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01_ 잡놈 아들을 두었던 부인
아버지의 약첩은 작았다. 싼 약재를 푸짐하게 넣어 약첩을 부풀리지 않았다. 손님에게 바로 약을 지어 주지도 않았다. 약재의 독성을 빼기 위해 따로 법제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약을 지으러 몇 번씩이나 오가는 일을 귀찮게 여겼다. 그래도 아버지는 화제(和劑)를 내고 며칠 지나서야 약을 주었다.
숙지황이란 약재는 구증구포(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리는 작업)를 거쳐야 제대로 된 약효가 났다. 다른 집에서는 이 약재를 적당히 몇 번 찌고 말린 것을 사다 쓴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주로 약재를 만들어 사용했다. 자연 다른 집보다 약값이 비쌌다.
“싼 약을 지어 주어도 그 약을 먹고 나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느냐. 환자가 오면 약을 지어 주면 되지, 단방약을 일러 주며 시장에 가서 그것을 사다가 달여 먹으라고 그냥 돌려보내느냐. 경옥고를 기껏 비싼 원료 들여서 만들어 놓고 왜 싸게 팔아서 이문을 남기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주로 했던 소리다. 당장 5남3녀나 되는 자식들 먹일 쌀과 연탄이 바닥을 보이는데도 환자를 돌려보내는 아버지가 답답해서 손님이 가고 나면 한소리 하곤 하셨다. 한창때는 대학생 여럿에 밑으로 중고등학생이 줄줄이 있었으니 등록금 대기도 벅찼을 것이다. 그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분이 매니큐어 부인이었다.
요즘처럼 사우나가 있었으면 사우나에서 하루 종일 살면서 온갖 세상사를 시시콜콜 물어내어 비판하고 정리하고 판결을 내렸을 부인이다. 한의원이 앞에 있고 뒤에 안집이 있었는데, 이 부인이 오면 뒤에까지 소리가 왕왕 울렸다. 뒤채 마루에 잡으라는 쥐는 건성만성 쳐다보고 온종일 수행자인 양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도 이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눈을 뜨고 고개를 길게 빼 보곤 했다.
나는 이 부인의 활력이 싫지 않았고, 그녀가 가져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앞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있기도 하였다. 매니큐어 바르는 이도 드문 70년대 초에 이 부인은 퍼런 수박색을 진하게 칠하고 다녔다.
“얼굴은 흉년에 열린 까지몽탱이 같은데 어디에 복이 들어서 부자로 잘사는지 모르겠다.”
어깨가 조붓하고 얼굴이 얌전하게 생겨서 남의 말은 안 할 것처럼 보이는 분이지만, 건건이 소견을 맑게 밝혔던 우리 어머니 평이다. 매니큐어 부인의 남편은 지금도 건재한 G정기화물 회사 사장이었다. 매니큐어 부인은 외제 물건이 아니면 상대도 않는다고 했다. 수박색 매니큐어를 그 시대에 벌써 발에도 바르고 다녔는데 미국제라고 자랑을 했다.
매니큐어 부인은 어머니 말에 의하면 ‘실삼맞은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실삼맞다’를 점잖지 못하면서 심히 경망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썼다. 실삼스럽기도 했지만 화끈한 성격이어서 약을 지으면 첩약 정도가 아니라 일 년치 먹을 환약을 짓거나 경옥고처럼 비싼 약을 대량 구매해서 우리 집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런 단골이 몇 집 있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우리 집 보약 마니아들이었다.
욕도 거침없이 내뿜었다. 특히 자기 아들을 ‘세상에 없는 잡놈’이라고 불렀다. J시 처녀는 다 잡아먹는 귀신이라고도 했던가? 고등학생밖에 안 되는 나이에 깡패질은 기본이고, 집에서 돈도 가져가지 않는데 펑펑 잘 쓰고 다니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어 어미인 자기도 코빼기를 볼 수 없다며 아들 흉을 늘어놨는데, 그것이 흉거리로 들리지 않고 무용담으로 들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무용담의 주인공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 끝에 감옥에 가야 할 처지에 빠졌다. 매니큐어 부인은 J시의 유력인사를 총동원하여 잡놈 아들을 빼냈다. 아버지의 희미한 친척도 일조를 했다고 들었다. 아버지와 같은 ‘청해이씨’ 일족 중 한 분이 마침 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 도움이 컸다고 매니큐어 부인은 명절이면 비싼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잡놈 아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후, 그 부인 말에 의하면 잡놈질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일찌감치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속사포로 그간 경위를 설명하던 부인이 답답했는지 댓바람에 한의원으로 달려왔다.
