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귀환 (양장)

지연된 귀환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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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문선일 작가의 첫 수필집 《지연된 귀환》에는 40년여의 교직 생활을 정년퇴직하고 올레길 걷기, 수필 강좌, 박물관 도슨트, 색소폰 연습, 난타동아리 봉사활동까지… 자신의 삶 속으로 들어온 새로운 세상 이야기와 살면서 맞닥뜨렸던 회한과 감사의 편린들을 거침없이 풀어놓은 39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저자

문선일

제주시한림읍에서태어났다.
제주교육대학을졸업하고
한국교원대교육대학원에서석사학위를받았다.
제주에서초등교원으로41년간재직했으며
초등교장으로정년퇴직했다.
2017년《창작수필》가을호에〈아버지의바다〉로등단하여
백록수필작가회,일현수필문학회,서향원사람들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
2023년수필집《지연된귀환》을출간했다.

목차


책을펴내며4

제1부명월천이그립다

동행12
아버지의바다19
명월천이그립다28
안경아,고마워34
칠십에자연을재발견하다41
풍등에소원을실어47
사랑의고리53
가보를아들에게보내며60
베토벤에빠지다65

제2부수묵화속으로들어가다

지연된귀환72
숭조추모일을보내고78
나의어머니오갑인여사84
수묵화속으로들어가다91
백련한송이97
처음이자마지막한마디98
그림속으로빠져들었던겨울104
나의9전10기111
퇴직하고제일잘한일117
일흔다섯에유럽버스킹을꿈꾸다125

제3부세모녀의발칸반도여행기

실버들의일본버스킹132
예울림벗님들과함께142
더운국이식지않을정도의거리150
내동생의효심155
서연암풍경161
세모녀의발칸반도여행기169
손자의몽블랑트레킹을응원하며177
웃는얼굴예쁘다183
자랑스러운셋째를바라보며187
흔치않은행운을누리신분들193

제4부내가있어네가있기를

손자와나의성물(聖物)200
어머님의곶감206
나를살린것은남의살이었다213
가장맛있는음식218
마지막안식처223
어머니는꽃신을신고231
내가있어네가있기를237
나의애장품245
나는혼자가아니었구나252
엔딩노트258

