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Do no harm." 이 말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직접 적혀 있는 문장은 아니지만, 고대 의학 문헌에 기록된 "도움을 주되, 적어도 해를 끼치지 말라"는 가르침이 세월을 거치며 "Primum non nocere"라는 문장으로 정제된 것이다. 비록 짧고 단순하지만, 이 문장은 의료라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짊어져야 할 무게와 인간적 책임을 가장 깊이 있게 일깨워 준다. 치료 과정에서 작은 위해라도 예견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 앞에서 한 걸음 멈춰 서야 하며, 그 해로움이 이익보다 크다면 선의를 품고 있을지라도 과감히 손을 거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생명 앞에서 의료인이 마주해야 하는 가장 적극적인 윤리적 선택이다. 환자-혹은 동물-에게 닿는 우리의 결정이 회복의 기회를 열 수도,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남길 수도 있기에 "Do no harm"은 기술보다 먼저 갖추어야 할 마음의 자세이며, 모든 임상적 판단의 중심에서 빛나는 최후의 기준이 된다.
이 원칙은 인간 의료뿐 아니라 동물 의료에서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 반려동물은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은 동물을 '소유물'로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괴리 때문에 많은 보호자들은 동물을 향한 도덕적 책임과, 법적 · 제도적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동물용의약품을 손쉽게 구입해 자가진료의 형태로 사용하는 오래된 관행 또한 이러한 구조적 인식에서 비롯된 문제이며, 이미 수년간 반복되어 온 논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하다. 2012년 수의사 처방제가 도입되며 자가진료의 문턱은 조금 높아졌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반려동물의 증상을 보고 보호자가 직접 약국에서 약을 구입해 투약하는 일이 흔하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단순한 오남용이 아니라, 동물을 생명으로 충분히 존중하지 못한 사회적 · 제도적 불균형의 반영이기도 하다. 더불어 처방대상 약물의 기준, 약사와 수의사의 권한 구분, 제도적 공백 등 해결되지 않은 논점들 역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필자는 수의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약학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병행하는 수의사 교수로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두 분야의 경계를 오가는 사람으로서, 동물약품학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어떤 균형으로 풀어내야 할지 오래 고민해 왔다. 약사의 시각과 수의사의 시각 사이에서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혹여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을 낳지 않을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특히 "veterinary medicine, 수의학"이라는 단어가 지닌 전문성과 무게를 잘 알고 있기에, 이 교재는 수의사의 전문 영역을 존중하는 범위 안에서 약국 실무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자 하였으며, 수의사의 고유한 역할과 전문성을 존중하는 방향에서 집필되도록 각별히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점에, 동물약품학 분야에서 정확하고 최신의 정보를 정리한 실무적 교재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공백을 메우는 일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주변의 수의사 동료들은 이 작업을 만류했고 우려의 시선을 보냈으며, 필자 역시 그들의 걱정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서 이 책은 약사의 동물 약품 판매를 부추기거나 수의사의 영역을 침해하기 위한 책이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오직 정확한 복용 정보와 올바른 복약지도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만을 담았다.
그리고 필자가 수업에서 가장 자주 강조해 온 말, 바로 이것을 다시 한 번 이 책의 핵심 문장으로 삼고자 한다.
"잘 모르면 판매하지 말고,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반드시 수의사의 상담을 구하라."
이 문장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다. 약사에게도 "Do no harm"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약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 과도한 자신감, 판단의 오류 하나가 반려동물에게 큰 고통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의료인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 원칙을 저버리는 일이다.
이 책이 수의사이자 약학대학에 몸담아 있는 필자의 시각에서, 약사와 수의사가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더 바람직한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데 작은 가이드가 되기를 바란다. 약사에게는 동물약품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그리고 필요한 순간 수의사의 조언을 망설임 없이 구할 수 있는 용기를, 무엇보다 반려동물의 건강과 생명을 해치지 않는 실천적 지혜를 전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책을 집필한 가장 큰 목적이며, "Do no harm"이라는 오래된 가르침이 오늘의 현장에서 다시 살아 숨 쉬게 하려는 필자의 작은 바람이다.
필자 서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