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cription
《거인의 어깨 위에서》, 국가를 위해 일한 ‘머슴’ ‘집사’ 이야기
“자금(資金)이라는 것은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뭘 압니까.”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국회청문회에서 무심코 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회사원, 직장인, 샐러리맨이라고 부르지만 재벌가의 눈엔 그저 머슴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말은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통해 다시 알려지게 되어 큰 반향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IMF 도화선이 된 한보그룹이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겼으니 정태수는 주인은커녕 머슴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 중독자로 태어난 ‘머슴’이자 ‘집사’가 있다.
이들은 미친 듯 앞만 보고 달리며 회사 일에 목숨 걸고 뛰어다녔다. 회사가 먼저냐, 국가가 먼저냐 할 때 늘 국가를 우선적으로 택했다. 한국경제의 기적을 일군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김우중 이건희 최종현 신격호 구자경 조양호가 이들이다.
《월간조선》이 단행본으로 펴낸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가난한 나라의 머슴으로 태어나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대기업 창업주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지금은 전설이 된 창업주의 육성록(肉聲錄)을 담았다.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수 없는 어록들이 담겨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전설의 음성을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한국 네까짓 게 무슨 반도체냐”
이병철(李秉喆, 1910~1987년) 삼성 창업주가 반도체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한 세월을 그저 몇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거기에 쏟은 고민과 노력, 열정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다음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중 일부다. 아래 글은 《월간조선》 1984년 1월호에 실렸다.
〈이병철: 반도체 산업이 없다는 건, 이거 석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 첨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가부간 이걸 맹글어 봐야겠다, 그것이 경영자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암매, 작년(1982년) 여름이었지.
그걸 하려고 여러 가지로 반도체 산업 실태를, 조사를 해보았는데 구라파는 아주 쇠퇴해서 문제가 안 되고 제일 기술이 발전한 곳이 미국이고, 양산 체제로 제일 이익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이 일본이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 교섭을 해봤더니 설계 기술은 낼 수 있다고 해.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안 되제. 기업이 이익을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일본의 양산 기술을 교섭하게 되었습니다. 반도체는 로봇, TV 등에 널리 쓰이는 데 이것을 기초로 해서 제2차, 3차 제품을 맹글지요. 그런데 이것이 모자라서 각종 전자제품 만드는 데 지장이 있습니다. 안 준다고요.〉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기술을 사려고 해도 일본 사람들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도입 교섭도 피했다. 기술을 안 준다는 이야기는 안 하면서 ‘지금 바빠서’라고 자꾸 피했다고 한다.
〈이병철: 지금 바쁘다는 데 언제 끝나느냐, 10년 걸리는가, 20년 걸리는가. 그랬더니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만, 하는 데 속으로는 한국 네까짓 게 무슨 반도체냐, 냉소하는 것이 비쳐. 환하게 보이더라고. 지는 우리를 무시하고 나는 또 지를 무시한다, 그게 부딪쳤어. 애… 반년 이상 갔제, 아매. 더 적극적으로 나갔지.…〉
이병철 회장은 “대사관에 부탁한다, 일본의 정객(政客)을 동원한다, 각료 회담에 의제로 삼는다, 심지어 정상 회담에까지 정부에서 이 문제를 갖고 논의”했지만 반도체 기술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노력을 하면 길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가 도와도 도와주는 이가 생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병철: 일본에 샤프라는 회사를 찾았제. 이 회사는 방침이 기술을 전부 공개하고 다른 데 파는 거예요. 돈 받고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기술을 널리 보급하자는 게 그 회사의 사풍인 겁니다. 기술을 사가지고 간 쪽에서 돈을 벌어야 좋아하고 안 벌면 싫어하는 이상한 회사라….〉
샤프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삼성이 있었을까. 아니 샤프가 없었다면, 또 다른 기업이 삼성을 도왔을지 모른다. 미친 듯이 일하며 방법을 찾다 보면 어떤 기회가 어떤 뜻밖의 도움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왜 그럴까. 왜 위기 때마다 의인(義人)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
한때 사람들은 진화론을 먹이사슬의 관계로 보았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은 진화론으로 보면 ‘포식주의’를 의미한다.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고(故)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인류는 공생(共生), 상생(相生)의 관계로 진화해왔다. 포식에서 기생(寄生)으로, 기생에서 상생으로 문명은 발전해 왔다. 모든 생물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며 이런 의존은 생물학적, 진화론적 전략이다.
