지유려하게이어질때,자신을타자처럼,타자를자신처럼여기며솜씨좋게구획을넘나드는서술이빛을발한다.김엄지는책을막펼친독자에게자신의문체와형식을단두페이지만에솜씨좋게설명해내고마는것이다.이처럼‘나’와‘너’라는이자二子간관계는김엄지에게인간됨이라는여정의시작이다.「여름2」의주인공은떠난애인의물건을하염없이바라본다.그는자신이아무것도말하지않고위로하지않는다는애인의마지막말과,그런말들로도도무지이해할수없는이별의사유를곱씹고있다.그러다가점점애인에게중요했던것들이떠오르는데,그제야가능할어떤반성은내면깊은곳에서울림의진원이된다.
하지만김엄지는그저‘반성하면된다’는식의소박한자족으로는불충분하다는진실을알고있다.이별뒤에갑작스럽게찾아온재회를그리는「여름3」은그토록기다린순간임에도머뭇거림이빈정거림으로대치되며좀처럼잘전해지지않는마음같은지극히인간적인한계를주목한다.“L의고통과나의우울이조금도다르지않고완전히같은것이라할지라도우리는확인할수없을것”이라는괴로운깨달음이인간을얼마나무자비하게찢어발기는지를역설적으로환기함으로써.

“전면유리가있던자리는깨끗하게프레임뿐이다.”

오직본질을향하는조각가의칼처럼,
허위를베어내어인간을정초하는
미니멀리즘문체의극치

나는뭔가필요하다고생각한다.가는줄을간단히끊을수있는도구.
나는내가무언가로변신해야한다고생각한다.목에감긴줄보다대단한것으로.
나는내가무엇으로도변신하지못할것을알고있다.
길바닥에누워터질것같은얼굴로버둥거리는수밖에.
_「변신」에서

그러므로변화는인간을초월할각오까지요청할지도모른다.그러나그‘변신’또한말뿐인말로는이뤄낼수없음은자명하다.다만「가사」의가사도우미화자가집주인부부의희극적인소란을바라보는노동을떨치고현관을나서듯이,현재와미래에반복되는저주같은과거를딛고새로운가능세계의삶을영위할동력은인간에게잠재되어있다는것이김엄지의전언이다.
“새로운윤리의지평을열고예지의가능세계를꿈꾸게할지도모른다”(우찬제)라는평과함께문지문학상후보작에선정되기도했던「예지5」는매일의억압적이고폭력적인업무공간에서구름을생각하며하루를버텨내는이의이야기이다.이러한분위기는사람으로하여금“잘한것과잘못한것”을반복적으로기록하게하는강박증을야기한다.하지만자신의“귀가열리는시간”을느끼는이에게는“오해는구조물이될수있다”고깨달으며올가미를멀리내던지는해방의미래가차츰열리기시작한다.

비오는거리안개속에서넘어지지않고마흔네바퀴제자리돌기에성공하면시공간을초월할수있다는속설을,B는이미실행했다고말했다.
어떻게마흔네바퀴를넘어지지않을수있어.어디를가고싶어서마흔네바퀴나돌았어?경선이B에게물었다.
어디든가고싶었지.B가대답했다.
나도돌고싶다.나도돌아봐야겠어.경선이말했다.
_「비오는거리」에서

그렇게해방을갈망하는이들은‘비오는거리’로향한다.유독비가그치지않는800미터길이의거리엔대개가까이가는것조차꺼리지만,“미칠수있다는희망”을갈구하는사람들은기꺼이걸음을내딛는다.시시때때로슬픔이차올라눈두덩이짓무르고스스로심장이말라죽을것이라고예감하는A와,이혼후에가라앉지않는분노를다스리려노력하는‘경선’은‘22세기호흡’이라는수상쩍은워크숍에서마주치고,함께걷는다.서로뺨을때리고비명과고성을주고받는,시공간을초월할수있다는믿음이횡행하는‘비오는거리’쪽으로.
그렇게믿음을구하는이들에게찾아오는것이있다.「입생로랑낭떠러지」의주인공은여자친구의생일선물로입생로랑카드지갑을구입한다.하지만만난그녀는우울감에한껏젖어있을뿐이다.서로를이해하지못하는둘사이의대화는제대로마주치지못한채한없이미끄러지는데,새벽녘에헤어져천변을걷던주인공에게갑작스레핑크빛‘목소리’가찾아온다.“지금많이간절하세요?”인간됨의막다른곳에서간절히중심을구하는이에게깃드는목소리가.

홀안은아무도없는것처럼인기척이느껴지지않는다.
바닥에즐비한유리파편이촛불빛에번쩍이고일렁인다.
유리바닥이아니라불바닥같다.
Y는여자친구에게지금보고있는광경을보여주고싶다.
날이밝을때까지이자리에앉아있는것도나쁘지않겠다고Y는생각한다.
여기로와볼래?조심히.Y는여자친구의이름을부른다.
전면유리가있던자리는깨끗하게프레임뿐이다.
_「위리」에서

소설집을닫는표제작「위리」의주인공은‘위리도’로떠나는여름휴가일정을세우며여자친구를기다리고있다.이어카페로찾아온여자친구는“헤어지기전에한번은보려고왔어”라며느닷없이이별을선언하고,두남자손님이있는카페안의분위기는차츰이상해진다.그때밖에서내리는비는우박으로바뀌고,돌풍이몰아치면서정전과함께전면유리창에굵은금이그어지는데……모든것이박살난다음에프레임만남아있는통창처럼,김엄지의소설은인간내면의자기기만적인안온함을비바람으로휩쓸어버리는파토스와새로이태어날인간을위한토포스를겸비하고있다.

걔진짜안하무인이야.모텔도무인모텔만다닐거야.A가말했다.
서른넷,서른셋형제가웃고.
무인모텔이라고알바안쓰는건아니에요.갈때마다지키고앉아있는사람을봤어요.형이라는자가말했다.
아니,그럼무인이아니잖아!A가호통치듯말했다.
그러니까결국에사람인거죠.동생이말했다.
먹이사슬맨꼭대기가사람이잖아.형이말했다.
꼭대기너무좋아하지마라.떨어지면대가리부터박는다.A가말했다.
_「여름」에서

오늘날한국문학이어떻게자신의몸을갱신해나가는지궁금한독자에게『위리』는필수교보재다.한편세상어떤이유에도관심이사라지고수시로눈물이차오르는사람,하늘을올려다보면믿음이생길지간절히궁금한사람,더이상누구에게도어떤설명도하고싶지않은소진된사람,비오는거리에서그냥모든걸다내려놓고뛰어다니고싶은사람에게도김엄지의소설은삶의동반자로곁에함께한다.이소설들은사람사는모습을닮아있기때문이다.외로울때아무맥락없이틀어놓고듣는영화속대화처럼,『위리』의문장들은카페와술집,거리의사람들을그대로본뜨고있다.그러므로미래를바꾸고싶은독자에게도,단지현재를즐겁게보내고싶은독자에게도『위리』는꼭맞춤한친구가된다.이처럼김엄지의소설은문학을위한문학이아니라,오직인간을위한문학으로서스스로를현재진행형으로치열하게갱신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