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결정, 세 개의 이름, 세 가지 삶
하나의 씨앗에서 뻗어나가는 무수한 가능성의 이야기
이야기는 ‘코라’가 아홉 살짜리 딸 ‘마이아’와 함께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등록하기 위해 호적 등기소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은 가문 대대로 남자아이에게 물려주는 이름인 ‘고든’으로 짓기를 원하지만, 코라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의 그림자를 좇느라 자기만의 삶을 살지 못할까봐서다. 하지만 다른 이름을 지었다가는 남편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두렵기만 하다.
고심 끝에 코라는 출생신고서에 이름을 적고, 그 순간 아이의 삶은 세 갈래로 나뉜다. 딸 마이아가 고른 ‘베어’, 코라가 고심해서 지은 ‘줄리언’, 남편과 똑같은 ‘고든’이라는 이름에 따라 아이와 가족들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베어, ‘천상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줄리언, 아버지의 삶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고든은 각자의 이름에 걸맞은 선택을 내리며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1987년부터 2022년까지 35년에 걸쳐 펼쳐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코라의 눈앞에서 글자가 형태를 갖춘다. 출생신고 담당자의 펜촉이 종이를 가로지르며 글자 하나하나가 범상찮은 마력의 존재처럼 나타난다. 베어 앳킨. 베어. 고작 네 글자, B-E-A-R. 그러나 각각이 의미를 잔뜩 머금은 듯, 이제 더는 단순한 자음과 모음이 아닌 듯 느껴진다. 어마어마하게 솟구치는-이게 도대체 뭐지?-기쁨, 그래, 그거다, 기쁨-이 코라의 온 존재를 휘감는다. _21쪽, 「1987년」 ,베어
그뒤에, 뭐에 홀려 그랬는지는 코라도 모른다. 그냥 말했고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밖엔. 지금, 유아차에 누운 이 아기-줄리언, 천상의 아버지, 하늘에 사는 초월적인 존재-를 보는 코라는 수년의 세월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땅에 뿌리내린 기분이다. 두 발을 단단히 심은 채, 아이들의 삶을 매단 연실 두 줄을 안전히 쥐고 있는 것만 같다. _33쪽, 「1987년」, 줄리언
호적 등기소에서 돌아오는 길, 먹구름이라도 내려앉은 듯하다. 아기를 내려다보는 코라는 자신이 뭔가를 망가뜨린 것만 같은 심정이다. 불과 한 시간 전 이 길을 거슬러 걷던 때 아기의 조그만 형상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더럽혀졌다. 아까는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뺨과 푸른 실핏줄이 비치는 여린 눈꺼풀만 보이던 얼굴에서 이제는 불그죽죽한 턱과 근엄한 심판자라도 되는 양 맞다문 입술이 보인다. 그녀는 고든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출생신고 담당자에게 뭔가 다른 이름을 말할 수도 있었다. 줄리언. 더하게는 베어도.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_46쪽, 「1987년」, 고든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가는 의지다
코라가 호적 등기소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남편 고든은 ‘베어’와 ‘줄리언’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때 엄청난 분노를 터뜨린다. 결혼 전엔 한없이 다정했으나 결혼 후 태도가 돌변한 남편은 코라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때로는 손찌검까지 하는데, 아내가 마음대로 출생신고를 하자 또다시 폭력을 휘두른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면서 이들의 세계는 갈라지고 제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그러나 운명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코라를 돕는 학부모 친구 메흐리, 코라의 어머니 실바, 실바의 반려자 키언은 세 가지 삶에서 조금씩 다른 역할을 맡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이들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누나 마이아는 아버지로 인해 생긴 불안과 자신의 성 정체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그만두지 않는다. 베어/줄리언/고든은 이름에 따라 성격도, 직업도, 배우자도 전부 다른 삶을 살아가지만, 자기만의 인생을 찾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한결같이 확고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불행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삶다운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코라의 의지가 이들을 구원으로 이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자신의 이름을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 『이름들』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듯, 이름에 주어진 운명과 역사를 극복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가 곧 자기 자신이며, 인생의 대부분은 환경에 의해 변화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결국 『이름들』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이다.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과 역사마저 거슬러 자신과 화해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들이다. 그렇게 직조된 각각의 생 앞에서 이름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을까. 사실 이름은 우리가 스스로의 존재를 미처 알기도 전에 주어지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결정된다. 어쩌면 이름은 타인이 우리에게 내리는 최초의 정의일 테지만, 그 정의만으로는 누구의 생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름들』이 조명하는 것은 이름의 힘보다도, 그 이름 하나로는 결코 환원되지 않는 인간사의 복잡성이다. 스스로의 삶을 빚는 인간의 의지다. 이름은 한 사람의 삶을 여는 최초의 말이되, 그 전부를 아우르는 최후의 말은 될 수 없다. 이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이유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