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서한

철학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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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러시아의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 대립의 분수령이 된 표트르 차다예프의《철학 서한》을 국내 최초로 선보인다. 러시아가 서구 문명과 절연되어 역사적 공백 상태에 있다고 비판하며, 가톨릭적 보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한 이 책은 이후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형성에 사상적 기점이 되었다. 19세기 러시아 주요 사상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이 책에 대해 “어두운 밤에 울린 한 발의 총성”이라는 유명한 평을 남겼다.
저자

표트르차다예프

표트르야코블레비치차다예프(ПётрЯковлевичЧаадаев,1794∼1856)는1794년모스크바에서부유하고유서깊은러시아의명문귀족집안의자제로태어났다.어려서부모를여의고외삼촌드미트리셰르바토프공작집에서귀족식교육을받았다.1807년부터형미하일과함께모스크바대학에서강의를들었다.1808년6월에모스크바대학학생으로정식등록하여1811년중반까지학업을이어갔다.대학에서이반드미트리예비치야쿠시킨,《지혜의슬픔》의알렉산드르세르게예비치그리보예도프,니콜라이이바노비치투르게네프,미하일니콜라예비치무라비요프ᐨ빌렌스키등과교유했다.대학강의와친교는차다예프의사상을형성하고행동방식을결정하는데중요한역할을하게된다.이시기차다예프는독일사상,특히칸트에서부터피히테,셸링,헤겔로이어지는독일관념론철학의주요내용을직간접으로인용하고반박하고수긍하면서《철학서한》의뼈대를만든다.
1812년5월,형미하일과같이후견인이자외삼촌인드미트리셰르바토프가근무했던세묘노프근위보병연대에소위보로입대한다.1813년중위로진급한뒤세묘노프연대를떠나아흐티르기병연대로자리를옮긴다.1812년6월12일조국전쟁이발발하자,보로디노전투,타루티노전투등주요전투에참여하고,쿨름전투와파리점령에도참전한다.그공로로성안나4급훈장,프로이센공훈훈장,쿨름십자장을받는다.
조국전쟁이끝난후1816년차르스코예셀로에주둔하고있던레프근위기병연대에전속된다.이곳에서카람진의저택에드나들면서여러문인과접촉하게되는데푸시킨과의만남도이때였다.푸시킨은차다예프에게상당한감명을받아〈차다예프에게〉라는시를남긴다.1817년23세의차다예프는근위대사령관의부관으로임명되고,1819년에는기병대장으로진급한다.그러던1820년10월근무하던기병연대에서반란이발생한것을계기로,1820년12월사직서를제출하고,1821년2월불명예제대를한다.
이후로도그는상트페테르부르크사교계에서멋쟁이,푸시킨의용어사용법에따르면,댄디로주목받는다.조국전쟁에서의빛나는전훈그리고유럽을직접목도한인물,거기다예술적옷차림과학식,당시사교계사람들은차다예프를두려움섞인존경으로바라보았다.
1822년형미하일과유산을나누고,1823년건강회복을위해외국여행길에오른다.영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를거쳐독일에도머무나건강이악화돼1826년다시러시아로돌아온다.여행중1825년카를스바트에서셸링과만난다.셸링과의만남은《철학서한》을비롯한차다예프의철학적인식구축에상당한영향을미친다.
1820년대중반서유럽으로의여행을기점으로차다예프의사고는계몽주의적성격에서종교철학적세계관으로전환된다.1826년러시아로돌아오던길에차다예프는데카브리스트들과연루되었다는혐의로국경선근처에서체포된다.니콜라이1세의명령으로차다예프는엄중한심문을받았다.그는어떤비밀결사에도참여하지않겠다는서약서를썼으며,북부결사에참여했다는의혹을완강히거부했다.데카브리스트들의실패는차다예프가기존의계몽주의와합리주의를포기하게만들었다.동시에셸링과프리메이슨사상이그빈자리를메꾼다.차다예프철학은이제종교적사유와철학적사유가융합된형태로자리잡는다.
1826년7월에국경선근처에서체포되어심문을받고40일만에풀려난차다예프는9월초모스크바에도착하고그해10월4일드미트로프현으로이주한다.이때부터사망할때까지모스크바의노바야바스만나야거리에있는레뱌세프가문의저택과드미트로프영지사이를오가며생활한다.
시골영지와모스크바를오가며생활하면서1829년에서1831년사이《철학서한》을집필한다.1836년《철학서한》의〈제1서한〉이문예지에등장하자마자엄청난사회적파장이몰아쳤다.니콜라이1세의진단에따라당국은차다예프를‘정신이상자’로공식적으로규정했고,차다예프는모스크바경찰당국에출석하여그결과를공식적으로통보받는다.그후매일의사가찾아와정신상태를검진했고,산책은하루에한번만허용되는등사실상가택연금에놓인다.이조치는1837년에일부완화되었으나더는글을쓰지말것이라는조건이붙었다.
《철학서한》의나머지일곱편의서한은그의생전에는출간되지못했다.니콜라이1세는그를정신병자로낙인을찍었고,당국은재빠르게그를정신이상자로세상에공표했다.마치낙인이론의설득력을증명이라도하는것처럼,차다예프도비아냥거리듯이스스로를미치광이라고불렀다.그런데이듬해에쓴《미치광이의변명(Апологиясумасшедшего)》(1837)도세상의빛을보지못했다.차다예프는계속모스크바에머물렀고,말쑥한옷차림으로사교계에출입했고,여러모임에참석했다.호먀코프,게르첸,키레옙스키,악사코프등과친교를나누었다.그러나여전히당국의감시를받았고,주변사람들은그를불편해했다.자기생각을드러내지못하는사상가는,게르첸의표현에따르면,항상슬픈비웃음을달고살았다.크림전쟁(1853∼1856)이후에는자살을결심했다고도전해진다.1856년폐렴으로사망했다.도네스코이수도원내공동묘역에안장되었다.평생독신으로살았다.

