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발췌 예술에 대한 글쓰기(큰글자책)

원서발췌 예술에 대한 글쓰기(큰글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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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에밀 졸라의 미술비평 기고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문학에서의 업적이 워낙 지대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에밀 졸라는 미술비평가로도 널리 활동했다. 특히 그는 당시 무명이던 마네의 예술적 가치를 최초로 인정해 주고,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전폭적인 미학적 지지를 보냈다. 또한 안이하고 관례적인 미술비평 방식에 안주하고 있던 집단과 개인을 향해 단호하게 공격을 가했다.
저자

에밀졸라

에밀졸라(ÉmileZola)
에밀졸라는1840년4월12일프랑스파리에서,프랑스인어머니와이탈리아인아버지사이에서태어났다.어린시절의에밀졸라는지극히평범한아이였던것같다.학교에서의성적은들쑥날쑥했고,공부보다는친구와놀기를좋아했으니말이다.훗날인상주의화가로서크게유명해지는폴세잔(PaulCézanne)은당시에그와가장친했던친구였다.
점점심해지는생활고를해결하기위해에밀의어머니는파리로이사하기로결심한다.1858년파리로상경한에밀졸라는그의지역사투리때문에학교친구들로부터놀림을받았다.그래서그랬는지모르지만에밀졸라는그다음해에본자연계대학입학시험에실패했다.같은해인1859년11월,그는프랑스남부의마르세유(Marseille)로가서다시입학시험에응시했지만결과는같았다.
크게낙심한어머니는그가일자리를찾도록했다.주변의도움으로세관의말단직에취직했으나그가받는급여로는집안의생계를제대로꾸려갈수가없었다.그는좀더나은직업을찾기위해노력했고,그렇게2년을고생한끝에아셰트(Hachette)출판사에취직할수있었다.
출판사의일은그의인생에커다란전환점을마련해주었다.이시기에그는많은책을접하면서자신에게내재되어있던문학적재능에신뢰를갖기시작했던것이다.24세부터전업작가의길을걷기시작한그는1865년생리학자클로드베르나르(ClaudeBernard)의저서《실험의학개론(IntroductionàlaMédecineexpérimentale)》에심취한다.이때부터에밀졸라는정신에미치는육체의영향과유전의문제에깊은관심을갖게된다.
그의대표작《루공ᐨ마카르총서,제2제정시대어느집안의자연적·사회적역사(Rougon-Macquart,Histoirena-turelleetsocialed’unefamillesousleSecondEmpire)》는바로이문제를증명하기위해서집필된실험소설이다.바로이러한이유때문에그는자연주의의대표적주자로평가되고있으며,이작품집의제7권인《목로주점(L’Asso-mmoir)》과제13권인《제르미날(Germinal)》은자연주의소설의정수로알려져있다.
에밀졸라는귀족적이기보다는서민적이며,그래서사회적정의를실현하기위해실질적으로투쟁을벌인인물로도유명하다.그는특히‘드레퓌스사건(l’affaireDreyfus)’과관련하여,1898년1월13일〈로로르(L’Aurore)〉신문에〈나는고발한다(J’accuse)〉라는제목으로대통령에게보내는공개장형식의논설기고문을발표해프랑스사회가정의와진실,그리고인권옹호의문제를인식하도록한공로를인정받고있다.하지만그의생전에이러한공로를인정받은것은아니었다.드레퓌스사건의부당성에대한기고문을발표한직후,그는프랑스육군참모본부에의해명예훼손죄로기소되어징역1년에3000프랑의벌금을내라는유죄판결을받았다.그는항소했고,그해4월2일고등법원은그에대한유죄판결을기각했다.프랑스육군역시고등법원의판결에항소했다.에밀졸라는새로운재판이열리기전에변호사와친구들의충고에따라영국으로도망을쳐야했다.
1899년6월5일드레퓌스대위가대통령특사로석방되면서에밀졸라도영국에서프랑스로귀국했다.그는다시활동을재개하는듯보였다.그런데1902년9월29일밤뜻밖의사고가발생했다.메당(Médan)의별장에서여름을보내고파리의아파트로돌아온에밀졸라부부는몇달째비워두었던집안이눅눅하다고느꼈다.그들은난로를피우고식사를한후잠자리에들었다.한밤중에마담졸라는몸에이상을느끼며잠에서깨어났다.그녀는머리가무겁고속이메스꺼웠다.난로에서발생한일산화탄소중독이었다.에밀졸라역시동일한증세로잠에서깨어났다.하지만두사람모두구조를요청할힘이없었다.다음날아침아홉시경아무런기척이없던방문을하인들이열고들어왔다.그들은이미죽어있는에밀졸라와실신한그의아내를발견했다.당시62세였던에밀졸라는이렇게어이없는사고로세상을떠났다.1902년10월5일일요일,그의장례식은국장으로치러졌으며,그로부터6년뒤인1908년6월6일,그의유해는프랑스의위인들이안치되어있는팡테옹신전(lePanthéon)으로옮겨졌다.이제그는프랑스의영원한지성으로기억되며존경받고있는것이다.