출판사 서평

책속에서

동행

50여년전남편의추억여행에동행했다.그가꼭한번가보고싶어했던섬으로.겨울의끝자락싸늘한공기가한기를느끼게했지만,하늘빛은맑고투명했다.
숨어살았다는반씨네고가의문간방은세월과함께사라지고없었다.무서웠던시간을잊기위해찾은초등학교운동장에들어섰다.수령을가늠할수없는아름드리은행나무앞에섰다.
“이나무밑에앉아책을읽으며시간을보냈지….”
남편은감개무량한듯나무를어루만졌다.잎새를다내려놓고빈몸으로서있는나무.그는그윽한눈빛으로한참동안올려다보았다.
“아!옛날엔돌담집이었는데알록달록한무지개색으로변했네.”
남편은아쉬운듯교정을돌아보았다.그래도위로가되어주던은행나무가아직남아있어추억의한자락은잡은듯했다.
60년대중반한일회담반대라는역사적사건속에서나라를위해몸부림쳤던사람.대학교총학생회장이라는직책은그에게지명수배라는꼬리표를달아주었다.두달간몸을숨겨주었던강화도.
아침마다오르내리던전등사고갯길을올라가다만난어르신과대화를나누는그의뒷모습.아마50년전기억을함께더듬고있으리라.일흔이넘어되새김해보는암울했던젊은날의상흔은이제어떤색깔로남아있을까.꿈많던대학생이교정과학군단에서갑자기내쳐졌던아픔과서슬퍼런경찰의눈을피해몸을숨겨야했던시간,엄동설한처럼춥고막막했으리라.
프리드리히니체는삶의유형을세단계,즉낙타,사자,어린아이로사는것이라고했다.남편은무거운짐을묵묵히지고걷는낙타로살면서도,남다른권력의지로지배받기보다는지배하기를,명령을따르기보다는명령하기를더원했다.자유의지로삶의순간순간을사자로서거슬러오르기를원했던사람이었지싶다.
그러나이제남은생은스스로놀이규칙을만들어가볍게순진무구한어린아이로살아갔으면했는데….
나의평생의동반자강창범(姜昌範).그는정년퇴직4년후,8년간병마에잡혀무척힘들어했다.이제죽어도여한은없지만,그래도한십년만더삶이주어지면좋겠다고,살아야할이유를만들어내는그를보면서먹먹해지곤했다.
“나이대로갑자기푹쓰러질것같아.”
항암주사후유증으로힘들어하던남편의이한마디에가슴이철렁했다.그의눈을마주할수가없었다.위로가될어떤말도떠오르지않았다.눈시울이흐려졌다.동반자로아무것도해줄수없는막막함.그런암울한나날을며칠견디다보면,그는툭툭털고다시밝은얼굴로나를보고웃곤했다.‘피할수없으면즐겨라.’투병하면서벽에써붙인좌우명처럼혼자잘견뎌주었다.
다시살라해도똑같이살고싶다는자존감과무한긍정으로힘겨운병마를이겨내고있는것은아닐까.
한달에두번상경하여받는항암치료를누구의도움도마다하고혼자감당했다.청소,설거지,의복관리등잡다한집안일까지운동이라면서활기차게규칙적인생활을했다.
“병에잡히니건강한하루하루가얼마나소중한지알게되었소.”
자기몫까지하고싶은일,힘든이들을위로하는봉사활동에즐겁게참여하라고내등을떠밀어주는여유도보였다.
생로병사의고통을넘어서려애쓰면서도성숙한실존적삶을살고있는여백이있는남자.그와동행하면서둘이함께사는이순간의삶을어떻게살아야할까자문해보곤했다.
그와의동행이어느새50여년.세상이란무대에서남녀가함께추었던춤은괜찮았을까.부부사이에서도권력의의지는예외없이드러나는법.무거운짐을지고묵묵히걸어가는낙타.거슬러오르며사자로살고자하는그와의부대낌은소소한일상에서도피해갈순없었다.
“국이좀짜네.전등이또켜진채있더군.이건저자리에있어야하는데….”
가끔은모른체넘어가주었으면하는데도그냥지나치지않았다.반복해서꼬집어낼때는짜증이나곤했다.한쪽귀로듣고흘려넘기다가참을수없을땐인간의불완전함을인정하라고반박하기도했다.
사람의습관은좀처럼변하지않는다는것,그와나의평행선을보면알수있다.기억력이좋고세심하며권력의의지가넘치는남자,소탈하고덤벙거리고건망증이심하며주의력이부족한여자.그러고보니이런남녀가참오래살았지싶다.
니체는이렇게말했다.
“사랑이란자신과다른방식으로느끼며다르게사는사람을이해하고기뻐하는것이다.차이를부정하는것이아니라그차이를사랑하는것이다.”
생각해보면우린너무다른사람이었다.그래도사랑이있었지싶다.사람인(人)자처럼받쳐주고의지하는동행인.늘나의부족한면을채워주었고,격려해주었고,꿈을꾸게해주었다.언젠가야무지게역할을다하지못하는내가불만이었던남자에게물었다.
“어수룩한짝이매력적이지안허우꽈?”
“음양조화원리에서보면우리는괜찮은인연아닌가?”
당차고야문여자를만났다면어땠을것같냐고슬쩍묻는내게되레반문했다.
부부의인연은기적이다.누군가는한인간의정체성이100의422승분의1의초미세확률이라고했다.이러한인간이부부로만날수있는확률을또얼마일까.무한우주의일부인작은별에서떨어져나와,한여자의태속으로들어와모아진생명체.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이세상에서만난각각의생명들.자기와전혀다른유전자에더끌린다고도하고,이성간냄새의매력으로만나게되기도한다는부부의인연.이경이로운우연을그와나는필연으로만들어가고있을까.
산사에서내려오다가고즈넉한찻집에서차향을마주했다.창너머수령을알수없는연리지가눈에들어왔다.서로다른두가지가만나한가지가되어있었다.얼굴만한동그란구멍,그리고서로다른방향으로뻗어올라간잔가지들의자유로움과머지않아돋아날연초록잎새들.연리지는시원한그늘로산사를찾는다정한부부들을불러모을것이다.
피해갈수없는생로병사의고통을의연히받아들이던남편.50년전추억여행을함께한4년후,나만남겨놓고혼자외롭게떠나버렸다.