목차

제1서한
제2서한
제3서한
제4서한
제5서한
제6서한
제7서한
제8서한

해설
지은이에대해
옮긴이에대해

출판사 서평

차르를분노케하고러시아지식인을일깨운‘미치광이’의편지
1825년데카브리스트반란이유혈진압된후,러시아는니콜라이1세의철저한감시와검열아래놓였다.지식인들은침묵했고사유는정체되었다.러시아의밤이계속되던1829∼1831년,표트르차다예프는총여덟통의편지를쓴다.그는원고를가까운지인에게만보여주었고,사교계에이원고들이은밀히돌아다녔다.그러다1836년문예지《망원경(Телескоп)》에첫번째편지가공식발표되자가공할파장이일어났다.
차다예프는이첫번째편지에서‘러시아는과거그어디에서도교훈을찾을수없고,인류발전에눈곱만큼도기여하지않았으며,현재도무질서하고비합리적이다’라고러시아의현재를신랄하게비판했다.발표직후차다예프가지적한현실의최정점에있던황제는불같이분노했다.글을실은문예지는곧바로폐간되었고,편집자는유배형을받았으며,검열관은재직중이던대학에서면직되고1년징역형에연금까지몰수됐다.글쓴이차다예프는?명문귀족가문출신에군인출신이자사교계의댄디였던표트르차다예프는공식적으로‘정신이상자’로규정되었다.매일의사가찾아와정신상태를검진했고,산책은하루한번허용되었다.그여파로차다예프는써놓은나머지일곱통의서한을발표하지도못했거니와이후집필한다른저작들역시생전에출간하지못했다.여덟통의편지원고는여러장소에이모양저모양으로흩어졌고간신히비교적온전한모습을갖추는데에100년남짓의시간이걸렸다.
러시아정체성논의의사상적기점이되었으나불운을면치못한이귀한책을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국내처음으로선보인다.

어두운밤에울린한발의총성
19세기러시아주요사상가알렉산드르게르첸은회고록《과거와사고(Былоеидумы)》에“차다예프의‘편지’는일종의마지막말이자경계선과같았다.그것은어두운밤에울린총성과같았으며,무엇인가가가라앉으며멸망을알리는소리였는지,신호였는지,구조를요청하는외침이었는지,새벽의소식이었는지,혹은새벽이오지않을것이라는알림이었는지,그건중요하지않았다.중요한것은사람들이깨어나야했다는것이다”라는유명한평을남겼다.
차다예프의〈제1서한〉에따르면,유럽은기독교를중심으로놓고상호연결된국가들이연대하면서문명의발전을주도하는반면,러시아는노예적굴종과타락이판치는죽은자의도시가되었다.만일차다예프의《철학서한》이〈제1서한〉으로끝났다면한때러시아를들썩이게했던어느괴짜의현실한탄을담은글로남았을지도모른다.그러나이책은비판에멈추지않고,현실문제를그원인부터조밀하게따져진단하고그대안을철학적담론을통해논리적으로풀어낸다.
《철학서한》에서차다예프는종교와철학을결합하여러시아의현재와미래를진단하고자했다.근대철학의여러결과물을활용하면서논리적냉정함을유지했고,여기에종교적가르침을쌓았다.그는기독교의가르침을중심에놓고,왜기독교가르침이어야하는가,그리고우리는어떻게기독교가르침을인지할수있는가하는논리를구축했다.
이책은이후러시아지성사에서전개되는슬라브주의ᐨ서구주의논쟁,즉러시아정체성과러시아미래의향방에관한논쟁을촉발했으며러시아인텔리겐치아형성에지대한영향을미쳤다.차다예프가뿌린씨앗은푸시킨,게르첸,도스토옙스키를거쳐러시아문학과사상의거대한강물로흘러들었다.《철학서한》은러시아의지성사를논할때마다반드시언급되는영원한고전중의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