목차

어떤자살

나의살롱
내친구폴세잔에게
심사위원단1
심사위원단2
예술의시점
마네
살롱의사실주의자들
추락
어느예술비평가의고별사

에두아르마네
전기연구와비평
1.인간마네와예술가마네
2.작품세계
3.대중

해설
지은이에대해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19세기자연주의문학의대가로알려진에밀졸라는미술비평가로도활동했다.무명이던마네의예술적가치를최초로인정하고지원해주었으며,당시의화단에서인정받지못하던인상주의화가들에게전폭적인미학적지지를보냈던인물이다.또한안이하고관례적인미술비평방식에안주하고있던,하지만당대에는그권위를인정받던집단과개인을향해단호하게공격을가했던인물이다.예술과사회적정의를위해거대한조직과의전쟁도서슴지않았던용기있는인물이었다.불의에대항하기위해언론을이용할줄알았던그는,그래서표현의자유를몸소실천하며대중을일깨워준영웅이기도하다.이책에소개하는에밀졸라의글들은그의미술비평이지니는가치를재평가하기위해반드시읽어야할내용들이다.
에밀졸라의미술비평문은대부분이신문기고용이었기때문에단편적으로구성되어있다.그의미술비평에대한원칙과방법론은25세에서30세사이에형성된것이다.미술비평에대한그의지식은생트뵈브(Sainte-Beuve),에드몽아부(EdmondAbout),테오필고티에(ThéophileGautier),보들레르(Baudelaire),카스타냐리(J.A.Castagnary),프루동(P.J.Proudhon),텐(H.Taine)등과같은당대최고의지성들이발표한저술과이론을접하면서축적되기시작했다.특히1864년에읽게되는카스타냐리의글은졸라에게깊은감명과함께예술에대한몇가지원칙을제공하게된다.그것은예술가가자신의스승들로부터독립하는것은필수불가결한사실이란점,현대예술에서풍경은각별히중요한의미를지닌다는점,우리의일상생활은예술의중요한소재라는점등이다.훗날졸라는이러한원칙들을자신의미술비평의이론적토대로활용하게된다.그렇다면에밀졸라자신만의독창성은무엇일까?
그것은미술작품의주제에대한문제에서출발한다.우리는하나의작품이반드시하나의주제를지니고있다고믿는다.그래서우리는작품속에서주제를확인하는순간,그작품을이해했다고믿는다.이것을역설적으로말하면작품의주제가작품을대변한다는것인데,에밀졸라의관점에서보면이것은대단히잘못된것이다.왜냐하면주제중심의비평은작가의의도와무관하게작품에어떤줄거리나도덕성을부과하기때문이다.작품의주제에대한철학적의미부여행위는경우에따라서예술창작의진실과무관할수도있기때문이라는것이다.그래서그는작품의주제가바로작가의철학이라는사고방식은예술의가치를이해하지못하는사람들의변명이라고주장하면서,대중이예술작품을어떤주제로만이해하고,또그작품의가치를주제의철학적가치로서평가하려는사실에개탄했다.