아버지의바다

어머니를휠체어에모시고대문을나섰다.96세의아버지가두지팡이에몸을의지하고천천히뒤를따르셨다.아버지의조끼에서‘6·25참전유공자’라는글자가유난히도드라져보인다.오늘나들이는부둣가에있는옛집을둘러보는것이었다.
옛모습을더듬으며바라본항구에는여전히깃발을세운고깃배들이북적이고,비릿한갯내음이우리를반겨주는듯했다.멀리바다위에떠있는정겨운비양도는두팔로안을만큼가깝게보였다.등대와지금은방파제로변신해버린톤대섬도친근하게다가왔다.어린시절내시야에가득했던다정한풍경들.어느사이나의소싯적추억들이뭉게구름처럼피어올랐다.
나의아버지문인수(文仁受)는배짓는목수였다.빈농의장남으로신혼초에일본군함을만드는도크를찾아가기술을배웠다고한다.그런데1948년제주의지축을뒤흔든4·3의여진속에도크로일하러떠난아버지를내놓으라며경찰이들이닥쳤다.4·3광풍은세살배기나도피해가지못했다.아버지간곳을대라고윽박지르던경찰이만삭인어머니와세살짜리나를한림지서(경찰서)로끌고갔다.나는세살때만삭이던어머니와무서운감옥살이를했다.다행히일주일후간신히풀려났다.
목숨을부지할길을찾던아버지는6·25싸움터에지원하는길밖에없다고생각하셨을까?국민학교운동장에서전쟁지원자를선발했다.그런데28세의아버지는나이가많다며‘입대불가’줄에세워졌다고한다.‘아차,큰일났구나’라고생각한아버지.
“군대가는쪽줄로슬쩍바꿔섰져.”
감독관이한눈을파는사이에줄을바꿔섰다고한다.6·25보다더참혹했던4·3을피해총알이빗발치는전쟁터로스스로들어가신아버지.그때아버지에게만삭의아내와어린딸의존재는무엇이었을까?
열한번밀고밀렸던마지막보루,치열했던백마고지전투였다.
“친구와둘이사흘을밀림속을헤매다용케살아왔져.”
소대원들이적의총알에다쓰러지고,굶주림과무서움에가슴졸이다가까스로아군에게발견되어살아나셨다는아버지.전쟁이끝나도돌아올수없었다.강원도의화물선건조도크에서2년여더배를만들고난후에야집으로올수있었다.
그러나또다시당신의일을찾아자주우리곁을떠나야했다.도크가있는먼곳으로.아버지의사랑을목말라하던어린딸은아버지가보고싶으면집앞방파제에앉아바다끝,아득한수평선을하염없이바라보곤했다.연기를날리며들어오는배들,나를향해아버지가달려오시는것만같았다.온화한미소를지으며….
그러던어느날오랜가뭄끝에단비처럼아버지는노란바탕에분홍색꽃무늬가있는예쁜티셔츠를안고오셨다.
“우아,예쁘다!”
나는생각지도못한선물을뺨에비비며팔딱팔딱뛰었다.그순간은아버지보다티셔츠가더좋았지싶다.무명치마저고리만입고다니던50년대,신소재나일론티셔츠는나의자존감을올려주는보물1호가되었다.아버지의부재로늘의기소침하던내가친구들앞에처음으로의기양양하게나설수있었다.
어디그뿐인가.아버지는나무를깎아‘세상에하나뿐인필통’을만들어주셨고,밤이면희미한등피불밑에서다정한목소리로받아쓰기를불러주시곤했다.결혼후아버지는무슨뜻에선지작은반닫이도하나만들어주셨다.그반닫이는아버지의체온을간직한채지금도거실한자리를지키고있다.
큰키에하얀피부,뚜렷한눈썹,사색에젖은듯고요한눈매에흐르는잔잔한미소,노년들어꽃가꾸기를좋아하시던아버지.온종일같이있어도먼저말씀이없으신,깊은바다처럼속이깊으셨다.
어머니는배움만이살길임을아시고우리여섯남매교육에삶의전부를걸었던것같다.하지만아버지는자주멀리집을떠나셨고,홀로남은어머니의간절한소망과감내하기어려운삶의무게를그때나는알지못했다.오죽이나힘들었으면맏딸만은당신의무거운짐을덜어주었으면하셨을까.맏딸인나는동생들을돌보고,집안살림뿐만아니라밭일과장사일까지도와야했다.지금도추억하고싶지않는버거운삶이었다.
‘왜나는실컷일만하고학교도못가야하나?’
내밑으로아들셋을내리낳고이어서두딸을더낳은어머니.그땐당연한것으로알았던살림밑천이라는큰딸인나는‘왜나는차별을받아야하냐’며억울해했다.