그 아들의 진짜 무용담이다. 감옥에 갈 뻔했던 아들이 부모님 앞에서 선언하더란다.
“지금부터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겠습니다.”
“전교 꼴등씩이나 하는 니가 공부를 하겠다고? 키우던 개가 웃겠다, 이놈아! 남 쥐어패지나 말고 엎드려 자빠져 있어.”
그런데 교과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놈이, 빈 가방만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녀석이 공부를 시작했단다.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한의원에 오기도 하는데 그 아들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니큐어 부인은 가을이면 가족을 데리고 와서 진맥을 하고 보약을 앞앞이 지어 갔다. 아들보고도 같이 가서 진맥을 받고 약을 짓자고 하였더니 “아랫도리 성성한데 왜 약을 짓느냐” 했다며, 어린놈이 할 소리냐며 ‘갈갈갈’ 웃어댔다.
그 아들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부인 말로는 자기와 달리 남편을 닮아 키도 크고 인물이 훤하다고 했다. 매니큐어 부인이 오면 혹시나 하고 바깥채에 볼 일이 있는 체 나가보기도 했지만 아들은 그 부인 말대로 코빼기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잡놈이라 불리던 아들은 주변의 예상을 모두 뒤엎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했던 공부 방법이 우리 집 한의원에 오는 손님들에게 비법으로 전해졌지만 글쎄, 그렇게 따라서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우선은 잡놈이 선행되어야 근성을 발휘할 듯싶은데 우리 집 단골손님 아들들은 대부분 양반이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러 다니던 학생 하나는 잡놈 근성은 없었으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속은 어떤지 모르겠고 겉으로 보면 점잖은 국회의원이 되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 정치인의 어머니는 매니큐어 부인을 상스럽다 여겨 어쩌다 한의원에서 만나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매니큐어 부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고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인 어머니를 ‘우뭉여사’라고 비아냥거렸다.
후기
‘G정기화물’이란 회사는 어느 도시에 가나 간간이 보인다. 그럴 때면 매니큐어 부인이 생각난다. 그 아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의 공부 비법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하기는 그의 공부 비법은 알려 줘도 따라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에게는 비법에 불과했다.
02_ 온 존재를 바친 여인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차 안에 한참 있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빗소리를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 돌아다니기는 예나 지금이나 싫어한다. 하필 비가 오는 날 시내 다방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날 만난 분은 훗날 ‘최명희’가 된 분이다.
그때도 이름은 ‘최명희’였지만 당시는 기전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국어 선생님 ‘최명희’ 씨였다.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반듯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글로 쓸 만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최명희’ 씨가 왜 독신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서 이분을 ‘내가 만난 100명의 여자들’에 감히 올린다.
대학교 선배였다고는 하지만 같은 시기에 다니지 않아서 옷깃조차 스쳐 지날 일은 없었다. 당숙 아들이 작가와 같은 과를 다녀서 이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터넷에 올려진 ‘최명희’ 씨 사진을 보니 맨드라미 빛깔 립스틱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색을 과감히 칠할 수 있는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수수해 보였다. 목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화장기도 별로 없고 두꺼운 천으로 된 원피스 차림이었다. 밝은 색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입음직한, 패션에 안목이 있는 옷차림은 아니었다.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였다. 비를 맞아서 우산을 써도 어쩔 수 없이 신발은 젖고, 스타킹에 물이 밴 꿉꿉한 상태로 들어섰다.
