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에 앉아 세상을 읽다 (양장)

그네에 앉아 세상을 읽다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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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임우재 작가의 첫 수필집 《그네에 앉아 세상을 읽다》에는 제주 여인의 삶을 맛깔스럽게 풀어낸 41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

임우재

제주도한경면청수리에서태어났다.
2019년《현대수필》에〈아버지의잠옷〉으로등단했으며,
제3회백록수필공모전에서입선,
제주대학교총장상을받았다.
현재현대수필작가회,제주문인협회,
일현수필문학회,서향원사람들,제주수필아카데미,
백록수필작가회회원으로활동하고있으며
2023년수필집《그네에앉아세상을읽다》를출간했다.

목차


책을펴내며4

제1부천국을알려드릴게요

은밀하게14
솜이불같은사람이18
천국을알려드릴게요23
세월이약은아니더라28
말의온도차35
소년의세번째낙타를타고싶다40
보라색옷을입고45

제2부꽃을보듯세상을보라

어머니의대나무52
코로나19의역설59
장을담그며63
거꾸로흐르던할머니의시계68
내가고맙다73
외증조할아버지의무화과78
나는황후마마다83
꽃을보듯세상을보라88

제3부삼베수의입혀드릴게요

그네에앉아세상을읽다96
먼나라에서만난어머니의가방101
나의발106
부디무사하기를111
삼베수의입혀드릴게요116
욕실세발자국과다섯발자국120
작별125
그해겨울에126

제4부그동안수고가헛되지않았다

아버지의잠옷132
그동안수고가헛되지않았다137
죽은자가산자를품다142
작은것부터비우기147
연꽃인연152
이름과화해하다153
두번낳은내딸159
침묵하는시계166
멍게여인171

제5부시리도록아름다운겨울날에

우리가족의QR코드178
눈물의벌초182
어머님,미안합니다!188
계절은변함없이순환하는데193
시리도록아름다운겨울날에199
십년후에나는205
돌에빼앗긴마음211
작은집하나지어조카와함께216
어느백인한의사와의이야기225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은밀하게

실바람에도낙엽은저를키운등걸위로하나둘씩내려앉는다.
이렇게또한시절이가는구나.
설핏쓸쓸하다.
따뜻한차한잔이간절해찻잔을꺼냈다.잘끓어오른찻물을천천히부어우려낸보이차한잔을들고창가에앉자,가을햇살한조각이슬며시잔위로내려앉는다.잠시우주가내려온듯온몸이따스하다.혈관을따라온기가몸에퍼진다.
호기심으로시작한차였는데돌아보니운이었다.한줌도되지않은차한모금이해를거듭하며심신을씻어주고은밀한안온함을갖게해줄줄은미처몰랐다.
카인과아벨의아픔이악몽처럼앞을가로막고캄캄하기만할때였다.마음의상처가몸의고통으로고스란히드러났다.삶을내려놓고싶을만큼심신이피폐해져병원문턱도꽤드나들었지만온갖몸부림이허사였다.그때나도모르는사이차는나를다독이고위로해주며내마음안에안식처하나를만들어주고있었다.
차를마주하고있을때비로소가슴속불길이잦아든다는것을알았다.웃음을밀어내고고통이들어앉았던마음속에서광이비치기시작했다.오롯이찻잎을살피고차향을맡으며찻물색과빛을들여다보는그순간은무위이고무심이었다.잃어버렸던웃음을그렇게다시만났다.
좋은차는마음을씻어내고기운이살아나게한다는것을선인들도아셨다.경치좋은자연에서그맛을아는도반들과함께마시는차는무아지경에오르게하고정신을바로잡아준다고한다.차를마시며자신을돌아보는일이그렇듯소중하다는의미다.
아직내게는아득한경지다.그래도이젠남편과하루의시작을차를마시며열어간다.함께살아낸날들을돌아볼때면잔잔한미소와눈물이찻잔에아롱진다.차가있어가능해진교감이고사랑이다.시간과공간을나눈사이를벗이라한다는데,차마시며취향까지나누니진짜지기가되었다.
뿐만아니다.이차한잔이내게오기까지숱한정성과수고가있었음을생각하면,사람의언어로뜻을주고받는상대가아님에도오래묵은인연인가싶기도하다.
찻잎인들얼마나아팠으랴.봄에막눈을뜨자마자사람의손끝에뜯기어뜨거운솥안에서볶이며말려지는수차례의과정은그들에게고통의시간이었을것이다.제몸이부서져진액이다빠져나올때까지으깨지고비틀리는고통을견디고나서야수십가지서로다른맛으로세상을만나다시의미를얻었을것이다.
차를알기전에는내게도찻잎처럼으깨지고볶이는고통이있어야한다는걸알지못했다.은은한맛과숨이트이듯깊은향을뽑아내기위해모진인내가필요했다는것도.
차가내게이른다.
번뇌는지우기위해서존재한다.
인내는희망으로안내하는안내자다.
그곳에는아직판도라의상자에남아있는희망이있느니라.그러니너무해묵은감정의찌꺼기들을붙잡지마라.
흐르는물에번뇌를띄워보내라.
새물이곧채워질것이다.

