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한국, 그리고 나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개별 학문의 고유성이란 게 무색해진 지 오래지만, 적어도 ‘문학’ 영역에서만큼은 타국의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때가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저자는 그러한 자의식의 순간에 학문적 관심의 방향을 푸시킨에서 비교한국학 쪽으로 틀었다고 말하는데, 이 책에 앞서 상재한 두 권의 연구서가 이를 잘 설명한다. 각각 《시베리아의 향수: 근대 한국과 러시아문학, 1896~1946》, 《광장의 문학: 격변기 한국이 읽은 러시아, 해방에서 개방까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두 책은 심도 깊은 러시아문학 이야기면서도, 가만히 보면 주인공은 한국인이고 주무대는 한국일 수밖에 없는 연구서였다.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이 책 또한 “한국인으로서 러시아를 공부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로 적어 내려간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한다는 당돌한 야심 속에, 나의 눈으로 본 러시아, 나의 눈으로 읽는 러시아문학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강조한다. “러시아문학을 계속 읽을 수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고, 그 ‘나’가 한국이라는 맥락과 합류하여 ‘나의 러시아문학’이라는 생각의 물길을 내게 되었다”라는 취지에서다.
이 책 속 단편들은 어쩌면 러시아만의 고유한 문학과 문화를 다루면서도 외떨어진 강론의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한국과 러시아의 접점을 찾아 나선 대목들에서도 타국 문학을 하는 이의 진지한 자기 숙고가 선행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주변은 더욱 루소포비아(russophobia, 공로(恐露)의식)에 포위되어갔지만, 저자는 끈질기게 루소필리아(russophilia, 친로(親露)의식)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 책에 바로 그 설득의 단서들이 담겨 있다.
푸시킨으로부터
러시아문학의 섹션은 푸시킨으로 시작한다. 이는 저자가 문학의 장도에 들어서서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여온 이가 푸시킨이어서만은 아니다. 저자의 환기처럼, 사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의 보수ㆍ진보 지식인부터 레닌, 스탈린, 푸틴, 그리고 일반 국민 가릴 거 없이 ‘푸시킨은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슬로건 앞에서 일치단결”이었다. 러시아에서 푸시킨의 상징성과 영향력은 ‘국민시인’이라는 호명처럼 탄탄하다.
반면 한국에서 푸시킨 문학의 저변이 허약한 데 저자는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국내에서 그의 인기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투르게네프에 훨씬 못 미치고”, 그의 평판도 여전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시인에 머물러 있는 모양새다.
그러나 저자는 무엇보다 푸시킨을 ‘삶을 사랑한’ 시인으로 아낀다. 예전엔 그의 시가 “너무 평범하고 산문적이어서” 의아해했지만, 아마도 삶이란 게 바로 그런 것이므로, 지금 “이만큼 살고 보니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진짜고 진리”였다고 적는다. 이 책에서 푸시킨은 공감, 위로, 희망, 낭만, 사랑, 역사는 물론, 죽음과 이른바 ‘영끌’의 사연들까지 포괄하는 가장 넓은 스펙트럼의 작가로 바쁘게 불려 나온다. 저자의 관심이 단순한 애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눈으로 읽는 러시아문학의 걸작들
푸시킨을 이어 러시아문학의 거장들과 그 걸작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부활》, 《전쟁과 평화》,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단편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와 《죄와 벌》과 《백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체호프의 《벚꽃동산》,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까지가 예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품들이고, 브로드스키의 작은 산문집인 《베네치아의 겨울빛》과 함께 펠레빈의 《아이퍽10》, 카민스키의 《귀 먼 자들의 공화국》 등 21세기의 시간표를 달고 온 작품들도 눈에 띈다.
칼럼, 에세이라는 특성상 일상에서 촉발된 계기들이 영감이 되어 작품에 가닿게 되는데,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 목록의 시차가 길어진 만큼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하고 읽어내는 저자의 독법과 서술도 폭넓어질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뉴스를 접하다가, 강의를 (준비)하다가, 옛 기억이 떠올라, 음악을 듣다가… 이렇게 나날의 생활 속에서 저자는 자연스럽게 러시아문학의 명장면들과 접속되어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단편에 녹여냈다.