“화가들에게있어서주제란그림을그리기위한핑계”에불과하다는것이그의생각이다.마네가작품속에몇몇오브제와인물을조합시켜놓았다면,그것은마네의철학적사고때문이아니라아름다운색채와대비를이루어내고싶다는그의욕망이표현된것이라고에밀졸라는설명한다.마찬가지논리에의해,티치아노(V.Tiziano)의작품〈우르비노의비너스(VenusofUrbino)〉를모사한것으로알려진마네(E.Manet)의〈올랭피아(Olympia)〉역시주제적접근으로는이해가불가능한작품이다.그가화폭에담은벌거벗은여인과꽃다발을든흑인하녀,그리고검은고양이,이것들은또무엇을의미하는것이란말인가?에밀졸라의설명에따르면,이그림을그린마네도,그리고미술평론을하는졸라자신도이그림의철학적의미를모른다.마네는그저하나의예술작품을완성시켰을뿐이며,이작품의가치는“미술은색과형태에의해서만흥미롭다”라는보들레르의말로써충분히설명된다는것이그의입장이다.이렇게에밀졸라는미술작품을하나의주제로인식하면서그럴듯한철학적의미를부여하는행위에대해매우부정적인입장을취했다.하지만그가예술작품의주제자체를부인한것은아닌만큼그가선호하는주제들이있었다.
에밀졸라에게있어서가장훌륭한예술적주제는굳이설명할필요가없는주제들,말하자면우리의생활속에서너무도당연하게발견되는삶의현장에대한주제들이다.이런테마를통해그는삶의에너지와진실에대한이야기를발견해내려고했다.그는작품이제공하는생명의소리,냄새,느낌등을통해세상의진실을포착했다.이것은졸라에게있어서미술작품을감상한다는것이본다는하나의고립된감각이아니라공감각적교감으로서작용한다는것을알게해주는부분이다.
자신을순수하고과학적이며객관적인분석가로자평했던에밀졸라는,하지만그의미술비평에서만큼은낭만주의적인취향을간직한채이원적예술관을유지해왔다.그의이원적예술관은예술의사회적기능과예술의자율성에관한상반된사고를바탕으로형성된것이기때문에,그자체적으로상쇄될수없는내적모순성을간직하고있었다.그런데우리가보기에그의사고와기질의차이로부터유발된이이원적모순성때문에,그의미학은지속적인변화를추구할수밖에없었다고생각된다.정형화된기존의이론과전통을부정하던그의힘은바로이이원적미학이제공하는변증법적힘이었으며,그래서그의부정은긍정이되고,그의긍정은다시부정이되는것이다.이러한이원적예술관덕분에과학적이면서도초과학적인그의미학적독창성,즉‘하나의예술작품은하나의기질을통해드러나는창조의한모퉁이’라는그의예술작품에대한정의가탄생하게된다.
그의미술비평은,그것이부정적이든긍정적이든간에,화가의‘개성’또는‘기질’을중심으로작품을이해하고설명하려했다는특징을지닌다.졸라가즐겨사용한‘개성’이나‘기질’이란용어는그것이미술작품의내재적특성을강조한다는차원에서미술의자율성인정에대한문제와연결된다.그리고미술의자율성을인정해야한다는졸라의주장은미술작품의미학적가치를작품의내재적인구조속에서찾아야한다는관점이되므로,결국그의미술비평은더이상미술작품의평가기준설정의차원에머무르지않고그평가기준에대한인식론적차원으로발전해나간다.
졸라가주제중심적미술비평을거부한이유는이러한인식론적방법에서기인하는것이며,작품을바라보는그의시각이후각,청각,촉각등과교감하면서그것을공감각적차원에서이해하려하고있다는것도,그리고그가미술비평에관련된모든규범과수사학을거부했던것도동일한이유에서였다.물론졸라스스로가인식론이란용어를사용했다거나이와관련된어떤구체적인언급을한바는없다.그러나그가비평가를의사에비유하면서,비평가는자신이검토한작품과작가에대한내용을“결론을내려고하거나,규범을제기하려는시도없이”있는그대로적어야한다고언급한것자체가지극히인식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