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 문학동네 시인선 215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 문학동네 시인선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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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칠흑에서 초록의 여름이 갈려 나올 때
내줄 수 있을 때까지 내주자고
가둘 수 없이 번져보자고”

무심히 흘러가는 삶의 방향으로 관조의 시선을 기울일 때
삶과 죽음 그 사이 여백에 번지는 그윽한 한 획
저자

유종인

저자:유종인
1996년『문예중앙』신인상에시,2003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시조,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미술평론이당선되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으로『아껴먹는슬픔』『교우록』『수수밭전별기』『사랑이라는재촉들』『양철지붕을사야겠다』『숲시집』『숲선생』이있다.지훈문학상,김만중문학상등을수상했다.

목차


1부이번여름은빗소리가,자주붓을들었다
고건축/노각/이끼반야(般若)/신문/죽을좀저으라기에/여름의낙관/만년필/염주와묵주/열무/네덜란드의햇빛/그러니까만세/원(圓)/능사(能事)/저봄비/마를다듬다

2부무감각에서사랑의살결을꺼내보자는당신,
계곡물/가을무릎―회고/전자레인지/폭설과동파육(東坡肉)/불멸의시집/부추전/옥토끼와옴두꺼비와나―8월31일/가시와놀다/수묵(水墨)/근처새―곤줄박이/저녁의물음/당(黨)/아프리카바지/무감각/언덕

3부허물을모으고포개놓으니꽃과같다
철가방형/조무래기들/고사리/입장문/텅빈기도/습득(拾得)/시방나는/코사지/장인/무극(無極)/골동―나[我]/먼동/전대미문/역광/사월

4부그대라는말도수국으로시들었으니
가을무릎―여음(餘音)/달빛의추임새/점괘/생색/맨발로지구를/풀밭에서/엘리베이터/땀과눈물/무인점(無人店)/초가을이부자리/개를만진손으로/잉어/괴석과호박말랭이/들판에서/식물의손길

발문_필멸의경계에서다
최형심(시인)

출판사 서평

잠시라도죽을젓는게늦으면
활화산분화구에
분을삭이지못한용암처럼
죽방울이금방튀어오르기에
느리지도빠르지도않게
슬그머니끼어든듯죽을젓는다
처음엔노를젓듯젓다가
다음엔독필(禿筆)의나무주걱으로
언제적당신이름을썼다가지우고
진시황이먹었다는저잣거리의음식이름
사전에도없는획수무진장한한자도
더듬더듬그리듯쓰며젓다가
엊그제밤소낙비에꽃대가꺾인노란겹삼잎국화도
그이름잊힐까한번야채죽속에
부러진꽃대일으켜세우듯써본다
가서몇해쯤능놀고싶은섬의이름도
옛이름으로써보는데죽방울이
그런거보다더그럴싸한이름없느냐
내손등에죽방울침을놓으며
그럴듯한연애를쓰라는데
나는조금당황하여묵혀둔술이름도써본다
역시술은초서로써야제맛이지
그런내가죽을쑤는지
술을푸는지모르는등뒤에서
타지않게살살놀지말고저으란다
_「죽을좀저으라기에」부분

시인의눈을거치면평범한삶에서도고즈넉하고넉넉한운치가느껴진다.시인은가족을위해죽을젓고있다.“느리지도빠르지도않게”죽을저으며시인은주걱으로죽을젓는일이마치“노를젓”는것같다고생각하다가,주걱이붓이라도되는양죽속에“당신이름”을적어보기도하고“엊그제밤소낙비에꽃대가꺾인노란겹삼잎국화”의이름도적어본다.죽이끓어오르며방울이튀어오르자시인은그것을“더그럴싸한이름”을적으라는꾸지람으로받아들이기도한다.이렇듯시인은눈앞에놓인죽너머,죽을먹으며꾸려가는삶전체를조망한다.이런그의태도는생활인유종인과시인유종인이떼려야뗄수없는관계임을,시인의삶과시가긴밀히연결되어있음을보여준다.시인은“고장난전기밥솥을보자기에싸들고서있”(「네덜란드의햇빛」)다가사거리아스팔트에반사된햇빛에서“네덜란드의햇빛”을읽어내는사람이며,“아내가며칠멀리간다고”(「옥토끼와옴두꺼비와나」)끓여놓은곰탕을먹으면서도“옥토끼와옴두꺼비”의방문을떠올리는사람이다.마치눈앞에놓인심상한정경에서도시를읽어내는것이바로시인의삶이라고말하는것처럼.
한편시인은‘이끼’와‘조무래기’,‘노각’과같은소외된존재들을지긋이바라본다.미미한존재감을지닌이끼와모래알처럼흩어지는속성을가진조무래기,그리고한해살이식물인노각을애정을갖고들여다봄으로써그것들이지닌고유의아름다움을발견해낸다.사람들의무관심속에서점차쌓인“돈독한먼지들”(「골동―나[我]」)을“씻겨주는”(「계곡물」)것이다.유종인의시에서유독순우리말이눈에띄는것도대상을향한시인의이러한애틋한태도와무관하지않을것이다.시인은사람들의시야밖으로밀려난순우리말들을“보듬고쓰다듬고끌어안”(「고건축」)으며그를향한“다솜”(「들판에서」)의마음을여과없이보여준다.