‘최명희’ 씨는 우리 큰오빠와 얼마 전 선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왜 나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 상황이 어색했다. ‘최명희’ 씨는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큰오빠가 마음에 들지만 자기는 결혼하지 않기로 오래전에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달라는 용건이었다. 평생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성인이 된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 같았다. 굳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앞으로도 볼 이유가 없는 나를 만나서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한 번 ‘최명희’ 씨 집을 방문했는데 오빠의 대답을 전하러 갔는지, 아님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집 안 모습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남문다리 건너 한옥으로 지붕이 낮고 어두컴컴했다. 집 안은 정갈해 보였고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풍족한 형편이 아님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생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글 쓰는 일이었음을 『혼불』을 읽고서야 알았다. 오빠가 만난 ‘최명희’와 『혼불』 작가를 처음에는 연결하지 못했다. 저자 약력을 보고서야 동일인이구나 싶었다. 인사말이었겠지만 작가 ‘최명희’ 말대로 오빠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오빠는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고 한문 실력도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데다 독서량 또한 만만치 않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를 잠깐이지만 했는데 글 쓰는 솜씨도 남달랐다. 오빠가 죽기 전 원고지 5천 매 정도의 회고록을 남겼다고 들었다. 책으로 출간하겠다고 해도 큰올케가 보여 주지 않으니 내용을 모르겠지만 『혼불』의 ‘매안이씨’ 기록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청해이씨’ 가문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최명희’는 ‘삭녕최씨’로 『혼불』 배경지인 남원 사매면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곳에 삭녕최씨 종가가 있다고 한다. 소설 속 매안이씨 종부 청암 부인이 살던 곳이다. 최명희 씨 집안이 종부 집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추측건대, 오빠와 ‘최명희’ 씨가 다방에서 잠깐 만나고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인지 두 번인지 모르겠으나 한 번 만났다 해도 둘의 이야기는 전주천 흐르듯 이어졌을 것이다. 그 물살이 아쉽지만 ‘최명희’는 평생 해야 할 일을 하자면 독신이어야 기능했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혼불』은 나의 온 존재를 요구했습니다.”
그녀 말대로 온 존재를 던져야 가능한 일을 결혼해서 남편이며 시댁 식구, 자식에게 시간을 나눠 주다 보면 흐지부지 ‘혼불’은 빠져 달아나고 말지 않았을까. 작가의 아버지도 한몫 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최명희 씨 부친이 평생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가족을 힘들게 했다고 하니 결혼에 회의를 품었을 수도 있겠다.
생뚱맞게 플로베르가 떠오른다. 그는 하루 18시간을 오직 글만 쓰며 살았다고 한다. 독신으로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신이었지만 누군가 뒷바라지를 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역시 독신이던 누나가 평생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고 하니 17년간 계속된 『혼불』을 썼던 작가 역시 독신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임박한 재앙』을 쓴 소설가 ‘린 샤론 슈워츠’는 “좋은 여자와 작가가 동시에 되기는 불가능하다. 서른두 살 때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 되느냐, 작가가 되느냐.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최명희’는 이미 스물네 살에 독신을 선택했다. 국자와 펜을 들고 고민하다가 그녀도 과감히 국자를 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유하의 시처럼 ‘사랑의 지옥’을 겪게 할 만큼, 사람을 혼미에 빠지게 할 만큼 매력이 있는 오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최명희’가 어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소설가 이청준이 평했듯,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천만다행이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어떤 작품도 쓰지 않았다. 오직 이 한 작품만을 위해 이 지구, 지구 중에서도 한국에 온 사람이었다.
여름에 오래된 책들을 정리했다. 오래된 책들로 그렇지 않아도 더운 여름이 더 더웠다. 누렇게 바랜 『혼불』을 내놨다가 들여놓기를 반복했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혼불』보다 나는 그녀가 썼다는 수필 몇 편이 더 궁금하다. 『혼불』은 『토지』를 읽을 때만큼 몰입하지 않았다. 완벽을 기하려는 서술묘사가 사람을 지치게 했고, 소설의 일차적 특성을 반감해서 띄엄띄엄 읽거나 어느 부분은 읽지 않을 권리를 가동해야 했다.
아버지의 약첩은 작았다. 싼 약재를 푸짐하게 넣어 약첩을 부풀리지 않았다. 손님에게 바로 약을 지어 주지도 않았다. 약재의 독성을 빼기 위해 따로 법제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사람들은 약을 지으러 몇 번씩이나 오가는 일을 귀찮게 여겼다. 그래도 아버지는 화제(和劑)를 내고 며칠 지나서야 약을 주었다.