톨스토이의 욕망과 행복, 도스토옙스키의 자유와 고통, 투르게네프의 세대와 쓸모, 체호프의 냉담한 희비극, 파스테르나크의 생과 불멸, 브로드스키의 아름다운 오기(傲氣), 펠레빈의 디스토피아, 그리고 카민스키의 평화까지, 이것만으로 러시아문학을 설명한다고 보긴 어렵겠지만, 그 여정 앞에서 요긴한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짧은 분량이지만 저자의 이러한 일상 속 통찰에 힘입어 그간 두꺼워 제쳐두었던 러시아문학의 공간으로 재진입해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러시아문학의 트레이드마크인 도저한 휴머니즘의 토대 위에서 다시 한 번 인류를 숙고해보고, 시대와 권력을 반성하며, 끝내 인간만의 감수성을 응원해보자는 말이다.
나의 눈으로 본 러시아문화의 키워드
러시아문화의 섹션은 뜻밖에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연다.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시는 화자를 끌어왔지만, 실은 ‘보드카’ 얘기를 위해서다. 아시다시피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빠지면 서운하다. 저자는 대략 5백 년 역사로 어림잡는 보드카를 “원래 슬픈 술”이라는 레이블로부터 푼다. “민중은 고통을 잊기 위해 마시고, 다른 기쁨이 없어 마시고, 그다음엔 습관으로 마셨”으니, “아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술에 중독된 민중의 무질서를 꿰뚫어 본 지식인”조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비관”하며 마셨으리라. 놀라운 것은 그렇게 ‘술 취한 국가’이던 러시아의 금주 선언과 최근 변화상이다. 스스로 “보드카를 좇아 마시며 러시아의 혼돈을 이해하려 애쓰던 옛날이 한편으로 그립다”라는 게 애증 어린 이방인인 저자의 격세지감일 정도다.
이렇게 러시아문화의 섹션은 러시아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들을 책, 노래, 그림, 음식, 여행, 그리고 아프간ㆍ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여러 현실 에피소드들 속에서 건져 올린다. 물론 저자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고 절실히 느낀 체험치에 해당한다. 보드카처럼 그 실체가 분명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번안곡 〈백만 송이 장미〉와 그림 〈여배우 마르가리타〉,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과 얽혀 소개되는 ‘꽃’이 있다. 러시아 사람들 정말 꽃을 좋아한다. 환대의 한 형태인 러시아인의 따뜻한 식탁에 오르는 ‘흑빵’과 러시안 수프 ‘보르시’는 먹방 콘텐츠에 익숙한 요즘 독자들에게 어떻게 접속될지 궁금하다.
조금은 추상적인 이념과 감성 축에서 꼽으라면, 푸시킨 《대위의 딸》 속 ‘명예’나 저자가 하얼빈 여행을 통해 느낀 러시아만의 독특한 ‘애수’가 먼저다. 또 러시아의 여성성 혹은 미인에 대한 환각을 부수며 짚어내는 진정한 ‘아름다움’의 의미나 시인 튜체프에서 시작해 체호프로 연결되는 ‘말/침묵’도 러시아만의 맥락이라 흥미롭다.
한국과 러시아의 교차점에서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발단을 이렇게 소개한다. “코로나 유행으로 사라진 마스크를 찾아 뛰어다녀야 했던 2020년 초, 누구는 마스크를 쟁여두고 있는데 나는 배급품을 사러 줄 서야 했던 그 시절에, 갑자기 소련 경험이 떠올라 〈‘줄’이 무섭다〉는 에세이를 단번에 써 내려갔다. 유명인도 아닌 나에게 신문사 측에서 청탁을 해온 것이 아니라, 내가 써서 기고한 것이다. 이후 ‘자작나무 숲’ 칼럼이 이어졌다.”
이 책의 마지막 섹션은 그렇게 시작된 한국 이야기다. 어느덧 대학에서 정년을 맞은 저자의 시론 성격의 글들이지만, 설명했듯이 러시아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영감이 확장되고 사념은 가지런해졌다. 적극적인 투고였기에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들과도 정면 대결할 수 있었다. 광화문 광장 조형물 논란을 지켜보며 21세기에도 여전한 전체주의의 무모한 환영을 직시하거나, 대통령의 “진짜 서재”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이었던지라 한국의 대학/교육과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당부가 가장 많다.
이제 저자는 이 책 속 한 단편의 제목처럼 ‘그레이스풀 엔딩’ 연습을 시작하면서 “잠시 멈췄다 또 길을 떠나”겠노라고 다짐한다. 그에게 러시아는 “어렸을 적 직감했고, 또 아직껏 체감하고 있”듯이 “커다랗게 떠 있는, 그래서 매우 느리고도 무겁게 부유하는 유배의 공간”이자 “고독의 기운”이 감싼 곳. 그래서 그 막연하고도 본능적인 ‘유배의 기(氣)’를 다시 새로운 “돛대 삼아 길을 찾”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는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