아,아무래도우리는조무래기들
어떤위대함을혁명을지구에틔워도
우주의촌구석에윤똑똑이로살다지쳐가는우리는조무래기들,
그러고도남은말은미친누이가파헤친
어머니당신가을무덤에바쳐야지
쓸쓸함과위안의낮달,아버지의부처님귀에달라붙던여치들,
지구땅별에티끌보다작은시의귀걸이를다는
나는섬을옹립한시인그대때문에사랑때문에
마음에불이들어오고나가는조무래기,
사랑은,나의변방에사는말더듬이귀가먼애인
나의우주말석변두리외주물집옆에
다리가셋인황고라말과버드나무를세우고
두꺼비손을잡고파초그늘에쟁반만한연못을파는누인(累人),
사방다솜의공깃돌을매만져허공에올려주는
아무래도누대에걸친시의이끼를번져보려는
나는다솜의조무래기
_「조무래기들」부분

그렇다면시인이란어떤존재이냐는물음에이렇게대답할수있을것이다.시인은“내내굴비처럼생활의곡절을엮고돌부리처럼시를캐”(「장인」)내며작은존재들의목소리에끊임없이귀기울이고,언어의가치를재발견하는사람이라고말이다.그러나동시에시인은시를쓰고있음에도불구하고“무얼하느냐”(같은시)는질문을받는사람이기도하다.하지만유종인은이런질문에쉽게흔들리거나시의쓸모에대해고민하지않는다.대신그는자신의“생활은새똥이묻은교회십자가옆허공에/빈펜촉을들어/필사(筆寫)의부리로끄적이는일”(「만년필」)이라고묵묵하게말하며오히려모든것들에가치를매기고평가하는자본주의사회를향해날카로운질문을던진다.시인은“천만장자의롤스로이스”와“짝퉁핸드백”,“채권추심대행현수막”이즐비한자본주의사회의풍경을시로그려내며“정신에공황과섬망과불안을가구처럼들여놓고”사는현대인들에게되레“영혼의깊이”(「조무래기들」)에대해묻는다.그러면서“우주”의관점에선우리모두가“윤똑똑이로살다지쳐가는”“조무래기들”(같은시)일뿐이라고말한다.그런시인을보고있자면“손가락에생긴펜혹”(「만년필」)만큼이나단단하고굳건한,시를향한시인의진중하고흔들림없는태도가느껴진다.
깨끗한화선지에한폭의수묵화를그리듯,시인은차분하고조심스럽게여백위에시어들을흘려놓는다.그는결코시어들로여백을빽빽하게채우지않고빈공간을남겨둠으로써시어의그윽한향을더욱배가시킨다.“한낮풀벌레소리가/쏟아지는햇빛”(「가을무릎―회고」)속에서,“비거스렁이”를쐬기위해들른“소낙비그친숲”(「계곡물」)에서,“좁은책상머리”(「옥토끼와옴두꺼비와나」)에서,즉삶의모든순간에그는시를쓴다.일상과시를분리하지않고시속에서살아가는시인은‘만년필의펜촉’처럼단단한시세계를통해역설적으로“고양이새끼처럼”(「고사리」)부드러운시를빚어낸다.날카로운시선을던지다가도어느순간한없이부드럽게흘러가는유종인의시는“끝이말랑말랑한봄날연둣빛찔레가시”(「원(圓)」)를닮아독자의마음을슬그머니쓰다듬는다.유종인의시에깃든“말라가는뿌리를감싸”(「이끼반야(般若)」)주는다정함과시어들에서풍겨나오는“심심하고담담한내음”이이땅의모든“미물”(「조무래기들」)들에게전에느끼지못한깊고아늑한위로와평안을선사할것이다.

감추면으늑해지지
문득,가난마저활짝털어
흰옷빨래처럼바지랑대높이걸고
한번바람을쐬면,
문득내다볼들판도없이
내옆구리에광야를팔짱끼는것

나여,
어제는나무젓가락이나벌렸지만
오늘은
모종의번민을장작처럼쪼개보자

늘가던길에서갈라져
더가보는호기심의행보,
드디어는한번더갈라지는길
나는분열하는즐거움,

편애하자
가벼워지자
길이갈라지는건
이세상에더깊이뿌리박고싶은
그윽한악착

모종의일몰,
슬픔의독차지,
낯선길에서스님같은개와같이바라는노을,
언제나나의능사는번뇌,
꽃이시들자
드디어얼굴로가슴으로
들이는모종의꽃,

언제나
사랑이라는미완의능사
_「능사(能事)」전문

언어가세상과동떨어져존재할수없듯이문학도세상과동떨어져존재할수없습니다.예술가,그중에서도특히시인은많은평범한사람들의남루하고지루한삶의풍경속에서도“인간의어떤위대함을폭죽처럼떠올”릴수있어야합니다.그는진흙탕속에서구원을만날수있는,시들어가는작은들꽃에서우주를느낄수있는,세상의모든혼돈과모순속에서도온몸으로신화를살아낼수있는존재여야합니다.거기에더해,이모든비현실적이고초월적인지향점의시작은현실이어야합니다.즉,시인은세속과더불어괴로워하고,세속과더불어구원을꿈꿀수있어야합니다.(…)그에게있어시를쓴다는것은세속의현실에깊이몸을담그는것과같은의미인듯합니다.물질적욕망속에갇힌삶의공허함을매순간온몸으로마주하면서말입니다.
_최형심,발문에서