숙지황이란 약재는 구증구포(아홉 번 쪄서 아홉 번 말리는 작업)를 거쳐야 제대로 된 약효가 났다. 다른 집에서는 이 약재를 적당히 몇 번 찌고 말린 것을 사다 쓴다고 했다. 아버지는 집에서 주로 약재를 만들어 사용했다. 자연 다른 집보다 약값이 비쌌다.
“싼 약을 지어 주어도 그 약을 먹고 나았다는 사람이 많은데 왜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느냐. 환자가 오면 약을 지어 주면 되지, 단방약을 일러 주며 시장에 가서 그것을 사다가 달여 먹으라고 그냥 돌려보내느냐. 경옥고를 기껏 비싼 원료 들여서 만들어 놓고 왜 싸게 팔아서 이문을 남기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주로 했던 소리다. 당장 5남3녀나 되는 자식들 먹일 쌀과 연탄이 바닥을 보이는데도 환자를 돌려보내는 아버지가 답답해서 손님이 가고 나면 한소리 하곤 하셨다. 한창때는 대학생 여럿에 밑으로 중고등학생이 줄줄이 있었으니 등록금 대기도 벅찼을 것이다. 그때마다 구원투수로 등장한 분이 매니큐어 부인이었다.
요즘처럼 사우나가 있었으면 사우나에서 하루 종일 살면서 온갖 세상사를 시시콜콜 물어내어 비판하고 정리하고 판결을 내렸을 부인이다. 한의원이 앞에 있고 뒤에 안집이 있었는데, 이 부인이 오면 뒤에까지 소리가 왕왕 울렸다. 뒤채 마루에 잡으라는 쥐는 건성만성 쳐다보고 온종일 수행자인 양 눈을 감고 있던 고양이도 이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눈을 뜨고 고개를 길게 빼 보곤 했다.
나는 이 부인의 활력이 싫지 않았고, 그녀가 가져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앞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있기도 하였다. 매니큐어 바르는 이도 드문 70년대 초에 이 부인은 퍼런 수박색을 진하게 칠하고 다녔다.
“얼굴은 흉년에 열린 까지몽탱이 같은데 어디에 복이 들어서 부자로 잘사는지 모르겠다.”
어깨가 조붓하고 얼굴이 얌전하게 생겨서 남의 말은 안 할 것처럼 보이는 분이지만, 건건이 소견을 맑게 밝혔던 우리 어머니 평이다. 매니큐어 부인의 남편은 지금도 건재한 G정기화물 회사 사장이었다. 매니큐어 부인은 외제 물건이 아니면 상대도 않는다고 했다. 수박색 매니큐어를 그 시대에 벌써 발에도 바르고 다녔는데 미국제라고 자랑을 했다.
매니큐어 부인은 어머니 말에 의하면 ‘실삼맞은 부인’이었다. 어머니는 ‘실삼맞다’를 점잖지 못하면서 심히 경망스러워 보이는 사람을 가리킬 때 썼다. 실삼스럽기도 했지만 화끈한 성격이어서 약을 지으면 첩약 정도가 아니라 일 년치 먹을 환약을 짓거나 경옥고처럼 비싼 약을 대량 구매해서 우리 집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해 주었다. 이런 단골이 몇 집 있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우리 집 보약 마니아들이었다.
욕도 거침없이 내뿜었다. 특히 자기 아들을 ‘세상에 없는 잡놈’이라고 불렀다. J시 처녀는 다 잡아먹는 귀신이라고도 했던가? 고등학생밖에 안 되는 나이에 깡패질은 기본이고, 집에서 돈도 가져가지 않는데 펑펑 잘 쓰고 다니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드물어 어미인 자기도 코빼기를 볼 수 없다며 아들 흉을 늘어놨는데, 그것이 흉거리로 들리지 않고 무용담으로 들리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무용담의 주인공이 기어코 일을 저질렀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 끝에 감옥에 가야 할 처지에 빠졌다. 매니큐어 부인은 J시의 유력인사를 총동원하여 잡놈 아들을 빼냈다. 아버지의 희미한 친척도 일조를 했다고 들었다. 아버지와 같은 ‘청해이씨’ 일족 중 한 분이 마침 판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 도움이 컸다고 매니큐어 부인은 명절이면 비싼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잡놈 아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후, 그 부인 말에 의하면 잡놈질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어느 날 일찌감치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속사포로 그간 경위를 설명하던 부인이 답답했는지 댓바람에 한의원으로 달려왔다.
