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암평전 (양장본 Hardcover)

만암평전 (양장본 Hardcover)

$33.00
Description
일제강점기 훼손된 조선불교를 치유하면서도
지역 공동체를 위한 복지와 교육에 매진한 선지식!!
원력보살이었던 만암 스님의 평전 출간
문도 스님들을 인터뷰하고
행적을 낱낱이 담아낸 《만암 평전》출간!

조선 말, 일제강점기 그리고 이어진 대한민국의 어지러웠던 근대사에 남긴 만암 대종사(1876~1957)의 진면목은 자비보살이자 원력보살이었다. 지혜로서 새로운 길(道)을 개척한 선지식이었다. 만암 스님은 1886년 백양사로 출가해 백양사 강원과 구암사, 해인사, 선암사 등에서 수학했으며 23세 때 백양사 운문암에서 환응 스님으로부터 강석을 물려받았다. 1914년(39세) 물외암에서 정진해 깨달음을 증득했다.
운문암을 비롯한 청류암, 해인사 등에서 강백으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운문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했다. 1916년(41세) 폐허가 되다시피 한 백양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불사를 크게 일으켜 가람의 사격을 완성했다. 1928년(53세) 불교전수학교(동국대학교의 전신) 교장에 취임했으며 《일광》 창간호에 〈시불전학생示佛專學生〉이란 글을 발표했다. 1946년(71세) 광주의 정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1947년(72세) 고불총림을 설립했으며 1954년 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1956년(81세) 〈대한불교 문제에 대한 제언〉을 발표하여 환부역조의 종조 바꾸기 등 정화운동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꾸짖었고, 1957년 1월 16일 원적에 드셨다.
《김대중 자서전》 대표 작가로 잘 알려진 김택근 작가는 이러한 만암 스님의 행적을 《만암 평전》에 낱낱이 담아냈다.
저자

김택근

시인이며작가,언론인이다.전북정읍에서자랐고,동국대국문학과를졸업했다.1983년박두진시인의추천으로《현대문학》에〈門〉〈胎〉〈針〉등을발표하여등단했다.독특한문체로여러장르의글을쓰고있다.경향신문문화부장,종합편집장,경향닷컴사장,논설위원등을역임했다.《성철평전》《용성평전》《천재들의스승-석전박한영》을지었다.《김대중자서전》을집필했고,《김대중평전-새벽》을펴냈다.그외에도《뿔난그리움》《사람의길-도법스님생명평화순례기》《강아지똥별-가장낮은곳에서별이된사람권정생이야기》《벌거벗은수박도둑》칼럼집《김택근의묵언》등이있다.

목차

발간사|한줄기빛과도같은불교의희망등_진우
추천의글|가장가난했지만가장자비로웠던보살_무공

제1장|북한산봉우리가울었다
조상을바꿀수있는가
법맥이곧혈맥
포연속의최고지도자‘만암교정’
진정한정화의길
폭력이폭력을부르다
탄허의탄식
만암이옳았다,만암을중흥조로!
마지막죽비

제2장|인연은박하고인간사참혹했노라
어머니손을잡고산문을넘다
넓고평탄했던스승취운
백양사의큰스승환응
작지만큰절구암사
추사가지은호를받다
연담의영정을가져오다
으뜸도량운문암강석에앉아
나라는기울고만암은일어서다

제3장|맑은거울은앞뒤가없다
이것이무엇인가
물외암에서깨닫다
학명이깨달음을만져주다
해동율맥을잇다
백양사에세운금강계단
중도를설파하다

제4장|임제종통을지킨남녘의선승
백양사스님들“부처를팔지말라”
백용성과박한영의죽비
만암‘선우공제회’깃발을들다

제5장|아름다운절에천년의하늘을담다
백양사를다시거룩한백양사로
도의스님영각을짓다
다시솟아오른운문암
부처님진신사리를모시다
남도제일의풍광쌍계루

제6장|가장가난했던자비보살
동물들도만암곁을맴돌아
중이되기전에는부처를말하지말라
노동은또다른선이다
반선반농운동을최초로펼치다

제7장|인재불사가곧항일
광성의숙에중도하차는없다
최초의근대불교학교명진
흔들렸던불교학교
3.1만세혁명과저항운동의기수들
인재불사의꽃,만암을교장으로
정신문화의요람,중앙불전을세우다
최후를책임지는인문학의왕국
정광학원을세우다