첫 쇳물이 쏟아질 때까지 흘린 뜨거운 눈물
《월간조선》 1986년 2월호에 실린 포항제철 박태준(朴泰俊 , 1927~2011) 회장의 인터뷰를 보면 저 포항에 지어진 제철소의 역사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 쇳물이 쏟아질 때까지 박태준은 세 번의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매번 뜨거운 눈물을 쏟아야 했다.
포항에서 중합제철의 부지조성 공사가 시작된 건 1968년 6월 15일. 그리고 본격적으로 1기 설비의 공장이 종합착공된 건 그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1970년 4월 1일이었다.
처음 부지공사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미국·영국·서독·프랑스·이태리 등 5국 8개사가 참여한 대한(對韓) 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해서 포항종합제철을 건설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 KISA의 계획은 이듬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경제의 외채상환능력과 제철소의 경제성에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터는 닦고 있는데 공장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낙담한 박태준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들렀다. 신일본제철의 전신회사들인 야하다의 이나야마(稻山) 사장, 후지의 나카노(永野) 사장, 일본강판의 아카사카(赤坂) 사장 등을 만났다고 한다.
〈박태준: 그분들이 잘 되어가느냐고 묻길래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어떻게 잘 되어 가지 않겠느냐고 짐짓 태연한 답변을 하였지요. 5개국 8개사의 지원을 받을 경우 기술협력 문제, 의사소통 문제, 기술의 일관성 문제 등을 제철업의 대선배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니. 이구동성으로 공장별 릴레이션이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더군요. ‘그러면 이건 가정인데, 일본 그룹에서 공장 건설에 관한 협조요청을 하면 응해줄 수 있겠느냐’고 타진했더니, 고도의 정치적 문제이나, 어떤 면에선 동정도 가고 호의도 간다면서 양국 정부진에 기본적 합의가 된다고 하면 세 분이 같이 해주겠다는 언질을 주더군요.〉
일본 측의 호의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해서 제철소가 그냥 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쓰려면 한일 정기 각료회의에서 일본 측을 설득할 일본 제철회사들의 협조각서가 필요했다. 각서를 받기 위해 다시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포항 백사장 위에 제철소를 짓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하루에 3시간 잠을 잤으면 많이 잔겁니다”
기초공사 광경을 전부 사진 찍어 가서 “우리가 이런 공장을 짓는데 원료를 좀 미리 파놨다가 달라”고 했지만, 그쪽에선 “당신들을 믿고 막대한 돈을 들여 원료를 파놨다가 안 가져가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면서 포철을 신용하지 않았다. “공기가 6개월이나 1년 늦어지는 게 보통인데 무엇으로 당신들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손해배상 각서까지 쓰고 10년 동안 유리한 조건으로 원료공급 계약을 했다.
막상 박태준이 공사 현장에 가니 공기가 석 달이나 지연돼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공기단축 비상령을 내리고 간부사원 전원을 동원해서 공사 감독조를 짜 현장에 투입했다. 그 자신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래펄을 펄펄 뛰며 독려했다.
〈박태준: 비가 올 때 이놈들이 움직이지 않겠지 하고 한밤중에 나가보면 길가에 레미콘 차가 서 있어요. 기사가 다 그 안에서 쿨쿨 자고 있는 거요. 앞차가 서니 뒷차가 서고, 서 있다 보니 졸려서 기사들이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쿨쿨 자고 있는 겁니다. 내가 그걸 돌아다니며 깨웠어요. 공사기간 동안 내가 하루에 3시간 잠을 잤으면 많이 잔겁니다. 내가 그렇게 하면서 이 제철소를 건설했소.〉
“모든 걸 바꿔라”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이건희(李健熙, 1942~2020) 삼성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모든 걸 바꿔라”라며 삼성의 질적 성장과 혁신을 선언했다.
올해가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 30주년이 된다. 이 선언 이후 수년간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혁신은 ‘삼성 신(新)경영’으로 불리며 삼성을 국내 1위 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 등 핵심 사업의 성장세를 이끌어냈고, 신경영 선언은 삼성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삼성 신경영과 급성장의 원동력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었다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회장은 신경영에 나서면서 전자, 중공업, 금융, 유통, 생활 등 모든 분야를 철저하고 꼼꼼하게 챙겼다.
〈이건희: 세계를 향한 전략을 짜야 돼.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보자고. 세계 1위를 하려면 업(業)의 개념을 잘 연구해야 돼. 반도체건 브라운관이건 전술은 있는데 전략이 없단 말이야. 전략을 세우고 업의 개념을 세우고 설계, 생산성, 인건비, 물류, 데이터분석까지 쭉 해야 돼. 그리고 삼성에서 떼어낼 업종은 뭐냐, 삼성이 더 깊이 들어갈 업종이 뭐냐, 그 업에서 내 위치가 어디냐 이런 걸 완전히 분석을 해야 되고. 그리고 인력은 기초가 있으면 좋겠어.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아이들 골라서 거기(우리 업에) 맞춰가지고 키워야 된다고.〉
“앞으로 우린 된다는 얘기야. 전략만 잘 세우면 된다고."