그 아들의 진짜 무용담이다. 감옥에 갈 뻔했던 아들이 부모님 앞에서 선언하더란다.
“지금부터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겠습니다.”
“전교 꼴등씩이나 하는 니가 공부를 하겠다고? 키우던 개가 웃겠다, 이놈아! 남 쥐어패지나 말고 엎드려 자빠져 있어.”
그런데 교과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던 놈이, 빈 가방만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녀석이 공부를 시작했단다.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한의원에 오기도 하는데 그 아들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매니큐어 부인은 가을이면 가족을 데리고 와서 진맥을 하고 보약을 앞앞이 지어 갔다. 아들보고도 같이 가서 진맥을 받고 약을 짓자고 하였더니 “아랫도리 성성한데 왜 약을 짓느냐” 했다며, 어린놈이 할 소리냐며 ‘갈갈갈’ 웃어댔다.
그 아들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부인 말로는 자기와 달리 남편을 닮아 키도 크고 인물이 훤하다고 했다. 매니큐어 부인이 오면 혹시나 하고 바깥채에 볼 일이 있는 체 나가보기도 했지만 아들은 그 부인 말대로 코빼기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 잡놈이라 불리던 아들은 주변의 예상을 모두 뒤엎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가 했던 공부 방법이 우리 집 한의원에 오는 손님들에게 비법으로 전해졌지만 글쎄, 그렇게 따라서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우선은 잡놈이 선행되어야 근성을 발휘할 듯싶은데 우리 집 단골손님 아들들은 대부분 양반이었다.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러 다니던 학생 하나는 잡놈 근성은 없었으나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속은 어떤지 모르겠고 겉으로 보면 점잖은 국회의원이 되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 정치인의 어머니는 매니큐어 부인을 상스럽다 여겨 어쩌다 한의원에서 만나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매니큐어 부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고 전혀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인 어머니를 ‘우뭉여사’라고 비아냥거렸다.
후기
‘G정기화물’이란 회사는 어느 도시에 가나 간간이 보인다. 그럴 때면 매니큐어 부인이 생각난다. 그 아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의 공부 비법이 대대로 전해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하기는 그의 공부 비법은 알려 줘도 따라하기 힘든 방법이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사람에게는 비법에 불과했다.
02_ 온 존재를 바친 여인
빗소리가 듣기 좋아서 차 안에 한참 있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빗소리를 좋아하지만 비 오는 날 돌아다니기는 예나 지금이나 싫어한다. 하필 비가 오는 날 시내 다방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날 만난 분은 훗날 ‘최명희’가 된 분이다.
그때도 이름은 ‘최명희’였지만 당시는 기전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국어 선생님 ‘최명희’ 씨였다. 나이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반듯한 성품을 가진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다. 글로 쓸 만큼 알고 있지 못하지만 ‘최명희’ 씨가 왜 독신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서 이분을 ‘내가 만난 100명의 여자들’에 감히 올린다.
대학교 선배였다고는 하지만 같은 시기에 다니지 않아서 옷깃조차 스쳐 지날 일은 없었다. 당숙 아들이 작가와 같은 과를 다녀서 이 만남이 이루어졌다. 인터넷에 올려진 ‘최명희’ 씨 사진을 보니 맨드라미 빛깔 립스틱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색을 과감히 칠할 수 있는 여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전반적으로 수수해 보였다. 목까지 내려오는 생머리에 화장기도 별로 없고 두꺼운 천으로 된 원피스 차림이었다. 밝은 색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입음직한, 패션에 안목이 있는 옷차림은 아니었다. 겨울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였다. 비를 맞아서 우산을 써도 어쩔 수 없이 신발은 젖고, 스타킹에 물이 밴 꿉꿉한 상태로 들어섰다.