아무리망치로때려눌러도튀어오르는놀이기구속두더지처럼나는꿈을접을수가없었다.붙들고싶은나의유일한희망의끈을.
다행히고향에여고가개교되었다.한가닥희망을안고마음졸이고있었다.하지만아버지보다결정권이더컸던어머니는여전히말이없으셨다.긴침묵만흐를뿐….어머니눈치만살피며가슴이타들어가던어느날저녁,먹구름속에서한줄기햇살이비치듯아버지가입을여셨다.
“장학생으로학교다녀지커냐?”
아버지의이한마디가여름밤소나기를가르는천둥처럼온몸을흔들었다.드디어여고생이되었다.어머니는새벽이슬을맞으며밭일을하고밖에서장사일도하셨다.
집안일은온전히내몫이었다.학교에서돌아오면산처럼쌓여있는집안일,칭얼대는어린동생들.어머니는일요일과소풍날,방학만기다리셨다.그래도내겐꿈결같은여고시절이었다.
그러나도전은늘그에걸맞는대가를치러야하는것.어느사이대학입시가눈앞에다가왔다.대입은나에겐가당치도않은호사였다.또다시크고단단한벽앞에서야만했다.암담했다.담임선생님이몇번다녀가셔도부모님은요지부동이었다.나는고민끝에10대소녀의가출이라는용감한(?)선택을했다.시내에서유학하고있던친구의도움으로가까스로대입시험을봤다.교육대학에합격했다.
“우리딸!정말잘했져.아버지기쁘다.”
말씀이없으시던아버지의이한마디에왈칵눈물이쏟아졌다.
나의대학생활은아르바이트로학비와용돈을해결하느라늘종종걸음을쳤다.대학생의낭만은그림의떡이었다.친구들이삼삼오오음악감상실에드나드는모습이부럽기만했다.
말씀이없어도흐뭇하게나를바라보시는아버지의눈빛은고단한나의삶에큰힘이되곤했다.여자관리직이란하늘의별따기였던시절,하지만나는도전하고싶었다.그리고해냈다.교장발령을받고부모님을교장실로모셨다.소파에앉아큰딸의명패를자랑스레어루만지시던아버지.환한미소를짓고계셨지만서서히눈가가촉촉해지셨다.
“아버지덕분입니다.”
내눈시울도흐려졌다.
부모님을찾아뵌어느날,백수에가까워지신아버지께부탁드렸다.
“아버지!자손들에게꼭하고싶은말씀남겨주십서.”
“한세상사는거몬몬허진안해도,그래도좌미나게살라.”
한세기를살아낸삶에서나온성찰의한마디.‘힘들때도있지만재미있게살라’하신아버지의말씀을지금도가끔떠올린다.
험난한인생여정을살아오신부모님을모시고악기연주회를열었다.어버이은혜,고향의봄,내나이가어때서,사모곡….하모니카,오카리나,색소폰으로다양한음색을선보였다.음악에빠져드는것같던아버지가갑자기하모니카를입에물고한참동안소리를내시는게아닌가.
“열다섯엔가친구하모니카딱한번불어봐신디.”
삶의무게때문에한평생눌러왔던감성이비로소용솟음치는것이었을까.평생힘든삶을감내하느라표현하지못한감성일것이다.그때나는아버지의젊은날의소망,그한조각을보았다.지금에야뒤늦게알아챈회한이사무쳤다.
그리운내고향바다.고요한달밤,밀물이집앞까지넘실대던검푸른넓은바다!어린시절일상에지친심신을넉넉한품으로포근히안아주었던바다.아버지또한내영혼의품넓은바다였다.아버지께서만들어세상에띄워주신외로운배한척,세파를헤치고당당히항해할수있도록밀어주신분.내생에가장고마운분나의아버지!
***
2021년9월23일추석다다음날,푸른실핏줄이선명한아버지의손을꼭잡았다.아버지의손에아직힘이느껴졌다.고비를몇번넘기셨던아버지,마지막인줄몰랐다.힘겹게숨을몰아쉬는아버지의머리를감싸귀에대고속삭였다.내가평생가슴에품고있으면서입밖으로내보내지못한마지막한마디.
“사랑합니다,아버지!정말고맙습니다!”
아버지는감았던눈을살며시떠서나를바라보셨다.아버지의두손을모아꼭잡았던따스한손을놓아야했다.두시간뒤아버지는숨을거두셨다.향년100세.나의아버지의고단한인생은그렇게막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