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람이함께하는사계절은특별히아름답지않았으나
철마다나오는과일만은좋았다.”
숨쉴틈없이돌아가는일상속에서도
분홍빛으로빛나는순간들이있다
서고운소설세계의출발점인「숨은그림찾기」에는현실과환상이교차하는순간과더불어사는일에대한고찰이담겨있다.친구인순지와신혜는함께살고있다.아직대학을졸업하지못한순지는베이비시터아르바이트를하고,신혜는티브이프로그램작가로일하다가현재는퇴사한상태이다.소설은순지가갑작스레잠시맡게된지아라는아이를집으로데려와돌보며시작된다.신혜가외출한사이,순지는지아와단둘이시간을보내게된다.처음엔평범한아이로보이던지아가순지와신혜가집안에서잃어버린물건들이“분홍색으로보”(23쪽)인다는알쏭달쏭한말을하며소설에독특한생기가생겨난다.지아는침대를조립하고잃어버린스패너,어느새사라져버린신혜의무지개색스웨터같은물건들을단박에찾아낸다.지아의능력에신기해하는것도잠시,지아는햇빛이네모모양으로비쳐드는벽을손으로가리킨다.“저기도분홍색이에요.”(24쪽)벽속에순지와신혜가잃어버린무언가가들어있다는걸까.순지는자신이찾는것이무엇인지,무엇을잃어버렸는지고민하지만알수없다.순지와신혜에게중요한것은“제대로된현관문이있고모기가없는집”(22쪽),금방해결할수있을것처럼보이는“시시콜콜한문제”(31쪽)같은평범하고일상적인것뿐이다.과연그벽안에는무엇이들어있을까.
「복숭아심기」에서도서고운특유의환상성이빛을발한다.「복숭아심기」속자매금정과은정의집안에는,대대로여자들이‘사랑하는사람의사랑하는사람’을귀신으로볼수있는능력이내려온다.어느날부터금정은방한구석에서희끄무레한무언가가춤을추는듯한환영을보게된다.금정과은정은이귀신이누구인지알아내기위해집안의어른인할머니와엄마에게도움을청한다.할머니는우리집안의대는“상실과기억”(164쪽)으로이어진다는의미심장한말을하며자매를선산으로데려간다.선산에가면금정이보는귀신의정체를알수있을까?과연금정이사랑하는사람은누구이며,그사람이사랑하는사람은또누구일까?이처럼「복숭아심기」는무섭다기보다그리운얼굴을하고있을귀신의정체를실마리처럼남기며서사속으로우리를이끈다.
「숨은그림찾기」의순지와신혜가친구관계이고,「복숭아심기」의금정과은정이자매사이라면,「위드걸스」속인혜와선주는연인관계이다.인혜는선주와함께임시보호하던유기견을정식입양하려고한다.가족관계를묻는입양신청서속질문에인혜는사실혼관계임을밝히지만,선주는신청서를제출하기전둘의관계를친구사이라고고쳐적는다.그로인해둘의입양계획은“친구끼리사는집에는보내지않는게”(59쪽)원칙이라는입양단체의말에가로막히고만다.왜입양신청서를고쳐썼느냐는인혜의질문에선주는“살다보면,그냥견디면서살수밖에없는것도있”(61쪽)다는대답을한다.한편탐사보도프로그램방송의계약직보조작가로일하는인혜는재계약이다가오자초조한마음에제보자를직접만나기로한다.인혜는“빠위드걸스”(43쪽)에서일어난화재참사에대해취재하지만,“이땅엔이런일이너무나많기때문에”(50쪽)이사건이화제성을갖기는어려울거라고여긴다.인혜는“사력을다해사랑을하고서로를구원하고자하는고군분투가어떤경계앞에서는너무나쉽게흐려지”(65쪽)고만다는생각을한다.“견디면서살수밖에없”(61쪽)다는선주의말을떠올리게하는대목이다.선주는인혜를사랑하는만큼,그관계를보호하고싶었기에입양신청서를고쳐쓸수밖에없었을것이다.인혜는화제성이중시되는방송세계의문턱에막혀위드걸스화재참사를방송으로다루지못했다.현실의벽에가로막힌이러한상황에서이들이할수있는일이란쉽게좌절하지않는일,그리고자신에게중요한것이무엇인지끝없이곱씹고기억하는일이다.
