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실로도 어둠을 짤 수 있지

털실로도 어둠을 짤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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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어느 날은 어둡도록 커튼을 치지 않고 두어볼까
불행이라는 배역을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는 나를 보여주어야지”

차가운 어둠에서 자아낸 부드러운 털실로
거짓 없이 보여주는 가장 정확한 삶의 민낯

조혜은의 너덜너덜한 사랑 삼부작 완결편
저자

조혜은

저자:조혜은
2008년『현대시』를통해작품활동을시작했다.시집『구두코』『신부수첩』『눈내리는체육관』이있다.

목차

1부여름불청객
이면지―사실/이면지―소문/여름불청객/목줄이긴개/외삼촌/수족관얼굴/방과후학교/줄무늬/난센스/바다식탁―155*73*74/양파

2부벽에발을붙이고담배를태우는환한저녁
앞머리―눈내리는체육관/개도(開度)―굳은살엄마/플루트교실2/감자/박리(剝離)―선영에게/주말연습/실종/손차양―도시여행/여름공원/짬뽕/지옥―도시여행

3부당신은나의얼굴을보았잖아요
자취/물감연습/자취―도시여행/자취―도서관/자취―초록/이사―영통1동의밤/가정폭력상담소―이사/책갈피/허기/이사―피아노콩쿠르/설리(雪裏)―눈내리는체육관

4부사랑하기위한연습이끝났지만사랑은오지않았고
자전거연습/리허설/공중―14층/눈내리는체육관―둘의풍경/넷의풍경/휴양지에서―경고문/산수유/선약/역할놀이/거실―3625/헤엄/양파2/낙조

해설_내가가장(순수하게)불행했을때
박혜진(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진단이아닌선고를듣는부모의심정으로
나는사랑이지겨워
내게서사랑을가져가려는
내게서사랑을찾으려는당신도

나는사랑이너무지겨워서,내게사랑한다고말하는사람이있으면
달아나고싶었다
갖은온건한이유로수조에갇힌눈먼송어와몸을바꿨다
하나를인정하면다른하나를묵살하게되는투명한집에서
사람들은아직도서로가그렇게소중할까
스스로가자랑스럽고
망치로부수고죽이고때리고
_「수족관얼굴」부분

조혜은의이번시집에서가장두드러지는심상은불행이다.일반적으로불행은부정적인감정으로여겨지지만,조혜은의이번시집에서는조금다르다.시인은불행을“안락하고잘아는”(「공중―14층」)것이라칭하며불행이일상에깃들어있음을이야기한다.“모두의삶”은“구체적으로불행”(「감자」)하지만불행을받아들이는방식은저마다다르다.“불행이라는배역을훌륭히소화해내고있는나를보여주어야지”(「자취─도시여행」)라는구절에서짐작할수있듯,조혜은은불행을꺼리지않으며오히려적극적으로그것을받아들이고삶속에녹여낸다.불행을주체적으로인식하는조혜은의태도는“털실로도어둠을짤수있지”(「공중―14층」)라는구절에서한층명확하게드러난다.시인은삶을따뜻하게덥혀줄수있는털실로어둠을짜낸다.손에잡히는털실의형태로불행을감각할뿐만아니라불행이자신의삶을뒤흔들지않도록스스로불행의모양을직조해나가는것이다.
조혜은은불행에대한질문을그치지않는다.불행이어디에서왔는지를짚어가던시인은뜻밖에‘사랑’이라는단어에다다른다.사랑은긍정적인인상을주는단어이다.하지만조혜은의시에서“사랑은/볶음밥위에케첩으로그린하트같은것이어서/언제무너질”(「외삼촌」)지알수없는연약한것이며“나를갈가리찢어놓”(「양파」)는,파괴에이르게하는감정이다.시인이사랑을이토록부정적으로인식하게된이유는무엇일까.그건시인이사랑의이름으로자행되는폭력이얼마나잔인한지알고있기때문이다.시적화자가각별하게강조하는것은가정내에서이루어지는폭력이다.엄마는화자를“사랑해본적도없으면서”(「이사―피아노콩쿠르」)모욕하고,남편은“노력이부족하다”(「가정폭력상담소―이사」)고화자를힐난한다.그리고이모든폭력은가정의울타리안에서이루어지기에“당신이내게한잘못이명백하지않다”(「넷의풍경」)는이유로그아픔을인정받지못한다.화자는사랑의이름아래행사되는폭력을겪어내며“나는사랑이너무지겨워서,내게사랑한다고말하는사람이있으면/달아나고싶었다”(「수족관얼굴」)고말한다.차라리“사랑하지않는도시의밤”(「가정폭력상담소―이사」)에서살아가기를원한다.