〈이건희:그리고 내가 늘 얘기하지만 100불짜리를 제발 80불에 팔지 말라는 얘기야. 80불짜리를 80불에 파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덤핑은 하지 말라고. 우리 철칙은 싼 물건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라는 거야. 정 하려면 철학이 있는 걸 해야지. 시계로 치면 스와치 같은 거, 플라스틱으로 만들지만 철학이 있는 저렴한 가격이거든. 싸게 많이 판다고 해도 철학이 있는 걸로 하자고. 될 수 있으면 삼성은 그런 건 안 하면 좋겠고. (신경영 선언) 1년쯤 지나니까 (사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앞으로 우린 된다는 얘기야. 전략만 잘 세우면 된다고.〉
〈이건희: 삼성은 삼성다운 걸 하면서 세계 일류, 고부가가치를 만들어야 돼. 이런 큰 전략을 만드는 회의를 일 년에 여섯 번쯤은 해야 돼. 틀만 만들어놓으면 그 방향으로 쭉 가면 되거든.
다들 5년 후 10년 후에는 뭘 할지 걱정은 하고 있나? 각 팀 각 부서에서 매일 걱정해야 돼. 시뮬레이션은 하고 있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거 아냐? 일본 일류 회사들은 직급별로 내년에 뭘 할지를 다 파악하고 있어. 우리는 사장 중역들도 내년에 뭘 할지 모르고 있단 말이야.〉
《거인의 어깨 위에서》 에 등장하는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김우중 이건희 최종현 신격호 구자경 조양호의 육성록을 읽으니 이들이야 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한 머슴이자 집사였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국회청문회에서 무심코 한 말이라고 한다. 우리는 회사원, 직장인, 샐러리맨이라고 부르지만 재벌가의 눈엔 그저 머슴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 말은 jtbc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통해 다시 알려지게 되어 큰 반향이 있었다.
그러나 1997년 IMF 도화선이 된 한보그룹이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겼으니 정태수는 주인은커녕 머슴만도 못한 인물이었다.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 중독자로 태어난 ‘머슴’이자 ‘집사’가 있다.
이들은 미친 듯 앞만 보고 달리며 회사 일에 목숨 걸고 뛰어다녔다. 회사가 먼저냐, 국가가 먼저냐 할 때 늘 국가를 우선적으로 택했다. 한국경제의 기적을 일군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김우중 이건희 최종현 신격호 구자경 조양호가 이들이다.
《월간조선》이 단행본으로 펴낸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가난한 나라의 머슴으로 태어나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대기업 창업주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지금은 전설이 된 창업주의 육성록(肉聲錄)을 담았다. 한 문장 한 문장 버릴 수 없는 어록들이 담겨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전설의 음성을 어디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한국 네까짓 게 무슨 반도체냐”
이병철(李秉喆, 1910~1987년) 삼성 창업주가 반도체 기술을 갖기 위해 노력한 세월을 그저 몇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거기에 쏟은 고민과 노력, 열정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다음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중 일부다. 아래 글은 《월간조선》 1984년 1월호에 실렸다.
〈이병철: 반도체 산업이 없다는 건, 이거 석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 첨단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가부간 이걸 맹글어 봐야겠다, 그것이 경영자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암매, 작년(1982년) 여름이었지.
그걸 하려고 여러 가지로 반도체 산업 실태를, 조사를 해보았는데 구라파는 아주 쇠퇴해서 문제가 안 되고 제일 기술이 발전한 곳이 미국이고, 양산 체제로 제일 이익을 많이 보고 있는 것이 일본이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에 교섭을 해봤더니 설계 기술은 낼 수 있다고 해.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안 되제. 기업이 이익을 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일본의 양산 기술을 교섭하게 되었습니다. 반도체는 로봇, TV 등에 널리 쓰이는 데 이것을 기초로 해서 제2차, 3차 제품을 맹글지요. 그런데 이것이 모자라서 각종 전자제품 만드는 데 지장이 있습니다. 안 준다고요.〉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기술을 사려고 해도 일본 사람들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도입 교섭도 피했다. 기술을 안 준다는 이야기는 안 하면서 ‘지금 바빠서’라고 자꾸 피했다고 한다.