유종인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이번시집은『숲선생』이후2년만에출간한여덟번째시집이지요?작년에는시조집도출간하셨으니거의일년에한권씩출간하고계시네요.이번시집을출간하는마음은어떠신지궁금합니다.

시는제게일상의호흡과도같습니다.시가쓰여질때나시가쓰여지지않을때도시는저의안과밖이며빛과그늘이기도합니다.이번시집은그런제시의여정에있어서하나의자연스런변곡점에있는듯합니다.이런저런우여곡절이있었으나그걸달게받아들이는수렴의서정인듯도합니다.툭트이는것보다는서서히트여가는모종의눈뜸의호젓함이있기도하고또가만한설렘이있기도합니다.내외적으로주어지는변화에감사함이있습니다.

Q2.제목‘그대를바라는일이언덕이되었다’는수록작「언덕」의한구절이지요.‘언덕’이자연물의이미지인터라왠지호젓한느낌이들기도하고,‘그대를바라는일’이라는구절에서는조금낭만적인분위기도느껴지는데요,제목에대해설명해주신다면요.

산과다르게언덕은일상과자연을연결해주는그윽한완충지역같다는느낌을가져왔습니다.근원적인그리움에대해생각할때언덕은그등을보여주는고래와도같습니다.우리가잃어버려가고있거나잊고있는것,그럼에도조망하듯떠올리는가만한간절함같은것을연대해주는시공간이언덕으로여겨지기도했습니다.성취와소유만이대세를이루는세간에동경의뉘앙스를열어보고싶었는지도모릅니다.그윽이바라는바를향해나아가는이를위해마음의어깨와등을보여주고기대주는것이언덕인지도모릅니다.

Q3.시,시조,미술평론을넘나들며활발한활동을하고계신데선생님께서생각하시는시만의매력은무엇일까요?시를집필하실때특별히신경쓰는게있으신지도궁금합니다.

시는제게원천이자가난이고동경이자소우주이며생활의낙락하고웅숭깊은동무입니다.미술평론은동서양을가리지는않지만동양화가가지는여백과깊이,마음의여유와자유를찾아가는애호에서너나들이하는또하나의고전과도같습니다.시가그림과멀지않듯이그림이주는영감또한새뜻하고그윽합니다.모든영향과영감과생각을주고받는마음그릇으로서의시는,‘쓸모없음의쓸모’처럼우리를위로의심연으로이끄는데가있습니다.구원의소박한일상이위로가아닐까싶은데시는여기에손을내어줍니다.이런시가내게도손을,아니손그늘이라도내어줄때의느낌과서슬을귀히여깁니다.시를쓸때는이런시의손길과기척을잘알아들을수있도록스스로명징하고고요해지도록노력하는편입니다.

Q4.선생님의시를읽다보면서정적인분위기를배가시켜주는고즈넉한시어들이눈에띕니다.시어를길어올리는선생님만의기준이따로있으실지궁금해요.

순우리말의가치가상대적으로소홀해지는것같아안타깝게여기는편입니다.다른우리말도그렇지만순우리말이가지는미감을가급적잘끌어와쓰려고하고그소슬한분위기에마음의곁을내주려고하는편입니다.시인의말은옛것과오늘날의것이따로없습니다.마음을얹고소통하는순간모든언어는시속에서현재화되고미래로나아간다고봅니다.마음의상태가기대고스미고돌올해질수있는순간의말들이란어느것이든귀하고고마운동행인듯싶습니다.

Q5.마지막으로,『그대를바라는일이언덕이되었다』를읽을독자들에게인사를건네주세요.

미지의독자는영원한독자라고생각합니다.그윽한동경과도같이‘바라는일’이늘선하게자신을이끌어갈수있는여백과가만한울림이있다면그삶은기쁘다고여깁니다.바라고바라는바가힘든욕망이아니라자신을열어가는일이며일상의깨우침의작은숨쉬기라면어떻겠습니까.제시가그런쪽으로작은언덕의눈길이고인사였으면합니다.저보다늘앞서생의기쁨과나눔을내다보고있는여러분들이이미다솜의인류라고생각합니다.늘푸르른동경의손목을놓지않기바랍니다.

시인의말

기꺼이초록으로말하려하네
다솜이멀지만가까이번져가자고

그리운모든것들내그윽한측근이되어가자고

2024년6월일산에서
유종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