엄마는네편이야
나는내아이에게영하의겨울아침집을나서기전지퍼를단단히올리고단추를꼭꼭채워옷을여며주며다짐하고또잊지못하게일러주었지만
어떤일이있어도목숨이떨어져나간뒤에도엄마는네편이야
숨겨둔보물처럼엄마를가장사랑한다고말하는아이에게
나의사랑은그렇게까지비장해도되는걸까
_「헤엄」부분

하지만시인이궁극적으로거부하는것은사랑에깃든폭력이지사랑그자체는아니다.그렇기에조혜은시의화자는계속해서누군가를사랑하기를포기하지않는다.그렇다면화자가새로이사랑하는대상은누구일까.화자는“이제막태어난사람”(「여름공원」),바로아이들을사랑하기시작한다.이시집에등장하는아이는화자가“과거에함몰되지않기위해”(「개도(開度)―굳은살엄마」)필요한존재이자,언제나“네편이야”라고말할수있는존재이다.아이러니하게도화자는또다른가족과의관계를통해사랑에대한믿음을회복하고있는것이다.화자는아이에게진심을다해사랑한다고말하면서도,사랑이라는말이갖는무게를잊지않는다.화자는아이가적어둔“엄마사랑해요”라는말을보고사랑이“얼마나무거운말인지”(「넷의풍경」)를곱씹으면서사랑에대해신중한태도를보인다.
시인은“나는나를사랑하는법을몰랐다”고고백하면서이제는“아이를사랑할때처럼아이가되어야지”(「낙조」)라고이야기한다.이시구를새롭게풀어말하면시인은이제스스로를사랑하는법을알고있으며,사랑을받아들일줄도,사랑을베풀줄도알게되었다는의미인것이다.자신이받은상처와는무관하게누군가에게한없는사랑을베풀수있는건자신이받은상처를온전히수용했기때문이다.그렇다면이시집은불행을받아들여사랑을베푸는과정을세세하게기록한감정의기술지라고할수있지않을까.조혜은이섬세하게적어내려간감정의기술지를읽으면서우리는불행과상처를받아들이는태도를배운다.그리고우리가각자의어둠을포근하게끌어안는다면,사랑에대한믿음을이어나갈수도있을것이다.

금선(琴線).하늘에비친얼굴을바다에띄우고.수천개의가파른계단을올라.종아리를버리고고통을주고고통을사해주겠다고약속해야지.하지만고통은살아있는동안떠나지않고.바다를닮은이와눈을뜰수없을것같은태양빛을뒤로한채갯벌위에내려앉은눈을밟았다.천천히눈속에바닷물이차오르고.서로의얼굴을비춰보며.그대로조명이된두사람.사랑해야지.내가
_「낙조」부분

조혜은의시를읽는나는언제나그어둠의오랜구경꾼이었다.조용한싸움을홀로치르고있는한인간의관객이었다.그의네번째시집을읽는마음은많이다르다.『털실로도어둠을짤수있지』는나를더이상구경꾼도관객도아니게한다.조혜은의이번시집이구경꾼이나관객에머물러서는이후의삶을살아갈수없다는것을가르쳐주기때문일테고,사랑의진실은“칠이벗겨진목조의자”나“버려진유원지”를바라보는시선에서비롯된다는걸이야기하기때문일것이다.나는내불행의주인이되어오직나만의싸움을시작해보고싶다.감춰진상처를찾아나서는탐조등이었던조혜은은이제우리인생의페이스메이커가된것같다.어떤시인에게그것은시인의일이아닐것이다.그러나조혜은에게그것은시인의일이고,이일에있어조혜은은탁월한장인처럼카리스마가있다.
_박혜진,해설에서

조혜은시인과의미니인터뷰

Q1.세번째시집『눈내리는체육관』을출간한이후삼년이흘렀어요.『털실로도어둠을짤수있지』를어떤마음으로준비하셨는지궁금합니다.

두번째시집인『신부수첩』이출간되고『눈내리는체육관』이출간되기까지육년이라는시간이걸렸기때문에,너무늦지않게다음시집으로독자분들을만나뵙고싶다는생각이간절했습니다.두번째와세번째시집에서가정이라는친숙한공간에서발생하는‘사랑의폭력성’과그속에서오염된관계를견뎌내려는누군가의‘너덜너덜한일상’을현미경으로들여다보듯세밀하게보여주고싶었다면,『털실로도어둠을짤수있지』에서는그간펼쳐놓았던‘사랑’과‘폭력’이라는양가적관계의서사를제나름대로완결하고싶다는욕망이컸습니다.다른사람도아닌,사랑하는사람에게조차사람은왜그토록폭력적인가.폭력에오염된관계가사랑으로회복될수있을까.물론제게사랑은여전히아름다운일이아닙니다만,사람을사랑하는게너무고단하고고통스럽지만,아직은사랑이없는사람의삶을상상하는게더어려운것같아서알쏭달쏭한제마음을꾹꾹눌러담아썼습니다.조혜은의너덜너덜한사랑삼부작의완결편이라생각하고읽어주세요.(웃음)

Q2.시집의제목에‘털실’이들어가요.시인님은평소에뜨개질을즐겨하시는지요?즐기신다면뜨개질과시의비슷한점이있다고생각하시는지도궁금합니다.