‘최명희’ 씨는 우리 큰오빠와 얼마 전 선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왜 나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 상황이 어색했다. ‘최명희’ 씨는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큰오빠가 마음에 들지만 자기는 결혼하지 않기로 오래전에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전해 달라는 용건이었다. 평생 숙제처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는 이미 성인이 된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 같았다. 굳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앞으로도 볼 이유가 없는 나를 만나서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 뒤로 한 번 ‘최명희’ 씨 집을 방문했는데 오빠의 대답을 전하러 갔는지, 아님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집 안 모습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다. 남문다리 건너 한옥으로 지붕이 낮고 어두컴컴했다. 집 안은 정갈해 보였고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풍족한 형편이 아님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생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 글 쓰는 일이었음을 『혼불』을 읽고서야 알았다. 오빠가 만난 ‘최명희’와 『혼불』 작가를 처음에는 연결하지 못했다. 저자 약력을 보고서야 동일인이구나 싶었다. 인사말이었겠지만 작가 ‘최명희’ 말대로 오빠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오빠는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고 한문 실력도 누구 못지않게 뛰어난 데다 독서량 또한 만만치 않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동아일보 기자를 잠깐이지만 했는데 글 쓰는 솜씨도 남달랐다. 오빠가 죽기 전 원고지 5천 매 정도의 회고록을 남겼다고 들었다. 책으로 출간하겠다고 해도 큰올케가 보여 주지 않으니 내용을 모르겠지만 『혼불』의 ‘매안이씨’ 기록만큼이나 흥미진진한 ‘청해이씨’ 가문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최명희’는 ‘삭녕최씨’로 『혼불』 배경지인 남원 사매면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곳에 삭녕최씨 종가가 있다고 한다. 소설 속 매안이씨 종부 청암 부인이 살던 곳이다. 최명희 씨 집안이 종부 집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추측건대, 오빠와 ‘최명희’ 씨가 다방에서 잠깐 만나고 헤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인지 두 번인지 모르겠으나 한 번 만났다 해도 둘의 이야기는 전주천 흐르듯 이어졌을 것이다. 그 물살이 아쉽지만 ‘최명희’는 평생 해야 할 일을 하자면 독신이어야 기능했을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혼불』은 나의 온 존재를 요구했습니다.”
그녀 말대로 온 존재를 던져야 가능한 일을 결혼해서 남편이며 시댁 식구, 자식에게 시간을 나눠 주다 보면 흐지부지 ‘혼불’은 빠져 달아나고 말지 않았을까. 작가의 아버지도 한몫 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최명희 씨 부친이 평생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가족을 힘들게 했다고 하니 결혼에 회의를 품었을 수도 있겠다.
생뚱맞게 플로베르가 떠오른다. 그는 하루 18시간을 오직 글만 쓰며 살았다고 한다. 독신으로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신이었지만 누군가 뒷바라지를 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다. 역시 독신이던 누나가 평생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고 하니 17년간 계속된 『혼불』을 썼던 작가 역시 독신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임박한 재앙』을 쓴 소설가 ‘린 샤론 슈워츠’는 “좋은 여자와 작가가 동시에 되기는 불가능하다. 서른두 살 때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 되느냐, 작가가 되느냐. 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최명희’는 이미 스물네 살에 독신을 선택했다. 국자와 펜을 들고 고민하다가 그녀도 과감히 국자를 담 밖으로 던져 버렸다.
유하의 시처럼 ‘사랑의 지옥’을 겪게 할 만큼, 사람을 혼미에 빠지게 할 만큼 매력이 있는 오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최명희’가 어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소설가 이청준이 평했듯,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을 남길 수 있었으니까 천만다행이다. 작가 ‘최명희’는 『혼불』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다른 어떤 작품도 쓰지 않았다. 오직 이 한 작품만을 위해 이 지구, 지구 중에서도 한국에 온 사람이었다.
여름에 오래된 책들을 정리했다. 오래된 책들로 그렇지 않아도 더운 여름이 더 더웠다. 누렇게 바랜 『혼불』을 내놨다가 들여놓기를 반복했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혼불』보다 나는 그녀가 썼다는 수필 몇 편이 더 궁금하다. 『혼불』은 『토지』를 읽을 때만큼 몰입하지 않았다. 완벽을 기하려는 서술묘사가 사람을 지치게 했고, 소설의 일차적 특성을 반감해서 띄엄띄엄 읽거나 어느 부분은 읽지 않을 권리를 가동해야 했다.
하여튼 100명의 여자 이야기입니다
$1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