〈이병철: 지금 바쁘다는 데 언제 끝나느냐, 10년 걸리는가, 20년 걸리는가. 그랬더니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만, 하는 데 속으로는 한국 네까짓 게 무슨 반도체냐, 냉소하는 것이 비쳐. 환하게 보이더라고. 지는 우리를 무시하고 나는 또 지를 무시한다, 그게 부딪쳤어. 애… 반년 이상 갔제, 아매. 더 적극적으로 나갔지.…〉
이병철 회장은 “대사관에 부탁한다, 일본의 정객(政客)을 동원한다, 각료 회담에 의제로 삼는다, 심지어 정상 회담에까지 정부에서 이 문제를 갖고 논의”했지만 반도체 기술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회장은 노력을 하면 길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누가 도와도 도와주는 이가 생긴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병철: 일본에 샤프라는 회사를 찾았제. 이 회사는 방침이 기술을 전부 공개하고 다른 데 파는 거예요. 돈 받고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기술을 널리 보급하자는 게 그 회사의 사풍인 겁니다. 기술을 사가지고 간 쪽에서 돈을 벌어야 좋아하고 안 벌면 싫어하는 이상한 회사라….〉
샤프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삼성이 있었을까. 아니 샤프가 없었다면, 또 다른 기업이 삼성을 도왔을지 모른다. 미친 듯이 일하며 방법을 찾다 보면 어떤 기회가 어떤 뜻밖의 도움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왜 그럴까. 왜 위기 때마다 의인(義人)이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
한때 사람들은 진화론을 먹이사슬의 관계로 보았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Leviathan)》(1651)은 진화론으로 보면 ‘포식주의’를 의미한다. 강한 놈은 살아남고 약한 놈은 죽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고(故) 이어령(李御寧, 1933~2022년)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인류는 공생(共生), 상생(相生)의 관계로 진화해왔다. 포식에서 기생(寄生)으로, 기생에서 상생으로 문명은 발전해 왔다. 모든 생물은 서로 의존관계에 있으며 이런 의존은 생물학적, 진화론적 전략이다.
첫 쇳물이 쏟아질 때까지 흘린 뜨거운 눈물
《월간조선》 1986년 2월호에 실린 포항제철 박태준(朴泰俊 , 1927~2011) 회장의 인터뷰를 보면 저 포항에 지어진 제철소의 역사가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첫 쇳물이 쏟아질 때까지 박태준은 세 번의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매번 뜨거운 눈물을 쏟아야 했다.
포항에서 중합제철의 부지조성 공사가 시작된 건 1968년 6월 15일. 그리고 본격적으로 1기 설비의 공장이 종합착공된 건 그로부터 2년 가까이 지난 1970년 4월 1일이었다.
처음 부지공사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미국·영국·서독·프랑스·이태리 등 5국 8개사가 참여한 대한(對韓) 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기술과 자본을 제공해서 포항종합제철을 건설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중략) 그러나 이 KISA의 계획은 이듬해 무산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국경제의 외채상환능력과 제철소의 경제성에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터는 닦고 있는데 공장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
낙담한 박태준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들렀다. 신일본제철의 전신회사들인 야하다의 이나야마(稻山) 사장, 후지의 나카노(永野) 사장, 일본강판의 아카사카(赤坂) 사장 등을 만났다고 한다.
〈박태준: 그분들이 잘 되어가느냐고 묻길래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고, 어떻게 잘 되어 가지 않겠느냐고 짐짓 태연한 답변을 하였지요. 5개국 8개사의 지원을 받을 경우 기술협력 문제, 의사소통 문제, 기술의 일관성 문제 등을 제철업의 대선배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더니. 이구동성으로 공장별 릴레이션이 대단히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더군요. ‘그러면 이건 가정인데, 일본 그룹에서 공장 건설에 관한 협조요청을 하면 응해줄 수 있겠느냐’고 타진했더니, 고도의 정치적 문제이나, 어떤 면에선 동정도 가고 호의도 간다면서 양국 정부진에 기본적 합의가 된다고 하면 세 분이 같이 해주겠다는 언질을 주더군요.〉
일본 측의 호의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해서 제철소가 그냥 지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일청구권자금을 쓰려면 한일 정기 각료회의에서 일본 측을 설득할 일본 제철회사들의 협조각서가 필요했다. 각서를 받기 위해 다시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포항 백사장 위에 제철소를 짓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하루에 3시간 잠을 잤으면 많이 잔겁니다”
기초공사 광경을 전부 사진 찍어 가서 “우리가 이런 공장을 짓는데 원료를 좀 미리 파놨다가 달라”고 했지만, 그쪽에선 “당신들을 믿고 막대한 돈을 들여 원료를 파놨다가 안 가져가면 누가 책임을 지느냐”면서 포철을 신용하지 않았다. “공기가 6개월이나 1년 늦어지는 게 보통인데 무엇으로 당신들을 믿느냐”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손해배상 각서까지 쓰고 10년 동안 유리한 조건으로 원료공급 계약을 했다.