이제는해묵은번뇌를애써지우려하지않는다.감정의찌꺼기들이떠오르면곱게우려낸차를풀어놓고마음을기울여그맛을음미한다.
거친가,
떫은가,
익었는가.
찻물이곱다.온세상을휘돌다온바람도차향에취해잠시머뭇거리다간다.어둠이내리고다시내일이오면내밀하게우려낸차를마시며나를찾아가는여정이은밀하게시작되리라.

솜이불같은사람이

철따라음식이바뀌듯이불도제철을안다.얇은옷위에겉옷을하나끼워입으면홑이불도간절기용으로바뀐다.며칠전만해도인견으로된홑이불이었는데이제는가벼운누비이불이잠자리를같이한다.머지않아찬바람이불면이번에는두꺼운이불로바뀔것이다.
옷이유행에민감하듯이불도그에뒤지지않는다.유행을쫓아서마련한이불이이불장을채우고도남는다.아마도어린시절이불에대한향수때문인지도모른다.
이불은많은걸품어주었다.귀신이나올것처럼캄캄한밤도이불을쓰면무섭지않았다.부모님께꾸중듣고속상할때도이불을뒤집어쓰고울고나면눈녹듯설움이가라앉았다.이불밖의두려움이나헛헛하던것들이이불안에서는안심이되었다.나에게이불은피난처인셈이었다.
일년에서너번이불홑청을빨고풀하는것은이불에대한예의였다.볕좋은날빨래터는동네사람들로북적였다.솥단지를걸어놓고빨래를삶고말리기도했다.너럭바위와밭담위에널어놓은이불홑청은태양을향해경건하게순결한의식을치르는것같았다.
삶고풀하고말리고,빨래터에서의하루는숨가쁘게순서대로돌아가야끝이난다.해가넘어갈즈음이면태양의은총을받은이불홑청은순결한신부가되어집으로돌아왔다.
깨끗한이불을덮고자는날은힘들고지친영혼이평온하게안식을취하는날이기도했다.일터를옮겨다니며자취하던아버지의이불을꿰매드리고잠자리에들때도그랬다.이불은아버지에게고단한하루를쉬고내일의기운을얻을수있게마법같은힘을주었다.그마법의힘으로어른들은버티고견뎌내어오늘을이루지않았을까,생각도해본다.아버지와뽀송뽀송한이불을덮고자면서풋풋한꿈을꾸던소녀는열네살이었다.
이불이귀한대접을받던시절에는혼수목록에이불이빠질수가없었다.이불이몇채냐에따라서빈부귀천이나뉘기도했다.동네잘사는집언니가시집을가면서보기드물게트럭가득장롱과이불을실어보내자사람들은이구동성으로부러워하는걸본적이있다.그러면서누구는이불다섯채를혼수로해왔고누구는열채를해왔느니하면서새색시들을평가하기도했다.그러고보니나는열채는고사하고겨우서너채를해왔으니가난하게시집을온셈이다.
가난의기억이남아있어서인지이불을장만하면서도목화솜이불에대한느낌이남다르다.어느날아버지가무심코던진말씀이아직도가슴에남아있기때문인지도모른다.
아버지께가볍고따뜻한명주솜이불과오리털이불을사드린적이있다.그런데얼마만에보니묵은이불을덮고계셨다.
“왜무거운솜이불을덮으세요?”
“이것저것다덮어봐도솜이불만한게없다.가벼운이불은덮은것같지않고허한데,목화솜이불은묵직해서뼈에바람드는것을막아줘서좋다.사람도가벼운사람보다묵직한사람에게믿음이가는것처럼말이다.”
그러면서이불이하찮은것같아도우리에게많은것을준다고하셨다.넓고큰이불은생긴것만큼이나품어서삭이고다독이는데손색이없으니너그러운사람같다고하셨다.아버지만의인생철학일까.그래서아버지는말을아끼고속이깊은사람으로살다가셨는지도모른다.
그런데나는솜이불은아껴두고보는것만으로만족하고있다.평소에는세탁이쉽고꿰매기쉬운이불을덮는다.한번씩자고가는손님도많아서일일이이불꿰매는일을덜기위해서는편하게사용하는게좋기때문이다.
모셔놓은솜이불은일년에한두번장롱에서꺼내가을볕에말려주기만한다.눌렸던솜이햇살을맞으면갑삭하고폭신하게살아난다.다시장롱에개켜넣으면서솜이불에얼굴을비비면아버지의체취가살아나는것같다.한이불속에서아버지와꿈을키우던생각이아스라하다.아버지품성만큼이나든든해서좋다.
이제는이불을꿰매드릴아버지도어머니도안계신다.다만아버지의가르침대로믿음이가고포용력있는솜이불같이품이넉넉한사람이었으면좋겠다.주변이나이웃의허물도웃어넘기는그런사람으로말이다.