기억하는일에대해생각하는사람은더있다.바로「내일의날씨」의수미와「월요휴무」의희지이다.수미는기후재난으로세상의많은동물이멸종하고,인간이살아가기녹록지않은환경으로변해가던시기,그심각성을알리기위해데모를했다.수미가한데모는사실상지구상에서사라진생물들을기억하는,“상실을기억하”(228쪽)기위한움직임인셈이었다.「월요휴무」의희지는자신과엄마가삶을이어나가기위해잃어버려야했던것들,이를테면노동투쟁의의지나건강같은것을곱씹으며삶에서는“갚아야할것과받아야할것”(135쪽)이정확하게나눠지지않는다는것을깨닫는다.이처럼서고운소설속인물들은무언가잊지않기위해,이제는사라지고없는무언가를기억속에서나마끝없이소생시키기위해움직이고또움직인다.사랑하는것들이사라져가는삶의그늘앞에서도그들은“움직이는사람은잊지않”고“기억하는사람은살아남”(64쪽)기때문이다.
우리가함께라면,
이모든일을건너갈수있을것이라는명랑한다짐
제철과일처럼상큼하고,
젤리처럼착달라붙는아홉편의소설!
현실에밀착된문제들을다루고있지만,서고운의소설에는재치가가득담겨있다.서고운이지닌유머러스한장점이눈부시게발현된표제작「사랑은하루도사랑」에는‘나’의집에예고없이찾아온동생규리와조카치치가등장한다.규리의남편은빚만잔뜩남긴채잠적해버리고,어린치치는‘죽고싶어’라는말을반복한다.‘나’의상황도녹록지않은것은마찬가지이다.‘나’는안정적인일자리를잃은채단기직을전전하는데다,동성의여자친구다연과얼마전헤어진상황이다.그럼에도이들이만들어내는화음은절망적이기보다리드미컬하고산뜻하다.홀로치치를종일돌보게된어느날,‘나’는치치를데리고광화문대형서점으로향한다.치치가볼만한그림책과문구,인형이한데모여있는곳이기때문이다.그런데막상도착한광화문에는‘태극기집회’가한창이고,서점에가려면집회를가로지르는수밖에없다.‘동성애독재금지’‘동성애반대’따위의구호들이울려퍼지는거리를빠르게지나며‘나’는다시다연과만나게되기를꿈꾼다.그러다치치의작은손을놓치고만다.‘나’는엉엉울다가,또잠시얼어붙었다가하며치치를찾아헤멘다.‘나’의눈물을오해한사람들이‘진정한애국청년’이라며치켜세우는엉뚱한상황이벌어지는것도잠시,고개를든‘나’의시야에들어온것은바로무대위에올라가작은태극기를들고있는치치의해맑은모습이다.깜짝놀란‘나’는빠르게치치에게로달려간다.과연‘나’의치치구출작전은성공할수있을까?
소설집은계속해서누군가를돌보고,함께살아가는일에대한이야기를이어나간다.두돌이되도록말을떼지못한조카민지와일시적으로함께살게된혜주의나날을그린「다이빙」,이름도나이도모두거짓인아르바이트동료명아와한지붕아래에서지내게된연지의고민을다룬「너구리온다」,갑자기시애틀로떠나고싶다고이야기하는미주와그런미주없이어떻게살아가야할지막막해하는덕희가등장하는「여름이없는나라」까지.작가는다양한관계속에놓인인물들이함께하는사계절이매순간아름답다거나,둘이상이모인다고해서삶의고단한굴레나경제적취약성이단번에해결되는것은아니라고담담히말한다.그럼에도이들은「여름이없는나라」속덕희가고백하듯이“한사람이하나의삶을지탱하는것보다는두사람이두개의삶을지탱하는편이낫”(252쪽)기에함께산다.한번씩실패를겪고휘청이는젊은인물들이“우리이제짜게살지말자”(14쪽)라며서로에게기대어체온을나누고서로의“부적”(197쪽)이되어주는순간,오롯이혼자짊어져야했던삶의무게는비로소균형을잡고“조금더명랑”(238쪽)한방향으로나아가기시작한다.
