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세계
Description
《은세계》 표지 제목의 세 글자, 은(銀)·세(世)·계(界)는 신(新)·연(演)·극(劇)이라는 다른 세 글자를 모아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은 애초에 ‘신연극’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무대에 먼저 올랐다. 부패한 관리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죽는 최병도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채운다면, 후반부는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아들 옥남이 귀국해 강원도 의병과 맞서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봉건 권력에 맞섰던 아버지의 세대와, 그 권력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전혀 다른 저항과 마주하는 아들의 세대−이 소설은 두 세대의 이야기가 갈라지는 지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08년 동문사에서 간행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되, 결락된 부분은 필사본과 대조해 완성한 정본 《은세계》로 소개한다.
저자

이인직(李人稙)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고소설에서 근대소설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창작 활동을 했던 신소설 작가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인직은 1900년 39세에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된다. 같은 해 9월 동경정치학교에 입학하고, 다음 해 11월에는 《미야코신문(都新聞)》의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미야코신문》의 견습생으로 있으면서 〈한국잡관〉, 〈한국실업론〉, 〈한국신문창설취지서〉 등의 기사·논설과 일본어 단편소설 〈과부의 꿈(寡婦の夢)〉을 발표했다. 1904년 2월 2일 일본 육군성 제1군 사령부 소속 한어 통역관에 임명되어 활동했고, 통역관으로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1905년 1월 일본 육군성으로부터 80원의 사금(賜金)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신문사 견습생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1906년 2월부터 친일 단체였던 일진회의 기관지 《국민신보》에서 주필을 맡게 된다. 《국민신보》에 재직하면서 〈백로주강상촌〉을 연재했고, 1906년 6월에는 자신이 직접 《만세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한다. 《만세보》 주필로 있으면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혈의 누》와 《귀의 성》을 연재하게 된다. 그리고 1907년 6월 29일 《만세보》가 문을 닫게 되자 이완용의 후원을 얻어 같은 해 7월 18일 이완용의 친일 기관지인 《대한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1908년 9월에는 유일서관을 통해 《치악산(상)》을, 같은 해 11월에는 동문사를 통해 《은세계》를 출판한다. 곧이어 1911년에는 일제가 설치한 경학원(經學院)에서 사성(司成)의 임무를 부여받아 1916년 11월 25일 사망할 때까지 《경학원잡지》의 편찬을 주관하게 된다.
이인직의 정치적 노선이 친일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인직이 차지하는 위상은 쉽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안확은 이인직의 소설을 두고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하고 그 심리 상태를 그림이 극히 정묘한 지경에 이르렀다”(《조선문학사》, 1922)고 상찬을 한 바 있고, 김태준도 “조선 문학운동사에 있어서 첫 사람으로 추앙”(《증보 조선소설사》, 1939)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때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주도했던 임화마저도 이인직을 “가장 우수한 신소설 작가일 뿐만 아니라 실로 신소설이라는 양식을 창조한 사람”(《속(續) 신문학사》, 1940)으로 호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인직이 남긴 일련의 소설은 한국 근대소설사에서 중요한 좌표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은세계

해설 : 문명 개화와 민족적 허무주의의 경계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출판사 서평

■ 제목에 새겨진 장르
《은세계》 초판(동문사, 1908) 표지에서, ‘은(銀)’은 ‘신(新)’ 자를, ‘세(世)’는 ‘연(演)’ 자를, ‘계(界)’는 ‘극(劇)’ 자를 모아 만든 집자였다. 제목 자체가 이 작품의 장르, 즉 ‘신연극’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단행본으로 간행되기 일주일 전인 1908년 11월 13일부터 원각사 무대에 먼저 올랐고, 판소리 명창 김창환을 비롯한 광대들이 무대를 채웠다. 훗날 명창 이동백은 이 공연을 〈최병두타령〉이라 불렀다. 소설 《은세계》는 그 무대의 흥분을 옮겨 적은 기록이기도 하다.
《은세계》의 전반부를 채우는 탐관오리 정 감사는 실제 모델이 있다. 1886년 전후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정태호로, 공금 횡령과 여색으로 이미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 아무 죄 없이 정 감사에게 끌려가 고문 끝에 죽는 최병도, 그리고 그를 구하려 몰려들었다가 흩어지는 농민들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사건에 뿌리를 둔 서사인 것이다.

■ 상권, 그리고 쓰이지 않은 하권
초판 표지에는 분명히 ‘상권(上卷)’이라 적혀 있다. 그러나 하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 소설이 쓰인 1908년은 의병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이인직은 어째서 하권을 쓰지 않았을까.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은 없다. 다만 그 실마리는 이 소설의 후반부, 정확히는 옥남과 의병이 마주치는 마지막 장면에 있는지도 모른다.

■ 갈라지는 평가, 갈라지는 절반
《은세계》를 둘러싼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려 왔다. 한때는 개화기 최대의 정치소설로 꼽혔고, 이후에는 매국적 논리를 합리화한 작품으로 비판받았다. 이 엇갈림은 작품 자체가 반으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최병도가 정 감사에 맞서고 농민들이 민요를 일으키는 전반부는, 봉건 질서의 붕괴를 생생하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이 시기 소설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최원식, 〈《銀世界》 硏究〉, 《창작과 비평》, 1978년 여름호). 그러나 유복자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옥남이 등장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게 된다.
옥남이 강원도 의병 앞에서 늘어놓는 연설은 이 소설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이다. 옥남은 의병을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로 몰아세우고, 황제의 통치 아래 실력을 기르는 것만이 살길이라 강변한다. 이는 정 감사와 대결하던 민중의 서사가 도달한 결론과는 정반대의 자리다. 봉건 지배층에 맞서 싸우던 민중은 후반부에서 국권을 위협하는 무뢰배로 뒤바뀌고, 저항이 아니라 순응이 살길이라는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 반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인직이 하편을 잇지 못한 채 붓을 놓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인직이 그려 낸 민중은 어느새 자신의 논리로는 봉합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은세계》의 전반부가 이 시기 소설이 도달한 성취라면, 후반부는 그 성취가 어떤 방식으로 파탄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 정본 《은세계》
이 책은 1908년 동문사에서 간행된 초판을 저본으로 삼았다. 다만 동문사본은 34~36면과 59~60면이 결락된 채 전하는데, 이 부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신택영 필사본 《은세계》와 대조해 복원했다. 전북대학교 이만영 교수(고려대학교 문학박사)가 편집을 책임졌다.

■ 함께 읽을 신소설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혈의 누》,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귀의 성》,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김교제 지음, 이만영 옮김, 《치악산》,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
이인직 지음, 이만영 옮김, 《모란봉/빈선랑의 일미인》, 지만지한국문학, 2026년 10월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