천국을알려드릴게요

산간이라수도가들어오기전의일이다.목욕한번하는걸무슨행사치르듯했다.여름에는동네어귀에있는물통에서멱을감는것으로목욕을대신했다.소와말이목을축이고,마을여자들이빨래도하는곳이었다.그러다가찬바람이불기시작하면정지구석이목욕탕구실을했다.나무통에더운물을채우고형제들이돌아가면서씻곤했다.마실물도귀해동이트면먼길을걸어서물한허벅을항아리에채워놓고야학교에갔다.
세상은좋아졌다.수돗물대신생수와정수기물이넘쳐나고,버튼만누르면더운물이콸콸쏟아진다.아침저녁으로머리를감고샤워를해도눈치볼일이없다.마음만먹으면마사지도받으면서목욕을즐길수있는세상.옛날그옹색하던때와비교하면임금님도부럽지않다.
이럴때면할머니와실랑이하며목욕하던일이어제일처럼선명하다.할머니가살아계셨다면지금쯤은벗고씻는데익숙해지셨을까?“아이고시원하다.이젠살아지켜.나랏님도부럽지않다”하고감탄사를쏟아내시지않았을까상상해본다.
할머니는몸이부자연스러웠다.열서너살때침을잘못맞아서그리되셨다고한다.왼발을살짝절고왼손도불편한할머니는온전하지않은몸을주홍글씨처럼여기며사셨다.
시골을고집하던할머니가쇠약해지자아버지는제주시내에있는집으로모셔왔다.그덕분에할머니와떨어져지내던공백이깨지고자주뵙게되었다.부모님이사는집이내가사는집하고가까웠으니마음만먹으면매일이라도들르곤했으니말이다.
할머니는새환경을낯설어하셨다.어둠에익숙하던할머니는밤에도훤하게켜진가로등불을공포로받아들였다.아침저녁으로수도꼭지를틀어놓고물을펑펑쓰는것도무척아까워하셨다.오랜세월한손으로고양이세수를하고한방울의물도아끼던습관이몸에배어서였을까?
가끔씻는일을가지고어머니와실랑이를하기도했다.어머니는할머니의묵은때를벗겨드리고싶어했고,할머니는옷벗는것을질색하셔서생기는마찰이었다.평생감추고살아온몸을노출하는것이할머니로서는수치로느껴지시는듯했다.며느리앞이라더내키지않으셨던것같았다.
그럴때면내가나서곤했다.할머니와살아봐서정이들었기때문이었는지모른다.하루는할머니를씻기는일에팔을걷어붙이고나섰다.마침푹푹찌는여름이라할머니도더위에지쳤는지힘이없어보였다.할머니의반응이어떨지눈치를살피며우선욕조에따뜻한물을채웠다.대놓고‘목욕합시다’하면기겁을할것같아서이런저런핑계를대며욕실로안내했다.하지만옷으로몸을꽁꽁감싸고벗지않으려고안간힘을쓰셨다.
내가먼저옷을벗었다.그러자할머니는얼른고개를돌려버렸다.나는할머니와마주보지않으려고등뒤에서가만히다가갔다.그리고할머니에게속삭였다.
“할머니,이렇게벗고따뜻한물속에들어가면천국가는기분이들어요.천국이어떤곳인지알려드릴게요.”
“나,천국안가도좋다.”
“그곳에가면할아버지도만나고큰아버지도만나는데그래도싫으세요?”
“경허여도남부치럽게벌건대낮에어떵옷을다벗느니.”
그러나천사의속삭임이통했는지,아니면나의강요를못이기셨는지등을돌리고하나씩옷을벗으셨다.그때처음으로아무것도걸치지않은할머니의몸을봤다.작은욕조에마주앉으니할머니는몸을오그린채가리기에바빴다.나는서두르지않았다.할머니가스스로긴장을풀때까지.
따뜻한물이할머니의부끄러움을녹이는데는그리오랜시간이걸리지않았다.경직된몸이조금씩느슨해지면서비로소손녀에게온전히몸을내어주었다.때를미는손이은밀한곳까지닿아도움츠리지않았다
가녀린어깨와단물빠진젖가슴이손안에들어왔다.가늘어진다리와오므라진손가락이애처로웠다.주름진골마다서려있는할머니의한은가슴을찢어지게하고,불구라는주홍글씨를품은가슴이돌덩이처럼무겁게느껴졌다.
천조각으로가린채사람들의이목에늘신경을곤두세웠을할머니.구멍난가슴에얼음조각처럼박인상처는아물기회가올까.때를밀다말고온갖상념에젖었다.내게신의능력이있다면진짜천국으로안내하고싶었다.
그때침묵을깨고미인이되신할머니가입을떼셨다.
“손지야고맙다.죽엉저승가민느잘되렌빌어주마.”
그로부터오래되지않아서할머니는가셨다.문득문득욕조에앉으면할머니의작은알몸이어른거린다.시간은아픈상처도아물게하는것일까.어려운일에부딪칠때마다할머니가빌어준다는생각이떠오르곤한다.그렇게생각하면정말그렇게될것같다.사랑하는손녀와의약속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