제8장|오래된새길,고불총림
고불의길을따라부처님처럼
고불총림은또다른영산회

제9장|대웅전을태우려면나도태우시오
구름도숲도울었다
제자서옹
손상좌수산

제10장|당우들이소복을입다
열반

글을마치며|부처의길에서멀어진이들은만암스님이무서웠을것이다

부록
만암종헌대종사연보
참고문헌

출판사 서평

일제강점기훼손된조선불교를치유하면서도
지역공동체를위한복지와교육에매진한선지식!!
원력보살이었던만암스님의평전출간


일제의간악한왜색화,온몸으로막아내다

일제는조선불교의근본뿌리조차없애기위해‘취처육식(娶妻肉食)’을강요하며왜색화를꾀했다.그로인한조선불교의전통은너무나도혼란스러웠다.그리고이어진한국전쟁과비구대처간분규,만암종헌스님의일생은조선말,일제강점기,한국근대사에이르는역사의격변기속에있었다.만암스님은출가수행자의위의와종단의법맥을이어갈수있을지그시기의고뇌들이가득하다.수행가풍을벼리고도제양성과교육,포교,복지등버거운문제들을헤쳐나가야했기에스님의발걸음은무거웠다.
그가운데만암스님은오직부처님법에의지해정진하고포교하고,민초들을위해복지와교육사업에매진하였다.불교와세간에절박한불사들을쉼없이실행하고널리홍포했다.스님의행보하나하나에는“인재불사가곧항일”이라는믿음이확고했다.1909년경승려들의현대적인교육기관인광성의숙廣成義塾을세웠다.인재불사만이식민지를벗어나나라를찾을수있다는확신은흔들림없었다.

수행과교육의당간지주를세우다

《만암평전》에는‘오직은산철벽(銀山鐵壁)을뚫겠다’며정진한선대수행자들의가르침을바탕으로정진과화합의수행공동체를지켜내겠다는만암스님의원력이파노라마처럼이어진다.만암스님은솔선수범했다.특히사회의고통을함께나누고공생하면서항상사회적약자를부처님모시듯실천했다.어지러운악조건속에서도교육불사에매진하셨기에스님의곁에는십대안팎의어린사미들이줄을이어산문을열고입산하였다.
“세상의인연이이미박(薄)하고입산한지도오래지않았는데또이런변을당하게되매이는바로불문에중이되는길밖에없으니문득이일을당하여인간세상에참혹한일을어찌다이르겠는가.”
이한구절은만암스님의일생이며구도의길에서벗어남이없도록하는계율이자화두였다.스님은속명이있을터인데이를아무에게도말하지않았다고한다.그래서속가이름을아무도모른다.그것은어떻게든속세의인연을끊고오직수행자로서한길을가겠노라고다짐한처절한결기였다.스님은‘수행자가가는길’에서결코벗어남이없었다.
1950년한국전쟁이터졌을때만암은백양사고불총림방장이었다.남녘의백양사에는전쟁의화가미치지않을것으로생각했지만아니었다.전라도일대의사찰들은빨치산의근거지를없애야한다며거의가남쪽군경의방화로소실되었다.백양사에군인들이들어와암자들을불태웠다.그리고군인들이대웅전으로몰려갔다.그안에만암스님이앉아있었다.군인들이만암스님을끌어내려했다.“대웅전만은안되오.부처님만은지켜주시오.”그렇게대웅전을지켰다.


한국불교의기준이되는교육의주춧돌을굳건히하다

만암스님은1916년백양사주지로취임했다.우선아름다운도량을짓고싶었다.당시백양사는극락보전과초가한채만남아있었다.스님은자신의호처럼‘만암(曼庵-아름다운절)’을짓기시작해불사를원만히마무리했다.
만암스님은1951년6월조선불교제3대교정(敎正)에추대되었다.제1대석전스님,제2대한암스님의뒤를이었다.두스님에이어교정으로추대됐음은당시만암의불교계위상이어땠는지를엿볼수있다.석전박한영은중앙불교전문학교학장직을만암보다늦게지냈지만만암과더불어인재양성에매진했던교육의선구자였다.백양사에서광성의숙을세웠을때는박한영이초대숙장(교장)을,만암이숙감(교감)을지냈다.만암스님은석전한영,한암중원스님의뒤를이은교정과대강백으로서한국불교의기준이되는교육의주춧돌을굳건히했다.


노동은또다른선이다-반선반농

“작년처럼금당연못을고친다일러라.또쌍계루앞개천에보를수리하고,사찰논에자갈도치워야한다고해라.한집도빠지지않게주의해야할것이야.”
일꾼은한집에한명씩만을부르도록했다.빠지는집이없도록세심하게챙겼다.사실연못은멀쩡한편이었고,쌍계루앞개천의보도망가진곳은없었고,논에도자갈은거의없었다.그럼에도일을시켰다.이른봄에는감나무와비자나무등유실수를심었고,그때도심은그루를헤아려품삯을주었다.삯으로는곡식을주었다.주민들의자존심을건드리지않고아울러함께살아가자는일종의공동체울력이었다.
만암스님은승려들과신도들에게자급자족을독려했다.이른바반선반농(半禪半農)이었다.이러한반선반농은아주오래전에이미선종에서있었다.스님은아흔이넘어서도밭일을했다.제자들이호미를숨기고하루만이라도쉬라고청했으나듣지않았다.일하지않으면먹지않겠다며아예방문을잠그고식사를거부했다.“아무런덕도없는데어찌남들만수고롭게하겠는가.일하지않으면먹지않을뿐이다.”
지역공동체를위한복지와교육에매진한선지식,만암스님의이러한실천은혼란의시기를지내는지금이시대에도큰울림이있다.지금우리들이나아가야할바를보여주고계신다.