막상 박태준이 공사 현장에 가니 공기가 석 달이나 지연돼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당장 공기단축 비상령을 내리고 간부사원 전원을 동원해서 공사 감독조를 짜 현장에 투입했다. 그 자신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래펄을 펄펄 뛰며 독려했다.
〈박태준: 비가 올 때 이놈들이 움직이지 않겠지 하고 한밤중에 나가보면 길가에 레미콘 차가 서 있어요. 기사가 다 그 안에서 쿨쿨 자고 있는 거요. 앞차가 서니 뒷차가 서고, 서 있다 보니 졸려서 기사들이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쿨쿨 자고 있는 겁니다. 내가 그걸 돌아다니며 깨웠어요. 공사기간 동안 내가 하루에 3시간 잠을 잤으면 많이 잔겁니다. 내가 그렇게 하면서 이 제철소를 건설했소.〉
“모든 걸 바꿔라”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이건희(李健熙, 1942~2020) 삼성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모든 걸 바꿔라”라며 삼성의 질적 성장과 혁신을 선언했다.
올해가 바로 ‘프랑크푸르트 선언’ 30주년이 된다. 이 선언 이후 수년간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한 혁신은 ‘삼성 신(新)경영’으로 불리며 삼성을 국내 1위 기업으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 등 핵심 사업의 성장세를 이끌어냈고, 신경영 선언은 삼성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삼성 신경영과 급성장의 원동력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이었다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회장은 신경영에 나서면서 전자, 중공업, 금융, 유통, 생활 등 모든 분야를 철저하고 꼼꼼하게 챙겼다.
〈이건희: 세계를 향한 전략을 짜야 돼. 마스터플랜을 만들어보자고. 세계 1위를 하려면 업(業)의 개념을 잘 연구해야 돼. 반도체건 브라운관이건 전술은 있는데 전략이 없단 말이야. 전략을 세우고 업의 개념을 세우고 설계, 생산성, 인건비, 물류, 데이터분석까지 쭉 해야 돼. 그리고 삼성에서 떼어낼 업종은 뭐냐, 삼성이 더 깊이 들어갈 업종이 뭐냐, 그 업에서 내 위치가 어디냐 이런 걸 완전히 분석을 해야 되고. 그리고 인력은 기초가 있으면 좋겠어.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아이들 골라서 거기(우리 업에) 맞춰가지고 키워야 된다고.〉
“앞으로 우린 된다는 얘기야. 전략만 잘 세우면 된다고."
〈이건희:그리고 내가 늘 얘기하지만 100불짜리를 제발 80불에 팔지 말라는 얘기야. 80불짜리를 80불에 파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덤핑은 하지 말라고. 우리 철칙은 싼 물건은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말라는 거야. 정 하려면 철학이 있는 걸 해야지. 시계로 치면 스와치 같은 거, 플라스틱으로 만들지만 철학이 있는 저렴한 가격이거든. 싸게 많이 판다고 해도 철학이 있는 걸로 하자고. 될 수 있으면 삼성은 그런 건 안 하면 좋겠고. (신경영 선언) 1년쯤 지나니까 (사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 앞으로 우린 된다는 얘기야. 전략만 잘 세우면 된다고.〉
〈이건희: 삼성은 삼성다운 걸 하면서 세계 일류, 고부가가치를 만들어야 돼. 이런 큰 전략을 만드는 회의를 일 년에 여섯 번쯤은 해야 돼. 틀만 만들어놓으면 그 방향으로 쭉 가면 되거든.
다들 5년 후 10년 후에는 뭘 할지 걱정은 하고 있나? 각 팀 각 부서에서 매일 걱정해야 돼. 시뮬레이션은 하고 있나? 생각해본 적도 없는 거 아냐? 일본 일류 회사들은 직급별로 내년에 뭘 할지를 다 파악하고 있어. 우리는 사장 중역들도 내년에 뭘 할지 모르고 있단 말이야.〉
《거인의 어깨 위에서》 에 등장하는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김우중 이건희 최종현 신격호 구자경 조양호의 육성록을 읽으니 이들이야 말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한 머슴이자 집사였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위대한 기업인들, 월간조선 대기업 창업주 인터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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