현실의절박함과환상적상상력이조화를이루는아홉편의이야기는,결국하나의간절한메시지로모인다.비정규직노동,산재피해등현실의무거운짐을진인물들은결코거창한미래를바라지않는다.이들이원하는것은그저“제대로된현관문이있고모기가없는집”(22쪽)처럼지극히일상적인것이다.누군가에게는사소해보일수있을것이다.하지만정말그럴까.서고운은그렇지않다고말한다.여자친구와의관계를인정받고자하는마음(「위드걸스」),자신의몫으로주어진공간을잘가꾸어나가고자하는열망(「너구리온다」),자신의곁을떠난누군가를잊지않으려는마음(「복숭아심기」)까지.이런작은마음들이야말로우리의삶을이끌어가는중요한열쇠라고서고운은이야기한다.
서고운의소설을읽어나가는일은삶의지난함앞에서섣부른구원이나완전한행복을기대하는대신,모기가극성을부리는구멍난방충망을테이프로막듯스스로의일상을수선해나가는과정과도같다.소설집속인물들은저마다경제적어려움,경력단절,미해결된과거의상처,혹은타인과의관계에서오는미세한균열을안고살아간다.그러나그들은무너지거나포기하는대신,유기견과온기를나누고,어린아이의분홍빛세계를들여다보며서로의곁에묵묵히있는다.서로의품이되어주며보잘것없는삶을명랑하게건너가는이이야기들을읽다보면,결국에는자신도모르게슬며시웃음짓게될것이다.아무리괴롭고,힘들어도우리는함께이기에내일로건너갈수있다고.서고운의소설은그렇게산뜻한잔향을남기며우리의곁을오래도록맴돌것이다.
책속으로
순지는230킬로미터의직선도로를머릿속으로그려보았다.양팔을옆으로벌리고,이만큼이몇개있어야되는지도헤아려보았다.눈을감고그도로위를달리는상상을하기도했다.그럴때마다왠지경이로운마음이들었다.나는앞집가족이요일마다보는방송프로그램을외울정도로모든것이가까운세상에사는데,길말고는아무것도없는세상도있다니.그세상이같은행성에있다는것도신기했고그래서더더욱세상의이곳저곳을구경하고싶어졌다.
---「숨은그림찾기」중에서
순찌는자기가또한번버려졌다고생각할까.아니면정말좋은가족을만났다고생각할까.내가잠든사이선주가입양신청서를고쳐썼듯이,사력을다해사랑을하고서로를구원하고자하는고군분투가어떤경계앞에서는너무나쉽게흐려지곤했다.
---「위드걸스」중에서
구원은필요없어.우리는살아남을거야.살아남는다는건어제로가지않는다는뜻이야.집으로돌아가면선주에게그런말을꼭해줘야겠다고생각했다.어떤예감은때로결심에가깝기때문에.
---「위드걸스」중에서
“치치는괜찮아지겠지?”
규리는내대답을기다리지않고몸을굴려엎드려누웠다.두팔을포개놓고얼굴을묻었는데아마눈물이나올까봐그러는게아닐까싶었다.나도규리옆에엎드려누웠다.그리고말했다.
“안괜찮아져도괜찮아질거야.”
그런게살아가는용기가아닐까하는생각이들었다.
---「사랑은하루도사랑」중에서
쪽지맨아래에작은글씨로택배비는착불입니다,라고적혀있었다.희지는그런사소한친절에도감동할만큼선한사람이었으며하루하루가고된사람이었다.
---「월요휴무」중에서
은정은다시눈을감았다.현비와나눈모든이야기들이한데뭉쳐노래처럼들려왔다.복숭아가알알이빛나는밤,은정은아주오랜만에울기시작했다.울음을참기에는너무밝은밤이었다.
---「복숭아심기」중에서
곰팡이가득한퀴퀴한공기가아니라삼천년을기다려야볼수있는혜성이오는밤에나무들이뿜어낸공기를담은물이잖아.꼭무슨엑기스처럼.그래서갖고있던박카스를다마셔버리고그병에다가물을담았어.그게내부적이야.그거덕분에내가널만난게아닐까.그날그렇게했던덕분에연지를만난거지.
---「너구리온다」중에서
나는도리질을했다.세상은망하지않아요.망하는사람들만있지.끝은언제나자연스러운것이다.역사는끝의연속이다.의미는인간이부여하는것일뿐이다.지구의시간은언제나멸종의멸종을거듭하며이어져오지않았는가.인류는어차피언젠가멸종할거라는식의냉소적인이야기를하고싶은것은아니다.나는모든의미가사라져버린세계에대해언제나깊은두려움을안고살아왔으니까.
---「내일의날씨」중에서
“혼자사는게더편하지않냐고.”
덕희가답을하지않자미주가재차물었다.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