지금은아니지만이십대시절에는겨울이올무렵이면뜨개질을즐겨했습니다.밤에깨어있는걸좋아해서주말이면<멘탈리스트>나<수퍼내추럴>같은미드를보며밤새목도리나장갑을떴는데계속해서손을움직이니잠도오지않았고,영상도보고목도리도얻는다는게어쩐지일석이조같이느껴졌어요.생각을촘촘히직조해문장을만드는일을시의작업이라고한다면이역시뜨개질과닮았을까요.사람의깍지낀손이뜨개질로만든무늬와닮았다고생각했어요.「양파」라는시에“오늘은내살로뜨개질을해볼까”라는구절을썼어요.첫시집『구두코』에는「스웨터의여왕」이라는시가있는데봉사기관에서입양을기다리는아기들을돌보는이모들에대해쓴시였어요.두편의시에서‘뜨개질’을하려는엄마와뜨개질로만들어진‘스웨터’를입은이모는모두지극한사랑의주체이자이사랑으로인해괴로워하는존재입니다.제게뜨개질은시의작업뿐만아니라제가생각하는시인의자세와도닮아있어요.사랑하고괴로워하는당신과함께견디는것.내손을끊어당신의손에끼워주는것이요.

Q3.제목에반복해서등장하는단어들이눈에띕니다.‘눈내리는체육관’‘도시여행’‘자취’등특정한시어를여러시에반복해서사용하시는이유가궁금해요.

하고싶은말이끝나지않아서입니다.‘눈내리는체육관’이라는공간,‘도시여행’이라는행위,‘자취’가만들어낼수있는형태에대해계속해서할말이생기기때문입니다.반복해사유하는것이제가천착하고싶은삶의의문들을풀어내는방법이기도하고요.첫시집의‘은폐’와‘손’을시작으로이번시집의‘자취’에이르기까지반복되는의문들은앞으로도계속확장해가져갈생각입니다.반복되는시어를읽으며독자여러분들도저와함께자신의생각을보태어가면좋겠습니다.

Q4.시에‘엄마’로보이는인물들이많이등장합니다.하지만시인님의시에등장하는엄마는보편적인엄마의이미지와는상당히다른느낌을주는것같아요.엄마라는존재의다양한면을보여주고싶으셨던것인지궁금합니다.

‘보편적’이라는단어는엄마앞에만붙으면유독‘이상적’이라는뜻으로다가오는것같습니다.주로가족에대한희생과무조건적인사랑을전제로한‘보편적’엄마라는것은‘보편적’딸이나아들,아빠라는말보다사회에서더쉽게통용되며엄마의역할에대한촘촘한가이드라인을형성해개인을억압한다고생각합니다.여기서‘보편’은개별적엄마들의총합이아닌,‘나’라는개인을지우고집단을이상화하는방식으로이뤄진건아닐까,라는의문을가지고있습니다.보편적엄마가나쁘다는말이아닙니다.문제는다양성과과정입니다.그런엄마들만이아니라이런엄마들도있다는것,그런결과를지향하더라도모두다른자기만의과정을가질수있다는것,행복하지만고통스러울수있다는것,좋은엄마가아니라고나쁜엄마가되는건아니라는것.엄마들의다양한목소리와감정을지우지말라는호소입니다.

Q5.『털실로도어둠을짤수있지』와함께여름을맞이할독자분들에게인사한말씀부탁드려요.

책한권을읽는사이에누군가의일상은아무렇지않게흘러갑니다.이번시집을쓰는동안저는늘최악을상상했고,누군가홀로머물고있을불행의자리를더오래지켜보았습니다.최악의생각뒤에찾아오는것은늘최악이아니었고,제게는지켜주고싶은불행이늘어났습니다.시집을낼때마다최선을다하지못한것같아서부끄럽지만,제가짠어둠을읽으며독자여러분의여름은무사하길바랍니다.

시인의말

그런밤이면당신이나를만져도부서지지않을것같았습니다

2025년6월
조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